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쌀 재난 국가〉 작가인 이철승 교수가 〈시사IN〉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철승은 논쟁적 지식인이다. 이른바 ‘386 세대’가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으며, 그 희생자는 청년 세대라고 비판한 논문 〈세대, 계급, 위계:386 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를 2019년 2월 발표해 주목받았다. 이 논문을 확장해 같은 해에 펴낸 〈불평등의 세대〉는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 그의 대표작은 따로 있다. 미국 시카고 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2016년 영어로 쓴 〈노동-시민 연대는 언제 작동하는가(When Solidarity Works)〉가 그것이다. 책은 브라질·타이완·아르헨티나·한국에서 복지국가가 어떻게 발전하고 후퇴하는지 분석하는데, 그중에서도 한국의 건강보험 통합에 주목한다. 지역별·직장별로 쪼개져 있던 의료보험을 하나로 통합해 지금의 건강보험을 만든 것은 김대중 정부 때였고, 그 변화를 이끈 주체는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였다. 그는 이런 연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추적하기 위해 한국을 오가며 한국 노동운동가와 시민운동가 56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2013년 시카고 대학 종신교수로 임명됐지만, 이 연구를 계기로 18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201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71년생으로 올해 나이 50인 정규직 남자 교수다. 그런 그가 현 체제의 희생자로 청년, 여성, 비정규직을 호명하며 한국 사회의 불평등 논쟁에 불을 붙인다. 무기는 데이터다. 이철승의 책에는 ‘100대 기업 세대별 이사진 비율과 자본수익률’ ‘대기업·정규직·유노조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월평균 실질임금 추이’ 같은 그래프가 빼곡하다. 세대론에는 으레 그렇듯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다니지만, 그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철승은 적어도 반증 가능한 방법으로 불평등이라는 이슈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드문 학자다. 2021년 1월, 이번에는 벼농사에 천착한 새 책 〈쌀 재난 국가〉를 들고 돌아온 이철승 교수를 만났다.

한국 사회 불평등의 기원을 ‘벼농사 체제’에서 찾았다. 동시대 한국인으로서 벼농사와 지금의 우리는 단절되어 있다고 느낀다.

좀 무리하긴 했다(웃음). 그러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라고 본다. 한국전쟁 때까지 한국인 대부분은 농촌에서 살았다. 1930~1940년대에 태어나, 1950~1960년대까지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다가, 1960~1970년대에 도시에 올라온 ‘농민공(농민 출신 도시노동자)’들이 각각 다른 주체가 아니다. 우리의 부모나 조부모, 곧 ‘산업화 세대’다. 이들이 공장과 사무실에 취직해 일이 돌아가게 만들고 사람을 훈련시켰다. 이 과정에서 농촌 마을공동체의 경험을 이전시켰다.

ⓒ연합뉴스이철승 교수는 벼농사 체제가 남긴 연공제가 한국 사회 불평등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벼농사에 주목한 계기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고 싶었다. 사실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이라는 게 전부 서구의 학문이다. 서구인이 자신이나 남을 분석하려고 만든 틀이다. 이걸로 한국 사회를 열심히 분석하면 어느 정도는 된다. 10년, 20년 하다 보면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계속 보인다. 서구의 시각에서, 한국은 서구처럼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과학에 기초한 합리적 경험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한 뒤떨어진 존재가 된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이 50대 중반쯤 되면 외국 서적을 다 치워버리고 공자와 맹자를 공부한다.

나는 인생 절반 가까이를 미국에서 살았다. 그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이론을 만드는지 가까이서 봤다. 그 사회에 깊숙이 들어가 살면서 동료들과 밥도 같이 먹고 아이도 키워보니 점점 우리와 다른 게 보였다. 예컨대 미국에 온 한국 유학생끼리는 이사철에 서로 도와주는 ‘품앗이’가 당연하다. 그런데 가만히 봤더니 동아시아만 그러고 있더라. 중국인들도 그걸 하거든. 우리 동아시아인에게는 협업의 정체성이 있고, 이건 벼농사에서 왔다는 게 내 주장이다.

