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그분이 산재 상담을 예약했다고 들었을 때 긴장을 좀 했다. 선천기형 출생이 직업과 관련 있는지 상담을 하러 온다고 했다. 아이랑 함께 온다고 하는 것은 직업병 의사로서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그때 엄마는 반도체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그 시절 그 공정에서 일했던 사람은 벤젠을 포함한 23종의 유해물질에 노출될 수 있다.

면담 도중 아이를 데려온 이유를 들었다. “이렇게 성장한 게 너무 자랑스럽고 보여주고 싶었다.” 여러 차례 큰 수술을 받는 고통을 이겨내고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아이는 옆에서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지나왔을 세월을 짐작해본다. 나는 피해자가 비난받을 가능성을 염려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워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신장 기능은 현재 정상이 아니다. 아이의 건강이 앞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산재 인정 여부는 이 아이의 미래에 미칠 영향이 클 것이다. 보통 산재 상담을 하기 전에는 심호흡을 한다. 타인의 아픔을 마주하는 일이 직업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엄마의 용기가 나에게도 힘을 주었다. 2세 질환이 업무와 연관되어 발생했는지를 검토하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귀 기울여 들어주어서 고맙다”

동료 노동자들의 건강상태에 대해 물었다. 같은 업무를 했던 동료들은 본인 포함 다섯 명인데 신장질환, 유방의 다수 양성종양, 갑상샘암, 혈액암을 각각 진단받았다고 한다. 본인도 산재 신청을 했는데 불승인되었다. 그래도 혈액암에 걸린 친구는 산재 승인을 받았는데, 본인의 이야기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라며 또 웃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지 물었을 때, “귀 기울여 들어주어서 고맙다”라고 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픈 노동자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태아 산재의 경우는 제도개선도 안 되고 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태아 산재 인정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10년 만에 나왔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산재보상보험법 개정은 발의만 되어 있을 뿐이다.

한 달 뒤 이번에는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선천기형 문제로 상담을 받으러 왔다. 아기가 콩팥이 하나만 있는 상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임신 초기 태내 발달단계의 중단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역시 2000년대 중반 임신 중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다. 한 명은 아이가 둘인데, 몇 년 뒤 사무직으로 부서를 변경한 뒤 낳은 둘째는 이상이 없었다. 반도체 공장에서 생식독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1990년대 중반 미국 반도체산업협회에서 생식독성에 관한 연구를 발주했는데, 반도체 산업의 특정 공정에서 자연유산이나 불임 등이 증가할 위험이 있다는 논문이 학술지에 다수 게재되었다. 하지만 2세 질환, 즉 선천기형이나 소아암의 문제는 연구에 포함되지 못했다. 타이완에서는 전자산업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2세에서 암 발생 위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 있다.

선천기형 같은 2세의 직업병에 대한 연구도 드물다. 한국처럼 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가 있는 나라에서는 연구를 위한 물적 토대는 갖추어져 있어도, 개별 연구자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공공 연구기관에서 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그런 연구를 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태아의 발달단계에 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질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연구가 필요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선천기형뿐 아니라 소아암, 그 밖의 다른 2세 직업병이 발생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이를 예방할 수 있는지! 현행 산재보상보험법은 태아를 산재보상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산재보상보험법 개정, 미루지 말고 해야 한다. 5월 임시국회에서 법 개정 소식이 들리기를 기대해본다.

기자명 김현주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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