이번 소송전은 2019년 LG화학이 미국 ITC에 SK이노베이션을 제소하며 시작되었다. ⓒLG화학 제공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전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LG에너지솔루션의 손을 들었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가 결정되어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두 한국 기업의 대결처럼 보였던 이 사안은 정세균 국무총리까지 나서 “미국 정치권에서도 (중재해달라는) 연락이 오고 있다. 빨리 해결해야 한다(3월7일 유튜브 방송 발언)”라고 말할 만큼 국제정치 사안으로 번지고 있다.

이번 소송전은 2019년 4월29일, LG화학(LG에너지솔루션 전신, 2020년 11월28일에 배터리 부문 분사)이 미국 ITC에 SK이노베이션을 제소하며 시작되었다. 당시 LG화학 측이 제기한 혐의는 영업비밀 침해였다. LG화학은 2017년부터 SK이노베이션이 자사의 2차전지 관련 핵심 인력을 영입하며 상당수 영업비밀을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미국 ITC는 독립적인 준사법 연방기관으로 주로 무역과 관련된 분쟁을 조사하는 곳이다. 당시 LG화학은 ITC 제소와 함께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에도 영업비밀 침해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함께 제기했다. ITC 제소가 연방지방법원 소송에 비해 결과가 빨리 나오고, 소송 과정에서 곧바로 증거보존 의무가 적용된다는 점을 활용한 결정이었다.

소송전 초반부터 SK이노베이션에는 악재가 따랐다. 2020년 2월14일 ITC가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 판결(default judgement)’을 내렸다. ITC는 SK이노베이션 측의 증거인멸을 판결의 주된 이유로 꼽았다. 혐의를 입증할 관련 문서를 SK이노베이션 측이 증거보존 의무 기간(증거 개시 과정)에 파기했다는 것이다. 반면 SK이노베이션은 ITC가 문제 제기한 문서 삭제가 주기적인 문서보안 점검 활동의 일환이었으며, 삭제된 문건과 LG화학이 주장하는 영업비밀 침해의 연관성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SK이노베이션은 자사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혐의(영업비밀 침해 소송과는 별개)로 LG화학을 ITC에 제소했고, LG화학 역시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특허 침해 맞고소전을 펼치며 양측의 법적 다툼은 격화되었다.

결국 ITC는 올해 2월10일 영업비밀 침해 문제에 대해 최종적으로 LG에너지솔루션의 손을 들어주며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을 비롯한 각종 부품·소재를 ‘10년간 미국 내 수입금지’토록 명령했다. 다만 이미 SK이노베이션과 수주계약을 맺은 완성차 업체 포드(4년)와 폭스바겐(2년)은 유예기간에 배터리·부품 수입을 허용하기로 했다. ITC의 행정명령은 최대 60일 동안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검토(Presidential Review)를 거친 뒤 확정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이 해당 행정명령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이 거부권을 기대하고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실제로 거부권을 발동해 SK이노베이션의 손을 들어주기란 쉽지 않다. 그동안 영업비밀 침해 문제에 대한 ITC의 결정이 미국 대통령에 의해 뒤집힌 적이 없어서다. 다만 2차전지 산업과 전기차 생태계에 대한 바이든 행정부의 관심은 이전과 다르다.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산업 품목의 해외의존도를 낮추고 싶어 한다. 실제로 2월24일부터 이들 품목의 미국 내 공급망을 검토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SK이노베이션은 바이든 대통령의 ITC 행정명령 거부권 행사를 기대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제공

2차전지 산업은 사활을 건 전쟁터

SK이노베이션 측은 대규모 생산직 일자리를 공급하며 안정적으로 2차전지 상품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을 들며 미국 내 여론에 호소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법인 자회사(SK Battery America)를 통해 현재 미국 조지아주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1공장은 내년부터 가동될 예정이고 2공장도 2023년 가동을 목표로 설립 추진 중이다. 공장이 위치한 조지아주는 산업 유치와 공장 정상 가동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 주지사도 2월12일 바이든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지아주 상원 의회는 3월23일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합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월에 미국 법인의 사업고문으로 임명한 샐리 예이츠 전 미국 법무차관을 통해 미국 내 공론장에 이 문제를 띄우고 있다.

국제적으로 이번 소송전이 눈길을 끌다 보니 한국 기업 간 합의를 종용하는 분위기도 제기되었다. 당초 업계와 금융권에서는 ITC 최종 결정 직후 두 기업 간 합의가 이뤄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합의금 규모에 대한 양측의 생각 차이가 크다. LG에너지솔루션은 3조원 가까운 합의금을 요구하고 있지만 SK이노베이션은 수천억 원 수준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적당한 중간 금액을 합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최근 2차전지 산업을 둘러싼 사업 환경이 녹록지 않아서다.

2차전지 산업은 각국이 사활을 걸고 있는 전쟁터에 가깝다. 업계의 경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2차전지 산업은 흔히 반도체·디스플레이와 더불어 한국이 가장 앞서는 기술산업군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산업 생태계가 이제 막 조성되는 단계인 데다 후발 주자가 많아 점점 가격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특정 업체가 확실한 우위를 점하며 점유율을 꾸준히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업종이다. 특히 그동안 각국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지불하던 전기차 보조금이 줄어들 것으로 보여 배터리 ‘단가’를 낮춰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전기차 제작 원가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차지하는 부품이 바로 배터리다. 가령 4700만원짜리 전기차 한 대를 지금은 보조금 1200만원(중앙정부 보조금+지방정부 보조금)을 지원받아 구매할 수 있다면, 향후 완성차 업체는 ‘보조금 없는 시대’를 대비해 차의 출고가를 3500만원까지 떨어뜨려야 한다. 자연히 가장 비싼 부품인 배터리의 가격부터 덜어내야 한다. 3월22일 이베스트투자증권이 발표한 분석 자료에 따르면 전기차 한 대당 들어가는 배터리 비용(60㎾h 기준)은 현재 2200만원 선인데, 이를 절반 가까이 낮춰야 하는 실정이다.

완성차 업체들도 직접 배터리 개발에 뛰어들어 수직계열화를 시도하는 추세다. 일찌감치 배터리 독립을 선언한 테슬라는 물론이고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주요 고객사인 폭스바겐도 3월15일 기술 로드맵 발표 자리에서 자회사(스웨덴 노스볼트)를 통해 수직계열화를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배터리 산업은 진입장벽이 낮아 후발 주자의 도전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향후 중국 업체의 도전도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LG에너지솔루션이나 SK이노베이션 모두 ‘버는 만큼 투자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경쟁 압력이 큰 상황에서 두 기업 모두 ‘조 단위 합의금’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발동 여부는 늦어도 4월11일(현지시간)까지 결정될 전망이다. 거부권이 발동되지 않더라도 SK이노베이션은 연방고등법원에 ITC의 결정에 대해 항소할 수 있다. 델라웨어 지방법원에 제기된 영업비밀 침해·손해배상 소송은 이 항소가 끝난 뒤에야 진행된다. 양측이 작정하고 끝까지 간다면 앞으로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에 따른 소송비용 부담은 더 커질 전망이다. LG에너지솔루션 측은 중국 업체를 비롯한 후발 주자들의 영업비밀 침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소송이 일종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역시 전기차 생태계에 이제 막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미래 먹거리를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끝난 줄 알았던 소송전의 여진은 당분간 지속될 공산이 커 보인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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