협력은 인간의 본성 아닌가?

그렇다. 인간은 어디에서나 협력을 하는데, 그 정도를 어디까지 밀고 가느냐의 문제다. 벼농사는 협력 수준을 극단까지 밀어올린다. 왜? (재배 과정에서 물이 별로 필요하지 않고, 각 가구가 뿌린 대로 거두면 되는 밀농사와 달리) 공동노동을 해야 하니까. 김매기나 모내기를 하려면 대규모 노동을 한꺼번에 투입해야 한다. 이때 서로의 기술을 표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를 심거나 잡초를 뽑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하면 공동노동이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뤄지겠나. 이 과정에서 숙련을 전수해주는 존재가 농사를 많이 지어본 윗사람이다. 여기서 나이에 따른 위계가 생긴다. 오늘날 공동노동을 가장 잘하는 게 한·중·일, 타이완, 베트남 등 모두 동아시아 국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벼농사와 밀농사를 비교하면 사람들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왜곡된 편견을 의미하는)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린다. 브로델이란 학자는 ‘쌀은 완전체이고 밀은 불완전체여서 밀 문화권인 서양에서 교역이 발달한 반면 쌀 문화권인 동양에선 그러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브로델의 틀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극복하려는 것이다. 벼농사 체제에서 강력한 마을 단위 협업 시스템이 출현했고, 이러한 공동노동이 서구와는 다른 동아시아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바탕이 되었다.

벼농사 체제로 지금의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게 왜 중요한가?

우리는 어떤 협업을 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민족주의도, 식민지근대화론이나 발전국가론도 아닌) ‘제3의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박정희로부터 산업화 세대를 구하고 싶었다. 박정희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됐어도 똑같이 여기까지 왔을 거다. 물론 공장을 세우고 사람을 데려다놓은 이들이 박정희나 정주영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거기서 노동을 한 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이다. 본인들이 해놓고 모른다. 그들이 내 책을 읽으면 운다. 자기 이야기니까. 80대인 아버지가 책을 읽고 우셨다고, 고맙다고 전화 왔다.

책은 벼농사 체제의 긍·부정적 유산을 여럿 지목한다. 이를테면 태풍과 장마, 가뭄에 취약한 벼농사 문화권에서 ‘재난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국가체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쌀 생산량이 많은 국가일수록 코로나19 확진자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적다는 놀라운 그래프가 등장한다. 서로의 논에 손발을 담그며 ‘공동생산’을 하면서도 수확물은 개인이나 가구가 ‘개별소유’한 결과, 긴밀히 협력하면서도 극도로 경쟁적인 사회 특성이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그러나 이철승 교수가 벼농사 체제의 핵심적 유산으로 꼽는 것은 호봉제로 대표되는 연공제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에게 벼농사 체제가 남긴, 우리 삶의 패턴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원리와 구조를 이야기하라면 그것은 나이에 따라, 연차에 따라 일에 대한 보상-임금구조-을 결정짓는 연공 시스템이다.”

ⓒ연합뉴스2018년 4월15일 서울 단대부고에서 열린 ‘삼성 대졸 신입사원 공채를 위한 직무적성검사’를 마친 응시생들이 고사장 밖으로 나오고 있다.

연공제는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유산인가?

발전국가 시기엔 잘 맞았다. 지금은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연공제가 뭔가. 벼농사 체제에서 ‘나이가 많으면 숙련이 쌓이더라’는 경험칙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같은 연차면 같은 임금을 주는 시스템이다. 나이 50이면 숙련이 비슷하다는 가정인데, 뭐가 비슷한가? 20년 동안 개발자로 일해도 기초 코딩밖에 못하는 프로그래머와 인공지능을 만드는 프로그래머는 전혀 다르다. 각 직무에 필요한 숙련을 평가하지 않고 나이로 ‘퉁치는’ 연공제로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 기적에 가깝다. 앞으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거다. 이미 삼성, SK 등 한국의 글로벌 대기업에서 연공제는 약화되어 있다.

