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지난해 12월 화물연대 부산지역본부 서부지부장으로 당선된 김지나씨가 2월13일 자신의 화물차 앞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설날 다음 날인 2월13일 토요일, 김지나 민주노총 화물연대 부산지역본부 서부지부장은 경남 진해에 위치한 부산신항에 나와 있었다. 연휴 중 주차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수백 대에 이르는 화물차가 주차할 곳이 없어서 넓은 도로에 불법으로 세워져 있었다.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에는 “물류단지 근로자 및 이용자의 주차 편의를 위한 공영주차장의 설치가 검토되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 신항에는 공영주차장이 없다. 화물차 기사들은 준법 주차를 하고 싶지만 주차할 데가 없어서 딱지를 떼인다. 보행자의 안전 역시 위험할 수밖에 없다. 화물연대가 지금껏 주장해온 구호라며 김지나 지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국민에게 안전을, 화물 노동자에게 권리를.”

김 지부장은 지난해 12월6일 화물연대 부산지역본부 서부지부장에 당선됐다. 화물연대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지부장이다. 그에 따르면 화물운송 업계에서 여성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1%도 되지 않는다. 50~60대 보수적인 남성 중심의 업계에서 ‘40대 어린 여성’으로 일하고 조직의 리더가 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김지나 지부장은 “이제와 뒤돌아보면 참 대단한 일을 한 것 같다”라며 웃었다.

그가 처음 화물자동차(견인형 특수자동차) 운전대를 잡은 때는 2016년.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서면서부터다. 조선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용접공으로 일하던 남편의 수입이 급감했다. 거의 모든 조선소 하청업체가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임금을 체불하거나 폐업했다. ‘남편만 믿고 있으면 안 되는구나. 나도 일을 해야 한다.’ 스무 살에 결혼해 직장 생활을 해보지 않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기술이나 경력 없는 40대 여성은 주로 식당 설거지나 서빙 같은 일에 눈을 돌리기 쉽다. 그는 식당 일 대신 운전을 떠올렸다. 애초에 덩치 큰 차에 매료돼 있던 터였다. 버스나 화물차가 좋았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준비 과정부터 반대했다. 남편은 ‘여자는 힘들어서 못한다’며 말렸다. 김 지부장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 남녀 구분도 없다. 여자라서 못하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버스운전 자격증과 화물운송종사자 자격증을 한 번에 땄다.

그러나 ‘여성’이자 ‘초보’인 운전기사에게 일을 주는 이는 없었다. 버스회사는 받아주지 않았다. 2016년 8월 우연히 알게 된 이승덕 당시 화물연대 컨테이너위수탁지부 국보지회장이 흔쾌히 화물기사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차주인 이 지회장에게 고용되는 형태의 월급제였다. 김 지부장은 사흘 동안 주차장에서 좌·우회전, 후진을 연습했다. 20피트(약 6.1m)에 달하는 빈 컨테이너 두 개를 싣고 양산~부산 33㎞를 혼자 달렸다. 그는 “담담하게 첫 운행을 마쳤는데 이 지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라. 돌이켜 생각해보면 초보에게 일자리를 준 이 지회장이 정말 대단한 결정을 한 거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2016년 12월, 화물차를 직접 구입했다. 5000만원의 빚을 졌다. 운송회사와 도급·용역·위탁 등으로 계약한 특수고용 노동자가 되었다. 김 지부장은 부산신항 배후물류단지 내에서 일한다. 수출할 물건이 담긴 컨테이너를 싣고 터미널로 운송하거나 수입하는 물건을 실은 컨테이너를 터미널에서 가지고 나오는, 물류단지 내 단거리 셔틀이다. 하루 컨테이너 10여 개를 옮긴다. 단지 내에서만 일하는데도 하루 150㎞가량 운전한다.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7시에 퇴근한다.

ⓒ시사IN 신선영김지나 지부장은 전임 상근직이 아니다. 노조 활동을 하기 위해 개인의 시간을 쪼개야 한다.

화물연대 지부장 출마 결심한 이유

그가 일하는 5년 동안 직접 본 여성 화물기사는 서너 명이다. 민주노총 화물연대 조합원 2만2000여 명 중 여성은 70명이지만, 사무직 등을 제외한 현장직 여성 화물기사는 10명이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성 위주의 업무 환경에서 일하며 겪은 고충도 적지 않다. 김 지부장은 “한국 중년 남자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편이라는 걸 느꼈다. 나도 남들과 똑같이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이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중년에 접어든 김 지부장에게 일부 남성들은 ‘머리 그러고 다니지 마라’ ‘옷 그렇게 입지 마라’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술 한잔하자거나 전화번호를 달라는 식의 성희롱도 적지 않았다.

