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체르노빌
애던 히긴보덤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대체 무언가?”

1986년 4월26일 새벽, 체르노빌 원전 사고 소식을 듣고 맨 먼저 출동했던 시민방호군 장교를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듯이 방사능을 사랑했다.” 740쪽에 이르는 만만찮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 책의 일차 동력은 저널리스트 출신인 저자의 필력에서 나온다.
궁극의 힘은 역시 팩트다. ‘사회주의의 밝은 미래’를 약속했던 원자로가 어떻게 ‘수 세대에 영향을 미칠 어마어마한 재앙’의 진원지가 됐는지 책은 치밀하게 추적한다. 부패한 구체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비밀주의에 기반한 원자력 산업 자체가 파국을 잉태하고 있었다. 35년 전 연대기가 이토록 실감나게 읽히는 건 변치 않는 재난의 법칙 때문일 테다.

 

 

 

 

 

 

 

 

페테르부르크, 막이 오른다
김주연 지음, 김병진 그림, 파롤앤 펴냄

“러시아 제국의 수도를 배경으로 흘러간 역사 속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도시를 가득 메운 극장들과 결합된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지은이는 대학 시절, 이 도시에서 만난 공연들에 매혹되었다. 밤마다 극장을 순례하고, 공연 후에 백야의 밤거리를 헤매며 ‘감동의 출처’를 고민했다. 그 특별했던 경험이 그를 공연 현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무대’라는 키워드로 이 도시를 소개하는 책을 펴냈다. 쉽게 잘 읽힌다.
표트르의 도시란 뜻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격동의 역사를 통과하며 페트로그라드로, 레닌그라드로 불렸다가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이 도시에는 클래식·오페라·발레·연극 등 수많은 공연이 매일 열리고, 지은이는 그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문화 기행을 읽고 버킷리스트에 적어둔다. ‘가고 싶은 예술도시, 페테르부르크.’

 

 

 

 

 

 

 

 

자본주의 대전환
리베카 헨더슨 지음, 임상훈 옮김, 어크로스 펴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다.”

중학교 사회 시험에서 ‘기업의 목적’을 묻는 문제를 틀린 적이 있다. ‘사회 공헌’을 골랐는데, 오답이었다. 정답은 ‘이윤 추구’였다. 우리 시대가 기업에 돈벌이 말고는 어떤 다른 목적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불평등부터 기후위기까지 결정적인 문제들은 점점 더 나빠져갔다.
리베카 헨더슨도 우리 시대의 결정적 문제를 풀어보고 싶은 연구자다. 그는 현재의 기업이 이런 문제에 꽤 책임이 있다고 진단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결정적 문제를 풀기 위해 기업의 힘을 쓰자고 주장한다. 기업의 목적, 소유 구조, 그리고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면 가능하다. 기업은 강력한 문제해결 기구다.
이 기구가 정말로 중요한 문제를 풀도록 규칙을 바꿀 때다. 우아하면서 위력적인 아이디어다.

 

 

 

 

 

 

 

 

피에 젖은 땅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글항아리 펴냄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블러드랜드(Bloodlands, 원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세력과 소비에트연방 사이에 놓인 동유럽 지역을 뜻한다. 이 책은 1933년부터 1945년에 우크라이나·폴란드·벨라루스와 발트해 연안국에서 1400만명이 희생된 역사를 탄탄한 사료와 생생한 묘사를 통해 재구성한다. 2010년 출간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극찬을 받았던 책이다.
독일 내 유대인 집단수용과 살해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일어난 학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독일의 동쪽, 소련의 서쪽에 위치한 ‘블러드랜드’에서 발생한 학살은 소련과 독일이라는 양대 제국주의가 번갈아가며 자행한 참극이었다. 전쟁의 승자가 써내린(주로 영국·미국·프랑스를 통해 기록된) 역사만 배운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전해주는 책이다.

 

 

 

 

 

 

 

 

마지막 산책
나가미네 마사키 지음, 야쿠 가오리 그림, 송경원 옮김, 지금이책 펴냄

“이 손으로 엄마를 돌보고, 이 손으로 엄마를 죽였다.”

10년간 돌보던 치매 노모를 죽인 아들의 이야기다. 일본 사회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던 실화가 바탕이다.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는 아들의 하루, ‘간병 살인’이라는 결말에 한 걸음씩 다가가던 지난날, ‘온정 판결’이라는 이름이 붙은 재판 장면이 곱고도 처연한 그림과 함께 종이 위에 펼쳐졌다. 일본뿐 아니라 이미 우리나라에도 빈번히 벌어지고 있는 ‘간병 살인’ 문제를 머리와 함께 가슴으로 같이 읽을 수 있게끔 해주는 책이다. 가족 돌봄의 굴레 속에서 홀로 고통받는 개인의 이야기는 이제 사회 전체가 마주해야만 하는 공통 과제다.

 

 

 

 

 

 

 

 

선생님의 보글보글
이준수 지음, 산지니 펴냄

“학교가 호감 가는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죠?’ 하면서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저자 말대로, 교직은 참으로 요상한 직군이다. 학생과 학부모 선호 직원 상위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욕을 먹는 직업 중 하나다. 교사 스스로가 생각하는 직업 만족도는 하위권을 맴돌지만 결혼 배우자 상대로는 상위권에 꼽히는 ‘몹시 복잡하고 역설적인’ 직업이다. 저자는 페스탈로치와 생활인, 교육자와 직업인 사이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애오욕을 솔직하지만 매우 정감 있게 풀어놓았다. 학교 이야기를 날것으로 전해주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의외로 묵직한 안정감을 주는 이유는, 그것들을 하나로 꿰어주는 한 가지 원천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학생과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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