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제공〈방랑〉헤르만 헤세, 범우사, 1985년 초판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무척 건강해 보였다. 큰 키에 다부진 몸매가 마치 운동선수 같았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시각장애인용 지팡이가 아니었다면 그가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B씨는 시력을 잃은 지 10년쯤 됐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세계 방방곡곡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유목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역마살이라고 할까요? 그런 게 있었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도 학교 마치고 곧장 집에 들어가는 일이 별로 없어서 어머니가 언제나 저를 찾으러 다니셨죠. 고등학생 때는 무전여행도 숱하게 했고요.”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들어가서는 곧장 학교 근처 작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책이라고 하면 상상만 해도 좀이 쑤실 것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아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즈음 서점에 자주 오는 여학생 손님에게 마음이 끌렸다. 둘이 본격적으로 사귀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학생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느꼈다. 어느 날 여학생은 B씨에게 책을 한 권 선물했다. 바로 그 책을 찾아달라고 온 것이다.

여학생과 사귀게 된 것은 아니지만 더 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책을 읽은 다음 거기에 자극받아 학교를 자퇴했다. 세상의 여러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 가지고 배낭에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네가 좋아하는 곳이라면···”

“거기 나오는 한 부분이 워낙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서 미안하게도 책 제목은 잊었습니다. 좋아하는 곳이 어디든지 거기에 앉아서 생각에 잠기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행복한 울림을 줄 거라는 내용입니다.”

난감했다. 정확하지도 않은 어느 한 문장을 근거로 제목조차 모르는 책을 어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B씨는 작가 이름을 기억해냈다. 헤르만 헤세다. 이로써 범위가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막막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헤세의 책을 모두 읽어보자. 우리말로 번역된 헤세의 작품은 열 권이 조금 넘으니까 불가능한 방법이 아니다.

하나 그 작전은 실패했다. 시중에 있는 책을 다 살펴봤지만 그런 문장은 발견하지 못했다. 곰곰이 머리를 굴려봤다. 혹시 B씨가 작가 이름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생각해볼 것은 하나다. B씨가 그 책을 선물받아 읽은 게 1986년이기 때문에 그즈음 출판된 헤세의 책을 조사하면 된다.

조사하느라 몇 개월이 걸렸고 결국 찾아낸 책은 소설이 아닌 산문집 〈방랑〉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에 헤세의 작품 전체를 조사할 때 당연히 읽었다. 왜 그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B씨가 기억하는 문장이 있는 ‘농부의 집’이라는 글이 지금 판매되는 책에는 빠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판본에만 그 글이 실려 있다.

다시 책방을 찾은 B씨에게 나는 그 문장을 천천히 읽어드렸다. “네가 좋아하는 곳이라면 비록 그곳이 돌담 위에든, 바위에든, 나무 그루터기든, 풀밭이든, 흙 위에든 앉아보아라. 어디에서든 영상과 시가 너를 에워쌀 것이며 너를 둘러싼 세계는 아름답고 행복스러운 음조를 울리리라.”

B씨는 잠시 아무 말 없더니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창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 “요즘에도 어릴 때처럼 이곳저곳 자주 돌아다니세요?”라고 물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제 버릇 남 주나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이어 “세상을 돌아다녀보니 정말 아름다운 것은 단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겠더라고요. 여기에 담아야지요” 하면서 한 손으로 자기 가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