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09년 7월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안학수 하사의 동생 용수씨(맨 오른쪽) 일행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전 국군 포로를 ‘탈영한 범죄자’라고 불렀다.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는 허위 사실을 날조해 포로를 매도하고 국내 가족은 사실상 간첩단에 준해 철저히 탄압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1966년 9월9일 베트콩에 포로로 잡힌 국군건설지원단 소속 안학수 하사다. 당시 안 하사는 1년여의 베트남전 파병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 일주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공무출장(사이공 미군부대 보급창에 가서 부대 의약품 수령)을 나갔다가 베트콩에 포로로 붙잡힌 뒤 하노이 포로수용소에 6개월간 수감됐다. 이후 당시 비밀리에 베트남에서 활동하던 북측 심리전 장교들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갔다. 안 하사가 사라졌으나 부대 측은 일일전투상보 등을 통한 보고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동안 안 하사의 실종 사실을 은폐하고 정상 근무를 하고 있는 것처럼 허위 처리한 사실이 드러났다.

〈시사IN〉은 그가 실종된 지 50여 년 만에 군 정보기관이 작성한 기밀 서류를 입수했다. 보안사령부 공작과에서 작성·관리해온 이 서류들은 안 하사의 친동생 안용수 목사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군 포로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군 당국에 정보공개를 청구하는 과정에서 최근 일부가 입수된 것이다. 실종 뒤 안 하사의 최초 행적은 육군 보안부대(제9329부대)에서 1967년 5월8일 중앙정보부장에게 보낸 ‘월북사건 진상조사 결과보고’라는 서류에서 확인된다. “1966년 9월26일 월북. 사이공에 나갔다가 귀대하지 않았으므로 실종 일시 장소는 불상.” 보안사가 중앙정보부에 보낸 이 최초 보고서는 안 하사가 북한으로 가게 된 경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평소 근무 양호하던 자로서 불평불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월남에서 1년간 연장 근무를 희망할 정도였으나 여자관계가 복잡하여 사이공에서 탈영했다가 베트콩에 의해 납북된 것으로 인정됨.”

안학수 하사가 포로가 되어 북한으로 납치된 뒤 보안사는 그의 국내 연고자들을 ‘가족 간첩단’에 준해 철저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관리주체는 보안사 공작과였다. 〈시사IN〉은 보안사 공작과가 1970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23년에 걸쳐 안 하사 가족을 간첩단에 준해 감시 탄압한 내부 자료를 입수했다. 보안사 공작 문건 제목은 ‘106호 공작 내사서’다. 106호는 보안사가 안 하사에게 붙인 공작 번호다. 이 서류에서 보안사는 마치 가족 간첩단 사건을 방불케 하는 ‘남파 예상자 안학수 체계도’라는 도표까지 그려가며 안 하사 가족을 사찰한 것으로 드러났다. 직계가족은 물론이고 외가 등 친인척, 친구들까지 총 42명에 이르는 인물들을 잠재 간첩망으로 엮어 넣고 일거수일투족을 미행, 감시, 사찰한 것이다. 이런 공작 활동은 수시로 보안사 대공처장과 보안사령관에게 보고됐다.

보안사 공작과의 비밀문서 중 특이 사항은 당시 포항 동부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안 하사의 부친 안영술씨에 관한 내용이다. 공작 기록에 따르면 1967년 3월 말 동네 할머니가 라디오를 청취하다가 북한 단파에서 잡히는 안 하사 육성을 듣고 이를 안 하사의 어머니에게 알렸다. 안 하사의 납북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부친 안영술씨는 곧바로 국방부와 파월장병 상담소로 달려가 아들의 소재와 생사 확인을 요구했다. 공작 문건에는 이때 비로소 가족에게 안 하사가 베트남에서 북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적혀 있다. 한편 보안사 공작과는 동네 할머니를 체포해 포항경찰서로 하여금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조치했다.

ⓒ시사IN 신선영보안사의 공작 문건 ‘106호 공작 내사서’. 보안사는 ‘남파 예상자 안학수 체계도’라는 도표까지 그려가며 안 하사 가족을 사찰했다. 이 감시와 탄압은 1970년부터 1993년까지 이어졌다.