한국에서 숙련 측정을 대신하는 게 하나는 나이고 다른 하나는 시험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공정하다는 착각〉)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라는 건 좀 코미디다. 샌델이 비판하는 미국식 능력주의와 한국의 능력주의는 다르다. 미국에선 사람을 시험으로 뽑지 않는다. 노동시장의 높은 이동성을 바탕으로, 거미줄처럼 발달한 평판 조회 시스템으로 사람을 채용하며 보상의 격차도 엄청나게 벌린다. 한 대학에서 10만 달러를 받는 교수와 100만 달러를 받는 교수가 같이 학생을 가르치는 식이다. 반면 한국은 시험 한 번으로 인생 나머지 노동의 가치를 평가한다. 이 거대한 도박판에서 이긴 자들이 사회의 상층을 장악하며 평생 연공급을 누린다. 공공부문 정규직화에서 ‘공정’ 논란이 벌어졌다. 이 도박판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자와, 여기에 끼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런데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 곧 능력 있는 사람은 아니다. 시험 보는 기술은 암기력으로 남이 만든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일 뿐, 노동 현장에서 발휘해야 하는 수많은 능력 중 극히 일부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험을 잘 본다는 한 차원의 능력이 대인관계, 리더십까지 다 결정한다고 가정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 불평등의 핵심에 연공제가 있다고 썼다.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못한 심각한 불평등의 원인이다. 나는 ‘착종’이라고 표현하는데, 연공제라는 제도, 세대, 인구구조라는 세 요인이 뒤섞여 엉클어진(착종된) 결과 청년실업이 심각해지고 비정규직이 늘어난다. KBS가 가장 상징적인 사례다. 최근 KBS가 자사 직원 중 46.4%가 연봉 1억원 이상을 받고 있고 (국장, 부장 등 직책이 없는) 무보직자가 1500여 명이라고 공개했다(KBS 직원 수는 약 4800명이다). 한국은 2차 오일쇼크가 풀린 1981년부터 1997년 말 외환위기까지 17년간 장기 호황이었다. 이때 (인구가 많은) 나나 내 윗세대가 우르르 입사했다. 학점이 4점 만점에 2점이어도 기업들이 와달라고 대학에 진을 치고 원서를 들이밀던 시기다. 얼마나 많이 들어왔겠나. 이 사람들이 다 고연차로 올라왔는데 어떻게 보직을 다 주나.

물론 보직이 없다고 일을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고연봉 직원이 많아지면 결과적으로) 신입을 못 뽑는다. KBS라는 조직이 살 길은 뭔가? 빨리 젊은 사람을 뽑아서 유튜브 시대에 대응해야 한다.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로 새 트렌드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젊은 층의 관심을 끌어야 사람들이 KBS를 보고, 광고가 들어온다. 그런데도 신입을 못 뽑고, 필요한 인력은 아웃소싱으로 돌리면서 수신료를 올린다. KBS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기업이 정말 많다.

노동조합들은 연공제가 불평등의 ‘원인’이라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윗세대 진보는 모든 것을 자본과 노동, 재벌 대 나머지의 대결로 해석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특히 공기업이나 대학처럼 ‘주인 없는 조직’에서 50대 후반 상층 정규직은, 심하게 표현하면 ‘한시적 자본가’라 불러도 된다. 자본가가 뭔가? 그 조직의 지분을 많이 보유함으로써 노동을 통제하는 존재다. 공기업 노조나 대학교수를 보라. 50대부터 약 10년 동안 집단으로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자신들에게 모든 자원과 유리한 특권을 몰아주고 은퇴한다. 똑같은 권한을 다음 세대가 물려받는다. 여기서 주인은 누구인가? 연공서열의 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다.

냉정하게 볼 때 한국의 노조는 임금인상 투쟁 기구라고 봐야 한다. 외국에서 노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격차 축소다. 예컨대 독일 금속노조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맨 위와 맨 아래의 임금이 너무 차이 나지 않도록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한다. 한국은 맨 위가 받는 임금을 끝없이 밀어 올리는 역할을 노조가 했다. 그걸 제일 잘하는 게 완성차 노조다. 완성차 노조가 임금인상을 요구해 관철하면 다른 노조들도 쳐다보고 있다가 다 같이 임금을 올린다. (노조 간부들이) 동문 네트워크로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50대 이상 상층 정규직 연봉은 대략 8000만원에서 1억2000만원으로 통일되어 있다. 자신들의 연공과 연봉을 올리면서 밑으로는 비정규직에게 비용을 떠넘긴다. 나아가 청년 고용을 축소시킨다. 나는 이걸 데이터로 보여줬다.

