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국민당 홈페이지
ⓒ녹색당 취리히지부 웹페이지하얀 양(스위스인)이 검은 양(이민자)을 영토 밖으로 차버리는 스위스국민당의 홍보물(맨 위). 외국인 범죄 용의자의 국적 공개가 인종주의라며 비판하는 녹색당의 홍보물(위).

지난해 12월에 있었던 일이다. 오랜만에 딸과 함께 시내로 장을 보러 나갔다. 트램(전차)에 앉아 있는데, 마스크를 쓴 검표원이 다가왔다. 스위스 등 유럽 국가에서는 승차할 때 표를 체크하지 않고 검표원이 무작위로 검사를 한다. 나는 딸의 주니어 카드(6세 이상 아동이 보호자를 동반하고 승차할 수 있는 연간 교통카드)와 내 연간 승차권을 무심히 내밀었다. 검표원이 주니어 카드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유효기간이 만료됐네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드 갱신 기간이 한 달이나 지나 있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딸은 지난 몇 달간 학교 외에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주니어 카드를 쓸 일이 없어서 갱신을 깜빡한 것이다. 검표원은 내 신분증을 요구하고는 태블릿을 꺼내 신상 정보를 입력했다. “벌금으로 10 스위스프랑(약 1만2000원)만 청구할게요. 실제 벌금은 훨씬 높은데, 실수한 것 같아서 봐주는 겁니다.” 운이 좋은 날인가, 나쁜 날인가. 갑자기 검표원이 예상 밖의 질문을 했다. “국적은 어디입니까?” 그는 한국이라는 나의 답을 입력하고 트램에서 내렸다. 기분이 꺼림칙했다. 국적은 왜 물었을까. 이민자 출신국에 따른 무임승차 통계라도 내려는 것인가. 나는 지금 딸의 교통카드 갱신 기간을 놓쳐서 BTS가 끌어올린 한국의 세계적 위상에 먹칠을 한 것인가.

내가 소심해진 배경이 있다. 이방인이 살기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스위스는 특히 외국인 이민자를 까다롭게 대하는 나라다. 내가 사는 칸톤(주) 취리히에서 곧 치러질 투표도 그걸 보여준다. 극우 정당인 스위스국민당(SVP, 이하 국민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 찬반 투표인데, 범죄 용의자의 출신지를 공개하라는 내용이다. 스위스 국민투표는 전국적으로도, 각 지방단위에서도 치러질 수 있다. 이 투표는 취리히 지방에서 치러지는데 민감한 내용이라 전국적 이슈가 되고 있다.

발단은 2017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취리히 지방정부가 깜짝 발표를 했다. “앞으로 경찰이 언론사에 보내는 보도자료에서 범죄 용의자와 피해자의 국적을 언급하지 않겠다.” 그때까지는 용의자와 피해자의 국적을 공개했다. 취리히 경찰은 “국적 정보가 외국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국적과 범죄율이 연관돼 있다는) 잘못된 인과관계를 퍼뜨리기 때문”에 방침을 바꾼다고 밝혔다. 이 결정 전에 경찰은 스위스 주요 언론사 6곳과 논의를 했다. 언론사들 입장은 3대 3으로 갈렸다. 경찰은 고심 끝에 보도자료에서는 국적을 비공개하되 언론사가 요청하면 따로 알려준다는 방침을 정했다.

ⓒEPA2014년 2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이민제한법 국민투표를 하기 위해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국적 얻었더라도 출신 국가 밝혀라”

그러자 국민당이 즉시 반발했다. 이 당은 이민자들에게 적대적이기로 유명하다. “국적 정보를 빼는 건 투명성 원칙에 어긋나며,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민자 범죄) 문제를 카펫 밑으로 쓸어 넣어 숨기는 데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국민당은 지지자들의 서명을 모아 새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범죄 용의자 및 피해자의 국적은 물론이고, 이민 배경까지 공개하라’는 게 법안 내용이다. 여기서 ‘이민 배경 공개’란, 용의자가 스위스 국적을 획득한 이민자인 경우 출신 국가를 밝히라는 뜻이다. “국적을 획득했더라도 원래 출신지의 문화와 관습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특정 문화권에는 스위스와 아주 다른 도덕적 관념이 존재한다”는 게 이민 배경까지 공개하라는 이유다.

