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이상했다. 다른 집 ‘그랜마(grandma)’는 낮에 쿠키도 구워주고 밤에 옛날 이야기도 해준다는데 우리 집 그랜마는 낮에 심부름만 시키더니 밤새 코를 곤다. 집안일엔 손도 안 대면서 하루 종일 프로레슬링 경기를 본다. 왜 다른 집 그랜마처럼 드라마를 보지 않는 거지?

할머니는 밖에서도 이상했다. 다른 집 그랜마는 혹여 손주가 다칠까 노심초사 한다는데 우리 집 그랜마는 애를 자꾸 숲속으로 끌고 간다. 뱀 나온다며 아빠가 가지 말라고 한 개울가에 손주를 세워두고 이상한 풀을 만지작거린다. 할머니가 직접 뿌린 씨앗에서 나온 풀이다. 이름이 ’미나뤼’라고 했다. 왜 다른 집 그랜마처럼 꽃을 심지 않는 거지?

아니나 다를까 결국 뱀이 나왔을 때, 할머니는 또 이상했다. 뱀을 쫓으려고 돌멩이를 집어 든 애한테 말씀하셨다. “놔둬.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나은 거야. 숨어 있는 게 더 위험한 거야.” 다행히 뱀에 물리진 않았지만 그때 하신 말씀은 솔직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왜 다른 집 그랜마처럼 영어로 말해주지 않는 거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모든 게 이상했던 할머니 덕분에 다행히 이상한 어른으로 크지 않았다는 걸.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이 어린 마음 위로 씨앗처럼 내려앉았다는 걸. 그 씨앗이 싹을 틔워서, 숨지 않고 마주하는 용기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자랐다는 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미나리는 잡초처럼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뽑아 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미나리를 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할머니의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아서 ‘Minari’를 시나리오 맨 첫 장에 써 넣었다. 리 아이작 정, 한국 이름 정이삭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미나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민 가정의 기억, 보편적 이야기로

미국에 이민 와 어렵게 자리 잡은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기억의 조각을 모았다. 처음엔 너무 이상해 보였지만 갈수록 더 그리워지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영화를 지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름답고 보편적인 영화”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척박한 땅을 비옥한 농장으로 바꿔가는 영화 속 가족처럼, 메마른 시대를 사는 관객들 마음에 씨를 뿌리고 비를 내리고 해를 비추는 성장담으로 남았다.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시작으로 최근엔 제78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까지. 〈미나리〉가 각종 시상식에서 일으킨 건 ‘열풍’이지만 관객 가슴속으로 불어오는 건 ‘미풍’이다. 살랑살랑 살갗을 간질이는 이야기의 아름다운 여운이 ‘미풍(微風)’이면서 ‘美風’으로, 오래도록 마음을 어루만진다. 영화 〈미나리〉를 보아서 긴 겨울이 끝났다. 여느 해 봄은 개나리와 함께 왔지만 올봄은 미나리가 데려왔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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