이철승 교수가 2015년 한국노동연구원 사업체 패널 자료를 분석한 결과, 55세 이상 노동자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높은 연공급 테이블의 기울기가 35세 이하 청년 고용 비율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여성은 승진에서 밀려나거나 근속연수가 짧은 등의 이유로 연공제의 혜택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서울 아파트값 폭등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배후에는 상층 정규직 부모가 있다. 연공제가 여러 측면에서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노조가 인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압력을 통해서”라고 말했다.

연공제의 대안은?

한국의 정서상 연공급 요소를 아예 없애긴 힘들다. 연공급 기울기를 낮추는 건 가능하다. 여기에 직무급 요소를 섞어서 차차 대체해나가야 한다. 처음엔 이게 연공급인지 직무급인지 알 수도 없게. 예를 들면 직무 등급을 1~15등급까지 만들어놓고 3~4년마다 직무를 평가해서 큰 문제가 없으면 올려주는 식이다. 정말 문제 있는 10명 중 한 명 정도만 낮은 등급에 머물게. 이런 얘기를 하면 노조에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분할통치라고 비판한다. ‘그 한 명이 우리가 될 수도 있다’ 이러면서. 평가받는 게 싫은 거다. 근데 우리, 평가받아야 하지 않나?

최소한의 평가를 받지 않으면 인간은 무임승차하게 되어 있다. 내가 있는 교수 사회를 보자. 정규직 교수는 연공급을 받는다. ‘시간강사’라 불리는 비정규직 교수는 시간당 5만~10만원의 임금을 받는다. 똑같이 한 학기에 두 과목을 가르친다고 할 때, 비정규직 교수가 1년에 약 1000만원을 받는 동안 50대에 진입한 정교수는 1억원을 받는다. 이 10배나 되는 봉급 차이를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강의평가 때문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강의평가가 좋지 않은 시간강사는 자르는 반면 정교수는 그럴 수 없으니까. 누군가는 정교수들이 학교 행정 일을 하고 논문을 많이 쓴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안 해도 정교수이면 기본급으로 1억원이 나오는 구조다. 사실은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이나 동일한 강의에 대해선 동일한 임금을 받고, 정규직 교수가 학교 행정이나 논문 등 따로 더 일한 부분은 해당 직무의 숙련도를 평가받아 추가로 임금을 받으면 된다. 그게 직무급이다. 지금은 아무런 근거 없이 (정교수라는 이유로) 10배를 받는다. 학자가 학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이다. 사실상 신분제다.

한국에는 직무의 성격이나 난이도를 평가할 도구가 없는데?

한국형 숙련평가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을 지금부터 해야 한다. 한국의 근속연수가 외국에 비해 극도로 짧은 이유 중 하나는 숙련도가 낮기 때문이다. 숙련공이 없어도 되니 더 젊은 저임금 인력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현대차가 이런 시스템이다. 단기간만 교육시켜도 일할 수 있게 만들어놓으니 숙련이 쌓이지 않는다(물론 이렇게 해도 정규직은 정년을 보장받는다. 대신 사내하청 노동자가 정규직과 사실상 같은 업무를 하며 더 낮은 임금을 받는다). 숙련을 깊이 축적했을 때 뭐가 좋으냐면, 그 사람이 없으면 조직이 안 돌아간다. 이러면 조직이 사람을 자를 수가 없다. 고용 보장을 외칠 필요가 없어진다.