취리히 정부는 당황했다. 외국인 혐오를 줄이려고 국적 비공개를 결정했는데, 극우 정당의 공격을 받아 오히려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다. 스위스 국민투표에 제안된 법안이 정부의 입장과 다를 경우, 정부가 반대 법안을 제시한 뒤 두 법안을 한 번에 투표에 부칠 수 있다. 취리히 정부는 ‘범죄 용의자의 국적은 공개하되 이민 배경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반대 법안을 내놓았다. 혹 떼는 건 포기하고 추가로 붙이는 혹만 막기로 한 거다. 주민들은 ‘국적 및 이민 배경 공개’와 ‘국적만 공개’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3월7일 투표를 한다. 물론 두 가지 선택지에 모두 반대하는 것도 가능하다.

범죄 용의자의 국적이나 이민 배경 공개라는 게 한국 사회에는 생경한 사안일 수 있다. 생경한 이유는 공개를 할지 말지 논의를 건너뛰었기 때문이지, 그런 사례가 없어서가 아니다. 중국 동포가 관련된 사건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기사 헤드라인에서 용의자의 출신지를 유독 강조하고, 출신지와 범죄율을 연결 지어 비난하는 댓글이 달린다. 용의자 출신지 공개는 언제나 필요한 것인가? 게다가 만약 그 용의자가 한국에 살면서 국적을 취득했다면, 그런데 언론사가 ‘한국 국적이지만 실은 중국 동포 출신’이라고 굳이 보도한다면?

이민자 비중이 큰 스위스에서 외국인 범죄는 늘 뜨거운 감자다. 스위스에는 특정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을 추방하는 법도 있다. 범죄 종류에 따라 5년에서 최대 15년까지 스위스 재입국이 금지된다. 추방 사유가 되는 범죄 목록에는 집단학살 같은 심각한 것부터 절도 등 비교적 가벼운 것도 포함된다. 경미한 범죄라도 10년 내에 두 차례 반복해 저지르면 추방된다. 이 법 역시 국민투표를 통과해 만들어진 것인데, 2010년에 처음 통과된 법안은 유죄판결 후 ‘자동 추방’이었다. 이것이 2016년 두 번째 국민투표를 통해 케이스별로 판사의 재량권을 인정하도록 바뀌었다. 예를 들어 스위스에서 추방된 외국인 범죄자가 고국의 독재정권에 처형당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라면 추방을 재고한다.

이 법에는 허점이 많다. 우선 ‘세콘도(secondo)’라 불리는 이민 2세대, 즉 스위스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시민권은 없는 사람들에 대한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다. 스위스는 속인주의(출생 시 부모의 국적에 따라 본인 국적이 정해지는 원칙)를 택하고 있고, 유럽에서 시민권을 따기가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다. 사실상 스위스가 고향인 사람들이, 아는 사람도 없고 언어도 모르는 부모 나라로 추방되는 사례가 계속 나온다.