운송 외 업무는 업계에 만연한 문제다. 원칙적으로는 화물을 옮긴 후 빈 컨테이너를 터미널에 갖다주면 기사로서 일이 끝난다. 하지만 컨테이너 소유주인 선사 직원에게 컨테이너 상태 검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육중한 컨테이너 문을 열고 닫으며, 컨테이너를 세척장으로 운반하는 업무를 화물기사가 해야 한다. 화물기사의 노동력과 차량, 연료를 쓰지만 이에 대해 선사가 지급하는 별도의 비용과 안전장비는 없다. 지난해 11월 인천 영흥화력발전소에서 발생한 사망사고는 이처럼 운송 외 업무를 하던 중에 일어났다. 화물차 운전기사 심 아무개씨는 당시 발전소에서 나온 석탄회(석탄재)를 화물차로 옮기는 상차 작업을 하다가 적재함에서 떨어져 숨졌다.

이른바 ‘지입제’ 역시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지입제라 불리는 위수탁제도는 운송 사업권을 가진 운송회사가 화물차를 소유한 차주와 계약을 맺고 영업할 수 있는 차량으로 등록해주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운송회사는 화물기사에게 ‘영업용 번호판 사용료(지입료)’를 받는다. 현실적으로 기사가 차량을 구입하고 관리하지만, 화물차의 명의를 운송회사로 등록해야 한다. 현재 김지나 지부장은 차량을 직접 구입하고 운행하지만 운송회사 명의로 등록된 차를 위임받아 ‘대행’하는 지위에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구조이지만 거의 모든 화물기사가 이에 순응한다. 김 지부장은 달랐다. 2017년 운수회사는 ‘넘버 값’ 명목으로 2000만원을 요구했다. 주위에서는 돈 주고 넘어가라며 말렸지만 그는 싸웠다. 민사소송 1심에 패소하고 번호판을 빼앗겼다. 소송이 허탈하게 끝났지만 “부당함에 맞서는 일도 내 일”이라며 후회는 없다고 했다.

김 지부장의 타협하지 않는 기질을 본 동료들이 화물연대 활동을 추천했다. 얼떨결에 총무차장이 되었다. 2018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여하며 ‘노동자 정신’이 달아올랐다. 난생처음 출퇴근길에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투쟁가를 듣고 민주화운동에 대해 공부했다. 3년간 노조 활동을 하며 ‘내가 할 일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2020년 12월 화물연대 선거를 앞두고 남편에게 말했다. “나 화물연대 지부장에 출마한다.” “왜?” “현장에 불합리한 게 많아서. 누구라도 해야 한다. 내가 한다.”

‘경력이 짧은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 최초’라는 점을 두고 그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빗대는 이들도 있었다. 김 지부장은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보다 한 명씩 만나 설득하는 전략을 폈다. 기대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는 단독 출마해 찬성 85%로 당선되었다. 부산 서부지부는 부산지역본부 9개 지부 중 하나로 조합원이 360여 명이다.

그의 노조 활동은 전임 상근직이 아니다. 노조 활동을 하려면 개인의 시간을 쪼개야 하고 이는 곧 생계와 연결된다. 체력적·경제적·정신적으로 힘들지만 더 나은 노동환경을 위해 해야 할 일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서부지부 내부적으로는 주차장 확보 등 환경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 부산지역본부·중앙본부와 함께 운송 외 업무·지입제 구조를 바로잡고 영업용 화물차 등록실명제를 시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2020년 안전운임제가 시행되어 화물기사가 받는 최소한의 운임이 책정되고, 운송회사가 부정한 금품(수수료)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신고하더라도 익명이 보장되지 않아서 현실적으로 유용하지 않다. 이 같은 법적 허점도 보완해야 한다.

김지나 지부장은 수개월 전 40~50대로 보이는 남성 두 명에게 뜻하지 않은 감사의 인사를 들었다. 터미널에서 마주친 한 남성은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다른 초보 화물기사 한 명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떨떨하고 감동적인 인사였다. 그는 “구조적으로 바꿔야 하는 게 많다. 화물기사의 처절한 삶을 바꾸려면 스스로 깨쳐야 한다. 나는 화물연대 덕분에 사회에 첫발을 잘 내디뎠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부산/글 송지혜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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