나는 숙련에 베팅하자고 제안한다. 이제는 보직의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 보직이 정말 힘든 일을 하는 직책일까? 많은 경우 아니라고 본다. 더 무거운 걸 나르는 사람, 더 힘든 일을 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임금을 줘야 한다. 숙련 측정 도구를 가져올 곳은 많다. 국내 다국적 기업이나 경쟁국 기업의 직무급 운영 자료를 모아서 산업·직군·직무별로 임금의 평균과 분산 표를 만들어야 한다. 국가와 노조가 할 일이 이런 거다.

현재로선 노조가 나설 유인이 없어 보인다.

연공제는 조직 내부를 단합시키기에 가장 좋은 기제이고, 한국 모든 조직의 의사결정권자는 나이 먹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 룰을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조건 호봉제를 방어하는 전략 외엔 없다. 이대로 가면 한국의 노조는 386 세대가 은퇴하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기업도 안다. 이들이 너무 잘 싸우고 잘 조직화되어 있어서 건드릴 수 없다는 걸. 현대차 경영진의 전략은 이렇다. ‘은퇴할 때까지 기다리자. 그리고 한국에 현대차 이름으로 더 이상 공장을 세우지 않는다.’ 현대차 정규직은 지금의 노동조건과 힘을 가진 채로 우르르 은퇴하고 공장은 문을 닫는 길로 가고 있다. 이게 전체 산업을 볼 때 바람직한 방향인가? 노조의 마지막 목표가 정년 연장이다. 연공급을 그대로 둔 채로 65세, 70세까지 최대한 오래 일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조건부로는 가능하다. ‘정년 연장해줄게, 대신 직무급이랑 바터(교환)하자’고 하면 된다. 직무급으로 연봉이 좀 낮아지더라도 고용은 더 오래 보장받을 수 있다. ‘많이 받고 조금 다닐래, 조금 받고 오래 다닐래?’ 선택하게 하는 거다. 다 같이 조금 덜 받고 더 오래 다니는 걸 노조가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안 하면, 386 세대가 다 은퇴한 다음에는 자본과 국가의 목소리가 반영된 임금체계가 쫙 깔릴 거다. 그러기 전에, 노동이 여기에 어떻게 자기 목소리를 반영시킬 수 있을지 치열하게 논의하고 공부해야 한다.

노동이 기업, 국가와 협상을 벌여 자신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는 절차가 ‘사회적 대화’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한국에서도 노사정위원회 합의가 이뤄졌다. 노동조합은 전교조 합법화와 건강보험 통합을 얻는 대신 정리해고제와 파견법을 내주었다. 그 이후로 유의미한 사회적 대화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1998년 9월30일 서울 마포에서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 현판식이 열리고 있다.

한국 노동조합도 건강보험 통합이라는 연대의 경험이 있다. 그런 불씨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건강보험 통합은 노조의 희생이었다(이미 양질의 직장의료보험을 누리고 있던 민주노총 산하 대기업 노조들은 건강보험 통합에 큰 이해관계가 없었는데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냈다). 그 ‘거대한 딜’이 노동을 영원히 공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1998년에 머물러 있다. 당시 ‘어떻게 중앙 노조가 정리해고제를 타협해줄 수 있느냐’며 지방에서 활동가들이 쇠파이프 들고 서울에 올라와서 (노사정 합의를) 뒤엎어버렸다. 김대중 정부는 노조가 이미 사인한 걸 가지고 밀어붙였다. 노동운동에서 ‘중앙’의 의미는 그때 이후로 회복이 안 된다. 그 이후로 대공장 노조들이 사회개혁 노선에 다시 협조를 안 한다.

국가와 자본에게 뭔가를 받으려면 노동도 뭔가를 내주어야 한다. 두 가지밖에 없다. 고용 아니면 임금이다. 한국의 현실에서 고용을 내줄 수는 없다. 그러면 임금인데, 임금을 내준다는 건 연공제의 고임금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노조 지도자들은 그 얘길 입 밖으로 못 꺼낸다. 도장을 찍는 순간에 선거에서 위원장을 바꿔버리거든. 연공제는 그만큼 현장에서 민감한 문제다. 50대들의 밥그릇, 기득권을 건드리니까. 그럼 누가 얘길 꺼내야 하나? 나 같은, 이런 얘길 해도 욕은 먹지만 목이 날아가지 않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 비정규직 운동의 마지막 요구가 연공제 도입이다. 나는 이걸 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다 같이 무기계약직으로 가자. 한국과 함께 연공제 나라로 꼽힌 일본도 직무급 요소를 상당 부분 도입했고, 중국과 타이완도 이미 직무급 성격이 강하다. 최초 입직 노동자의 30년 후 임금 배율이 서유럽 1.7배, 일본 2.5배인 반면 한국이 3.3배다(한국노동연구원, 2015년). 연공제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안 한다.