문민정부 때까지 이어진 보안사 공작

이 문건에는 현지 경찰이 가족을 상대로 간첩사건 유인 공작을 벌인 내용도 담겨 있다. 1967년 5월께 포항 동부초등학교 안영술 교장 앞으로 무기명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경향신문〉 시민 광고란에 ‘학수야 빨리 돌아오너라’라고 광고를 내면 안학수 하사가 돌아올 것”이라는 요지의 편지였다. 안용술씨는 이 편지를 받자마자 포항경찰서에 신고했다. 보안사 공작과 사찰 문건은 이 편지 사건에 대해 간첩의 소행이 아니라 경찰 자체에서 안 하사 가족의 신고정신 확인과 사상 테스트를 위해 발송한 것이었다고 적어두었다.

특이한 사실은 보안사와 중앙정보부가, 1966년 베트남에서 납북된 안 하사가 1975년 말 북한을 탈출하려다 붙잡혀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서도 이후로도 십수 년간 가족을 상대로 간첩 사건 조작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는 점이다. 보안사 기밀문서에 기재된 안 하사의 최후는 이렇다. “자수 간첩 김용규가 1976년 거문도 공작 구상 차 순안초대소 체류 시 지도원으로부터 득문한 바에 의하면 안학수는 입북 후 대남심리전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1974년 초 사회와 직장에서 면치된 바, 북괴의 조직 생활과 자유 없는 생활에 대한 불평불만이 고조되어 암암리에 탈출을 기도하였으며 끝내 1975년 말경 한만 국경지대에서 만주로 탈출하려다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된 직후 간첩죄로 평양 근교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보안사 공작과는 그 뒤로도 ‘106호 작업 지시’라는 제목의 공작 문서에 안 하사 가족들의 이동 행적, 주변 친한 지인, 생활 변화, 외지 출타 현황, 평소 언동 및 동향 등을 감시하고 기록했다. 안 하사의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끈질긴 동태 감시는 연좌제가 폐지된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 초반까지 이어지다가 1993년 10월23일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춘다.

수십 년에 걸친 정보기관의 감시 탄압으로 안 하사 가족은 풍비박산 났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부친 안영술씨는 강원도 횡성에 있는 교재공장 말단 노동자로 쫓겨난 뒤 화병으로 사망했다. 안 하사의 두 형제는 각각 국민은행과 한국전력에 다녔는데 직장에서 쫓겨났다. 바로 밑 동생 안용수씨는 주기적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

안용수씨는 2000년대 들어 국군 포로와 형 안학수 하사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군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이미 안 하사를 비롯한 납북 국군 포로의 실태와 강제 월북 과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실을 은폐한 채 보안사에서 사후에 날조한 ‘자진 월북’ 소설을 기초로 계속 은폐와 수세적 방어로 일관해왔다. 안용수 목사는 천신만고 끝에 외무부 기밀 해제 문서 등을 토대로 형이 납북된 사실을 찾아내 통일부와 국방부를 상대로 안 하사의 납북 및 전사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수세에 몰린 국방부는 마지못해 안 하사를 ‘탈영 후 자진 월북자’에서 ‘외출 미귀환 및 납북’으로 수정하고 ‘국군 포로 추정자’로 변경했다. 이에 유족이 강력히 항의하자 2010년에야 국군 포로로 수정하고 병적상 사망통지서를 보낸 뒤 하사에서 중사로 추서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월북이나 납북에 대한 객관적 증거가 없는 상태라서 유가족에 대한 정치적 배려로 월북보다 납북이 개연성 높다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 납북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안 하사 가족에게 가한 탄압에 대한 피해 구제를 외면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 보안사 공작과가 자행한 간첩단 조작 및 사찰행위 등 불법행위 문서를 입수한 안용수 목사는 이를 〈시사IN〉에 제보해왔다. 이어 그는 과거사 진상규명 기구인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베트남전 포로와 가족에 대한 은폐·조작 탄압 과정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청원서를 제출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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