2014년에는 이민 3세대인 이탈리아인이 추방 명령을 받아 논란이 일었다. 무단침입, 절도, 마약 등 20가지가 넘는 범죄를 저지른 33세 남성이었다. 그는 아내가 스위스인이고 이탈리아에 연고가 없다는 점을 들어 항의했지만 결국 추방됐다. 판사는 이 남성이 스위스 법체계를 따르려는 의지가 없다며 “몸이 건강하니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아내도 남편을 따라 이탈리아로 가면 된다”라고 했다. 베른 대학의 이민법 교수인 알베르토 아커만은 당시 이에 대해 “시민권이 없는 이민 3세대가 추방을 당하는 건 (3세대까지 내려오기 전에 대개 시민권을 얻게 되는)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범죄 용의자의 출신지 공개나 외국인 범죄자 추방 제도는 외국인을 ‘맑은 물 흐리는 오염원’으로 취급한다는 느낌을 준다. ‘순수 스위스인(정말로 그런 게 존재한다면)’들이 나 같은 이민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할 거라는 생각에 주눅이 들기도 한다. 실상은 어떨까. 일단 통계는 외국인 범죄율이 높은 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스위스 연방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유죄판결을 받은 성인 범죄자 9만6118명 중 스위스인은 4만562명, 외국인은 5만5556명이었다. 스위스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외국인이, 전체 범죄자의 약 58%를 차지한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유럽으로 발을 들이는 첫 관문이 되는 스페인에서는,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외국인이 전체 범죄의 23%를 저지른다(2017년 스페인 통계청 자료). 독일은 2015년 난민 위기 이후 150만명 이상의 외국인이 망명을 신청했는데, 2017년이 되자 인구의 2%에 불과한 난민 또는 불법 이민자가 전체 범죄 용의자 중 8.5%에 이르렀다. 스웨덴은 2017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33%인 이민자가 범죄 용의자의 58%를 차지한다. 살인·성범죄·마약 거래 등 특정 범죄만 따지면 그 비율은 더 높아진다. 이 같은 수치는 이민자에게 사회문제의 원인을 돌리는 극우 세력의 무기가 된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이민자를 쫓아내면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거라는 주장이다. 정말 외국인이 문제일까.

ⓒAP Photo2014년 2월 이민제한법이 통과되자 시민들이 ‘난민 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하고 있다.

‘가짜 투명성’에 기반한 범죄 통계

전문가들은 이것이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한다. 이런 통계가 ‘가짜 투명성(pseudo-transparency)’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2014년 기준 독일의 14~30세 남성은 전체 인구의 9%였다. 그런데 이들이 전국 폭력 범죄의 절반을 저질렀다. 통계적으로 범죄자 중에는 젊은 남성이 많다. 그리고 난민 신청을 하는 외국인이나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나라로 가는 외국인 중에도 젊은 남성이 더 많다. 실제로 2014년 독일에 망명을 신청한 사람의 27%가 16~30세 남성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민자 중에 범죄자가 많아 보이는 것이지, 실은 ‘젊은 남성’이 더 중요한 요인일 수 있다는 거다. ‘가짜 투명성’에 기댈 게 아니라, 정확하고 균질한 비교를 할 때 통계수치는 힘을 갖는다.

또 다른 문제는 사회적 환경이다. 난민 캠프처럼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숙소에서 직업 없이 정부 지원에 의지해 지내다 보면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도 커진다. 난민이 저지르는 폭력 범죄의 상당수는 같은 처지의 난민을 상대로 일어난다. 스페인 말라가 대학 형법 교수이자 범죄학자인 엘리사 가르시아에 따르면, “국적이 아니라 사회로부터의 소외가 문제다”. 스페인 카를로스3세 대학에서 이와 관련해 루마니아 출신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다. 처음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는 이들의 범죄율이 높았지만, 직업을 구하고 스페인 사회에 적응하면서 범죄율이 점차 낮아졌다. 완전히 사회에 적응한 루마니아 출신 이민자와 스페인인을 25~34세 그룹에서 비교했을 때는 루마니아 이민자의 범죄율이 오히려 낮았다.

성평등에 관한 사회적 통념이 전혀 다른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가 유럽에 와서 강간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실제로 종종 발생하고, 사람들이 이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뉴스 헤드라인에 강간범의 국적을 명시하는 게 해결책이 될 순 없다. 낮은 교육수준이나 빈곤 같은 다른 문제는 덮어버리고, 새 사회에 적응해 열심히 살아가는 다른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언론은 진실을 보도할 의무뿐 아니라 잘못된 편견을 퍼뜨리지 않을 책임도 있다. 학급에 한 명뿐인 유대인으로 따돌림을 당했던 아인슈타인의 말마따나, “편견을 무너뜨리기란 원자를 분해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코린 마이에르, 〈아인슈타인〉)”.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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