ⓒ현대자동차 제공2015년 5월 현대차 울산공장. 이철승 교수는 “현대차 정규직은 지금의 노동조건과 힘을 가진 채로 우르르 은퇴하고 공장은 문을 닫는 길로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거래의 무대는?

개별 기업 안에서 밀고 당기기를 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진보는 그동안 엉뚱한 데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다. 산업별 노조다. 내가 보기엔 절대로 불가능한 프로젝트다. 산별노조라는, 개별 기업을 넘어서는 초기업적인 연대체라는 이념이 벼농사 체제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현장은 전형적인 마을 기업, 소농 연합체에 가깝다. 다른 마을(기업) 사람들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간 임금 차이를 직무급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관이 아니라 현실이다.

‘동일사업장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도 해야 한다. 울타리 안과 밖의 경계가 확실한 동아시아에서는 이게 더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다. 적어도 같은 사업장 안에서 똑같이 바퀴를 끼우고 있다면 동일한 임금을 주자는 얘기다. 이건 법제화까지도 가능하다고 본다. 같은 사업장이 아닌 사외 하청업체와는 어떻게 격차를 축소할까? 이익공유제를 검토해볼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화투 칠 때 ‘개평(남이 가지게 된 몫에서 조금 얻어 가지는 공것)’을 주게 하려면 판이 벌어지기 전에 합의를 봐야 한다. 게임이 끝난 뒤에 ‘네가 많이 먹었으니 좀 내놓으라’고 하면, 다음 판이 안 선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야기되는 이익공유제가 정확히 이런 형태다. 그게 아니라 이익이 발생하기 ‘전에’ 그 일부를 사외 하청업체와 공유하기로 예컨대 삼성이 약속하면, 삼성의 법인세를 깎아주는 건 어떨까? 기업 입장에서 국가에 법인세를 내고 싶겠나, 내 하청업체에 더 주고 싶겠나? 기업이 이익을 하청업체와 공유하도록 유도하는 룰을 국가가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 스마트하게.

〈불평등의 세대〉 출간 뒤 논쟁이 거셌다. 논쟁을 만드는 지식인이란 인상이 있다.

특별히 의도하진 않았다. 나는 커리어를 미국에서 쌓았다. 거기선 당연한 일이다. 논문을 쓰든 뭘 하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논쟁을 만들 줄 알아야 연봉도 많이 주고 보직도 올려준다. 〈불평등의 세대〉가 공교롭게도 조국 교수가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날 나왔다. 386 세대의 정치권 과잉 점유를 다룬 장이 주목받으면서 한쪽에선 ‘조국 비판’에 이용되고, 다른 쪽에선 ‘기득권 세력의 세대 갈등 노림수’라고 읽혔다. 사실은 노동시장 비판이 주요 목적이었다. 50대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니 좀 나누자고 말하고 싶었다.

〈불평등의 세대〉를 내고 나선 진보 학계에서 잘 안 불러준다(웃음). 나는 (공론장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키우는 게 한국 사회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하는 건 일종의 자유주의 프로젝트다. 누구와도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주로 남들이 안 보는 데이터를 찾아서 돌리는 건, ‘구라’치면 안 된다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웃음). 양적 방법론을 쓰는 국내 학자 중에 일부가 데이터를 먼저 보고 질문을 만들더라. 거꾸로다. 질문이 먼저고, 그다음에 구할 수 있는 데이터를 뒤져서 분석해야 한다. 인터뷰는 책 내고 한 달 동안만 하고, 다시 책 쓰러 가야 한다. 도자기 굽는 게 내 일이니까.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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