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2020년 4월2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장례식장 지하 주차장에 코로나19 관련 사망자의 시신이 안치된 관들이 들어차 있다.

스페인에 있는 시어머니가 전화로 나쁜 소식을 전했다. 옆집 엘리세타 할머니가 코로나19 확진을 받아 입원했다고 한다. 엘리세타 할머니는 우리 가족이 스페인 시댁에 갈 때마다 잘 왔다며 커다란 케이크를 구워 가져다주는 분이다. 자식들과 손주들까지 열 명이 넘는 아이를 직접 키운 분이라 볼 때마다 육아 관련 잔소리가 한가득이다. 오지랖이라고 흘려듣기엔 애정이 넘친다. 아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정정했던 그분이 산소호흡기를 대고 누워 있다니. 시어머니와 통화하면서 그 단어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하릴없이 죽음을 떠올렸다.

지난 1년 내내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날마다 발표되는 ‘코로나19 사망자 현황’ 때문이다. 피할 수가 없었다. 뉴스 화면에는 세계 각지에서 제때 처리되지 못하고 쌓여가는 시신이 등장했다. 임종은커녕 마지막에 손 한번 못 잡고 가족을 떠나보낸 사연이 줄을 이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지만, 팬데믹 사망 통계는 질문을 낳았다. 내가 다른 나라에 산다면 죽을 확률도 달라질까.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 죽음의 방식도 결정할까. 이민자의 삶이라는 건 떠나온 나라와 살아가는 나라의 차이를 매 순간 비교하고 또 비교당하는 과정이다. 정확한 숫자로 표시되는 팬데믹 통계는 적나라한 비교를 부추겼다. 코로나19로 인한 인구당 사망자 수는 스위스가 한국의 40배에 이른다. 내 한국 여권과 스위스 거주증 사이의 혼란도 40배로 커졌다.

숫자만이 아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질감을 느낀다. 최근 한 정치인의 발언을 접하고 놀랐다. 스위스 수도 베른의 보건 디렉터이자 극우 정당 SVP 소속인 피에르 슈네크가 1월20일 일간지 〈NZZ〉와 한 인터뷰였다. 스위스의 코로나19 사망률이 높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베른에서 지금까지 나온 사망자 850여 명의 절반인 400명 정도가 요양원 거주자다. 이 400명은 요양원에서 매년 죽는 사람들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요양원 평균 거주 기간은 사망 전 2년 정도다. 지금 요양원에 거주하는 1만4000명 정도의 사람들은, 코로나19에 걸리건 안 걸리건 몇 년 뒤 거기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게 돼 있다. 팬데믹은 우리에게 이걸 다시 절실하게 깨닫게 해줬다.”

한마디로 코로나19 사망자 절반이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었으니 큰 의미를 두지 말라는 거다. 이 발언이 그저 ‘팩트’일 뿐이라고, 또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스위스인 친구에게 한국에서 공직자의 그런 공개 발언은 파장이 클 거라고 했더니 그가 오히려 놀랐다. “이 정도 얘기를 하는 게 문제가 된다고?” 팩트나 진실을 넘어선 가치의 간극이다.

문화 차이는 팬데믹을 계기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일 뿐 원래 존재했다. 문화권별로 죽음을 대하는 다른 태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안락사 규정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적극적 안락사가 합법화된 5개국은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캐나다·콜롬비아다. 절반 이상이 유럽에 있다. 올해는 이 리스트에 여러 나라가 추가될 것 같다. 뉴질랜드에서 지난해 10월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삶의 마지막 선택’ 법안이 통과돼 올해 발효된다. 포르투갈에서는 1월29일 안락사 합법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 대통령의 서명만 남겨두고 있다. 스페인에서도 지난해 12월17일 안락사법이 하원을 통과했다. 상원에서도 통과될 가능성이 큰데, 그러면 올봄 발효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어느 쪽이 ‘유럽의 네 번째 안락사 합법국’이 될 것인가를 놓고 경쟁 아닌 경쟁을 하고 있다.   

스위스가 죽음에 급진적인 이유

안락사를 말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나라가 스위스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허용되는 건 위 국가들에서 논의하는 적극적 안락사(euthanasia)가 아니라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이다. 이 둘의 차이는 ‘마지막 행위’의 주체, 즉 치명적 약물을 누가 주입하는지다. 의사가 직접 주입하면 적극적 안락사, 의사의 처방을 받아 환자 본인이 주입하면 조력자살이다. 스위스뿐 아니라 미국의 일부 주,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부 주에서도 조력자살은 합법이다. 안락사 방식 중 약물 주입이 아니라 연명치료를 중지함으로써 환자가 사망하도록 하는 것은 수동적 안락사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2016년 1월에 통과돼 2018년부터 시행되었다(연명의료결정법).  

