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제공〈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박완서, 한길사, 1978년 초판

‘삶은 여행과 같다’는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누구일까? 찾아보면 세상에는 좋은 말이 많지만, 나도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이 말이 특히 마음에 와닿는다. 나보다 적어도 열 살 정도 위로 보이는 한 여성분이 절판된 책을 찾아달라며 왔을 때 처음 한 말도 바로 이것이었다.

“저는 사는 동안 실제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던 적은 많지 않았어요. 여행이라면 책 여행이 전부죠. 어릴 때부터 조용한 성격이라 책을 좋아했고 몸을 움직이는 건 싫어했어요. 그런 제가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떠나도록 만들어준 책이 바로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이랍니다.”

C 씨는 마치 소설처럼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여고를 졸업하고 어떤 회사 경리부에 취직하기까지는 삶에 특별한 사건이라곤 전혀 없었다. 불편 없이 살 만한 가정 살림에 학교 성적은 줄곧 중상위권을 유지했고, 친구들도 비슷한 성격이라 주말이면 시내 서점이나 제과점을 나들이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회사는 학교와 너무도 달랐다. C 씨는 처음으로 또래가 아닌 사람들 틈에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자신이 낯선 사람과 사귀는 일에 도무지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이 들어찬 사무실 풍경 자체가 감옥처럼 여겨졌다.

“한번은 회사에서 무슨 이벤트를 하느라 여의도에서 열리는 큰 축제에 가게 됐어요. 그해가 1981년이었어요. 축제 이름이 ‘국풍(國風) 81’이라서 연도를 기억하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많은 인파를 생전 처음 봤어요. 차에서 내려 물건을 들고 이벤트 장소를 향해 걷고 있는데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모를 만큼 사방이 복잡했어요. 한순간 머리가 어지럽고 하늘이 빙글거리는 기분을 느꼈어요.”

그러곤 기억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고 스트레스성 불안장애라는 소견을 받았다. 평소 불안을 느끼는 성격이 아니라 그런 사건을 겪고 보니 불치병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얼마간 치료를 받고 회사에 복귀했지만, 그 뒤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결국 퇴사했다. 한동안은 밖에 나가는 것도 두려워 히키코모리처럼 방에서만 지냈다. 일생을 통해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여러 책 중에서도 박완서 작가의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내용이 워낙 재미있어서 여러 번 봤다고 한다. 그런 책을 읽으면 다시 사람들과 섞이는 풍경에도 어려워하지 않는 자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자연으로 혼자 떠나라’는 제목의 글을 보고 놀랐어요. 저는 어떻게 하면 다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중인데, 작가님은 홀로 여행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땅끝마을로 혼자 떠난 여행

C 씨는 ‘자연은 홀로 있는 사람에게만 그의 내밀한 속삭임을 들려준다’는 구절에 밑줄을 긋고 문득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광주를 거쳐 완도까지 갔다가 거기서 또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해남에 갔다. 땅끝마을을 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회복하고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자연이 들려주는 내밀한 속삭임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때 어떤 속삭임을 들으셨나요?”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C 씨를 향해 몸을 앞으로 바짝 기울이면서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C 씨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가벼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길은 여기서 끝나지만 네 삶의 여행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그러더군요.”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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