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3월1일 홍콩 시위대가 국가 전복 혐의로 기소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1950년 7월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를 해방시킨다며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격을 명령했다. 독립국을 자처하던 티베트는 오랜 전투 경험이 있는 중국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티베트는 유엔에 기댔다. 하지만 유엔은 중국과 인도가 낀 이 거대한 분쟁지역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타이완섬으로 쫓겨난 신세였지만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이사국이었던 중화민국 정부도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진격을 굳이 막지 않았다. 결국 티베트도 ‘중화’의 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각자의 오판이 뒤섞인 채 이리저리 차이기만 하던 티베트는 중국과 ‘세븐틴 포인트 협정(17개조 협정)’을 맺고 중국의 일부가 된다. 세븐틴 포인트 협정은 한마디로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가 되는 대신 달라이 라마의 통치를 포함한 티베트의 모든 정치체제를 인정하며, 티베트의 모든 개혁도 티베트 자치정부의 재량에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티베트의 일국양제’는 그로부터 9년 뒤인 1959년 티베트 폭동(혹은 독립투쟁)으로 끝났다. 중국이 달라이 라마를 납치할 것이란 소문 속에 티베트인 30만명이 달라이 라마의 궁전인 포탈라궁을 에워싸며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탈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세븐틴 포인트 협정의 무효를 선언했다. 그렇게 중국의 티베트 직접 통치가 시작됐고, 첫 번째 일국양제는 계획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60년 뒤인 2019년 홍콩에서 사상 초유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중국 정부의 관점으로는 1959년 티베트 사태와 2019년 홍콩 시위가 똑같아 보일 것이다. 거꾸로 말해 티베트 민중이나 홍콩 민중의 관점에서도 중국 정부의 행태가 똑같아 보인다는 말이다.

60년 전 달라이 라마가 납치될 거라는 티베트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중국은 티베트 변경에서 무장 저항이 시작된 가운데 달라이 라마에게 인민해방군 사령부에서 연극을 함께 관람하자고 권했다. 그러면서 이날만은 무장경비대를 동행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어쩌면 1959년 티베트 사태가 중국에 의해 유도됐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지금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는 이유다.

1959년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했다. 달라이 라마를 따라간 티베트 난민 8만여 명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다. 지도자들이 사라진 자리는 중국인으로 재빠르게 채워졌다. 티베트 지도자들이 민중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중국 정부 측의 말도 일부 먹혔다.

10~20년 뒤 홍콩의 행정장관 직선제 허용할지도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자. 2019년 중국 정부가 무리하게 송환법 개정을 추진하고, 이듬해인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까지 밀어붙이자 영국은 BNO 여권(1997년 홍콩 반환 전까지 영국이 홍콩에 발급한 특수 여권)의 권리를 대폭 확대해 최대 150만명까지 홍콩인 이민을 받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사실 중국 처지에서 나쁠 게 없는 일이다. 오히려 중국의 골칫덩어리들이 알아서 나라 밖으로 나간다는 희소식이다. 14억 인구 중국이 그깟 150만명 빈자리를 메우는 건 일도 아니다.

바꿔 말하면 앞으로 있을 홍콩 선거에서 중국 정부에 우호적인 유권자가 저절로 굴러들어 온다는 뜻이다. 어쩌면 중국은 10~20년 후쯤 홍콩의 행정장관 직선제를 허용할지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중국에 반대하는 세력이 입법회 의원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질 것이다.

홍콩의 정치개혁과 제도적 민주주의는 그때서야 완성될지도 모른다. 현재의 티베트처럼 말이다. 적어도 중국 정부가 바라보기에 홍콩은 아주 평화로울 것이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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