안락사법과 관련해 가장 급진적인 나라를 꼽자면, 2002년에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나, 나이 제한 없이 미성년자도 안락사가 가능한 벨기에가 먼저 꼽힐 것이다. 그런데 스위스가 늘 화제인 이유는 뭘까. 스위스의 제도는 좀 독특하다. ‘이기적인 동기로 다른 사람의 자살을 돕는 건 위법’이라는 규정이 1940년대에 만들어졌다. 유산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부모의 자살을 돕거나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누군가의 자살을 부추기는 건 불법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기적 동기 없이 타인의 자살을 돕는 일은 불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결과로 1980년대부터 등장한 것이 조력자살을 체계적으로 돕는 업체들이다. 이 업체들은 고객(자살을 원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약물을 주입할 때까지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돕는다. 이런 업체가 네 곳 있는데, 그중 두 곳은 외국인도 고객으로 받는다. 일명 ‘자살 관광’이 그렇게 생겨났다.  

세 가지 특징, 즉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상태가 아니라도 의사에게 치명적 약물을 처방받을 수 있다는 점, 의사와 환자 사이에 제3의 업체가 개입해 일을 순조롭게 한다는 점, 외국인도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스위스는 ‘전위적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다른 나라들은 모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는 불치병’이라는 제한 조건을 두고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외국인 조력자살이 가능하긴 하지만, 의사가 반드시 환자와 상담을 해서 조건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외국인에게는 쉽지 않다. 스위스 조력자살 업체 중 두 번째로 큰 곳이자 외국인도 받는 ‘디그니타스’에 따르면, 2018년에 자살을 목적으로 이 업체를 찾은 외국인이 221명이었다. 독일(87명), 프랑스(31명), 영국(24명) 등 조력자살이 불법인 주변 국가에서 온 사람이 많았다.

다른 부문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스위스가 어쩌다 죽음에 대해선 이처럼 급진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을까. 개인의 선택을 중시해서? 죽음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문화라서? 일부 맞는 얘기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는 다른 제도적 문제가 있다. 스위스 의료시스템의 결함이다. 스위스의 의료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는 하나, 그 기술은 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쪽에 치우쳐 있다. 완화치료나 호스피스 케어에는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스위스 정부가 국가 차원의 완화치료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한 건 겨우 2010년 들어서다.

독일 출신의 의사 슈테픈 아이흐뮐러 교수는 2012년부터 스위스 베른 대학병원의 완화치료센터를 이끌고 있는데, 그는 이 같은 스위스 의료시스템이 ‘파편적’이라고 지적한다. “스위스는 그동안 ‘병과 함께 사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다. 병원은 국가적 보건시스템의 일부가 아니라 경제적 실체다. 국제적 완화치료 수준과 비교하면 스위스는 여전히 개발도상국이다.”

2017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의사 필립 니츠케가 고안한 안락사 기계인 사르코.

‘조력 삶’은 ‘조력 죽음’보다 훨씬 어렵다

스위스의 조력자살 사망자는 대개 불치병 환자나 병의 말기에서 고통받는 사람, 병이 없어도 나이가 많고 삶의 의미를 잃었다는 사람들이다. 이 숫자는 증가 추세다. 2018년에 조력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총 1176명으로, 스위스 전체 사망자 50명 중 1명에 해당한다(연방통계청). 2003년(187명)에 비하면 6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추세는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에선 안락사와 조력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2007년(2210명)부터 2017년(6585명) 사이 세 배로 늘었다(의학저널 〈랜싯〉).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2015년 발표한 ‘죽음의 질 지수’가 있다. 완화치료 환경, 인력, 이용자 부담 등을 종합해 전 세계 80개국을 비교한 조사다. 스위스는 여기서 15위를 했다. 인구당 GDP 세계 2위, 의료비 지출 세계 2위인 나라에 걸맞지 않은 성적이다. 1위는 영국, 2위는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상위 20개국 안에 아시아 국가 네 곳(타이완 6위, 싱가포르 12위, 일본 14위, 한국 18위)이 들어간 점은 인상적이다. 아이흐뮐러 교수도 “아시아에서는 삶의 마지막 단계를 사는 노인들이 존경을 받는데 스위스에선 노인들의 가치나 위엄이 떨어진다”라며 문화 차이를 언급했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들이 실제로 사회적 존경을 받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다. 하지만 부모를 요양원에 보낸 뒤 불효자라고 자책하는 자녀가 드물지 않은 건 사실이다.

미국 의사 아툴 가완디의 역작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도 이 문제가 언급된다. 가완디는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며 이렇게 썼다. “2012년 현재 네덜란드인 사망자 35명 중 한 명이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사실이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실패의 척도다.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확보해줄 가능성이 있는 완화치료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뒤처져 있다. 어쩌면 안락사 시스템이 정착돼 있는 탓에 장애가 생기거나 심각한 질병에 걸렸을 경우 다른 방법으로 고통을 줄이거나 삶을 개선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믿음이 강화됐을 수도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유럽에서 안락사나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나라들이 코로나19 대응 성적도 더 나쁘다. 어쩌면 바이러스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팬데믹은 사회의 근본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안락사나 조력자살은 ‘좋은 죽음’일까, 아니면 ‘좋은 삶의 실패’일까. 물론 완벽에 가까운 완화치료 시스템이 있는 곳에서도 안락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옵션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죽음을 택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확실한 건, 가완디의 말처럼 “‘어시스티드 리빙(조력 삶)’은 ‘어시스티드 데스(조력 죽음)’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훨씬 더 큰 가능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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