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친할머니는 고양이를 키웠다. 할머니에게 고양이는 쥐잡기용 ‘가축’일 뿐이어서 고양이가 낳은 새끼는 종종 땅에 산 채로 묻혔다고, 시집살이가 고됐던 엄마는 몸서리치며 얘기했다. 그런가 하면 부모님 집에는 오래 함께 산 개가 있다. 사랑과 책임으로 돌보지만 부모님에게 개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필요에 의해 선택된 ‘애완’의 존재일 뿐, 내가 내 고양이를 대하는 마음과는 분명 다르다. 나에게 고양이는 ‘반려’에 가깝다. 그래서 선택의 우선순위에 종종 고양이를 둔다. 여행을 포기하거나 내 의자 대신 고양이 가구를 사는 방식으로.

함께 사는 동물을 대하는 삼대의 마음이 이토록 다른 것은 인격이나 성격의 문제라기보다 시대적 흐름에 따른 인식의 변화 탓이 클 테다. 부부로 국한되었던 ‘반려’의 범주가 다양한 형태의 가족관계로 확장되고, 이제는 인간 종을 넘어섰다는 이유도 있다. 식물도 어엿한 반려가 될 수 있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도나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은 의미심장하다. 인간과 상호구성적 관계를 맺어온 지구상의 모든 종이 가족을 대체할 새로운 ‘친족’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반려종’ 개념 속에 기계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데, 이런 반려 개념의 확장이 탈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의 확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무척 반갑다.

그러나 동족이든 친족이든 문제는 가족이 되는 일에 고충이 따른다는 점이다.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롭다고 했던가. 사랑하지만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다. 확신에 차 선택했어도 포기하고 싶은 때가 온다. 다만 인간끼리의 우여곡절은 어떻게든 책임지고 수습한다지만, 동물에게 인간의 변심은 치명적이다. 고양이 입양 시 파양 가능성을 단단히 대비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오만한 선의나 무지한 호기심에 데려갔던 고양이가 길에 버려져 죽는 경우가 잦다. 그러니 애타게 묘연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생선을 구울 때 부엌 창문은 꼭 닫도록 하자. 안 그랬다간 자칫 용감한 길고양이를 반려로 맞는 수가 있다.

서로가 견딜 만한 적당한 거리

고등어 한 마리 굽느라 창문을 열어두었을 뿐인데 난데없이 고양이가 생긴 여자가 있다. 생경한 기쁨은 잠시일 뿐, 이내 고양이 때문에 일상이 무너지고 수습하려는 여자의 노력은 처절하다. 괴로움의 크기에 비례해 고양이의 몸집도 커진다. 결국 여자는 명절을 핑계 삼아 도망쳐버리고 혼자 남은 고양이는 작아지기 시작한다. 싱크대 밑에 숨어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손바닥만 한 고양이가 돌아온 여자의 품에서 비로소 제 모습만큼 커졌을 때 울컥하는 이유는 이 일련의 감정들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상대는 시시때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가 또 돌아서면 애틋할 만큼 작아진다. 그러니 함께 사는 일에는 요령이 필요하다. 서로가 견딜 만한 적당한 거리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여자는 다행히 방법을 찾은 듯하다. 얼마쯤 사이를 두고 소파에 나란히 앉은 여자와 고양이는 꽤 다정해 보인다. 집 안도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거실 한쪽에 잔뜩 보풀이 난 캣타워의 공이 클 것이다. 무엇보다 고양이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다. 물론 둘이 처음 만났던 날보다는 크다. 얼마나 크냐면 내 고양이가 딱 저만했으면 하고 바라는 만큼 크다.

기자명 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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