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자료2007년 8월1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전 〈시사저널〉 기자들과 독자 후원인들이 〈시사IN〉 창간 선포식을 개최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천관율이라고 합니다. 2008년부터 독립언론 〈시사IN〉(시사IN)에서 기자로 일해왔고, 지금 직책은 정치팀장입니다. 제700호 특집기사를 맡았습니다. 시사IN은 2007년 9월에 창간해 이번에 700호를 냅니다. 1987년도 아니고 2007년에 종이 주간지를 만들겠다는 담대한 시대착오 프로젝트가 놀랍게도 한국을 대표하는 시사주간지로 성장했습니다. 탐사기획팀장인 변진경 기자는 제 입사 동기입니다. 2007년 연말, 합격 소식을 들은 지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가지 마라. 금방 망할 매체를 뭐하러 가냐.” “가라. 어차피 금방 망할 테니 시민단체 활동 경험한다 생각하고 다녀와도 늦지 않다.” 우리가 15년째 살아남아 있다니, 좀 자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700호 이야기의 주인공은 시사IN입니다. 다만 독자 여러분께 익숙한 ‘언론으로서의 시사IN’ 말고, ‘기업으로서의 시사IN’입니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의 목표는 주주의 이익 실현입니다. 이 문장은 마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헌법 제1조 1항이듯, 우리 시대 경제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는 1조 1항입니다. 언론이 특정 기업에 나쁜 기사를 빼주거나 좋은 기사를 써주고 광고를 받으면 돈을 더 벌 수 있습니다. ‘기업 시사IN’이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이런 결정을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언론 시사IN’은 이런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시사IN 광고 담당자들이 유독 힘들게 일합니다).

ⓒ시사IN 자료2007년 9월15일 〈시사IN〉 창간호 인쇄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시사IN 창간을 준비하던 2007년, 기자들은 독립언론을 지키려면 회사의 헌법 격인 정관을 제대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누가 1대주주가 된다 해도 이사회의 과반수를 혼자 구성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시사IN의 모든 주식을 한 사람이 가진다고 해도 그는 이사회를 장악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이사회의 3분의 1을 편집국이 추천합니다. 편집국장은 당연직 이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5인 이사회에서 편집국 출신 이사가 두 자리를 맡습니다. 셋째, 대표이사 선출은 이사회의 권한이지만 편집국이 폭넓은 추천권을 행사합니다. 현 이숙이 대표이사는 편집국 기자 출신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사IN은 주식회사이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자 경영 기업에 가깝게 운영됩니다. 이 구조는 아주 성공적으로 작동했습니다. 저는 14년째 시사IN을 다니면서 광고나 수익과 관련된 외압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몰라서 못 쓴 기사가 있을 뿐 외압으로 못 쓴 기사는 없습니다. 이것은 언론 노동자에게 가장 핵심이라고 해도 좋을 근로조건입니다.

‘기업 시사IN’은 주주 가치 극대화를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주 가치 극대화 요구를 어느 정도 걸러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래도 되는 걸까요? 현대 ‘경제헌법’의 1조 1항을 어기는 기업이 괜찮을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시대의 경제헌법 1조 1항,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고 기업의 목표는 주주의 이익 실현이라는 명제가 그리 자명하지도 탄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한책임’과 ‘무한권한’의 결합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콜리어는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좌파라고 부르기는 힘든 연구자입니다. 최신작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기업 소유주는 오직 주식 보유자로 한정된다. 이런 시스템이 자본주의 본래의 고유한 요소는 아니다. 이것이 생긴 이유는, 기업 성장의 초창기인 18세기에 위험을 떠안을 투자자금을 조달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제약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갔다.”

주주는 유한책임만 감당합니다. 투자금액만큼만 손해를 보면 그만이지, 기업의 손실까지 다 떠안을 책임은 없습니다. 주식 투자자는 삼성전자나 셀트리온의 주가가 떨어질 걱정은 하지만, 회사가 망하면 빚까지 떠안을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이 규칙이 없다면 ‘동학개미’ 행렬은 뚝 끊겼을 겁니다. 18세기의 기업 환경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위험했고 자본은 터무니없이 부족했습니다. 주주 유한책임이라는 중요한 혁신 덕에 창업이 활발해졌고 자본주의는 번창해 나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고등학교 경제 시간에도 배우는 상식입니다.

ⓒAP Photo1월16일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 기업의 주주는 대단히 독특한 의미의 ‘주인’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마법을 부려도 책임 그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주주의 책임을 유한하게 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 그걸 대신 떠안는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영국 경제학자인 콜린 메이어가 〈왜 우리는 기업에 실망하는가〉에서 제안하는 사고실험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여기 ‘주식회사 천관율’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주주는 저, 천관율 한 명입니다. 100만원을 투자했습니다. ‘주식회사 천관율’은 변진경 기자에게 100만원을 빌렸습니다. 이 회사는 이제 총 200만원을 들고 투자 아이템 하나를 찾아냅니다. 200만원을 투자하여 성공하면 두 배를 벌고, 실패하면 모두 날립니다. 확률은 반반입니다.

주주와 채권자의 입장을 나눠보겠습니다. 투자에 성공하면 ‘주식회사 천관율’은 400만원을 갖게 됩니다. 100만원을 변진경 기자에게 갚고 나면 유일한 주주인 저는 300만원을 얻습니다. 반대로 실패하면 100만원이 사라지고 0원이 됩니다. 300만원 확률이 절반, 0원 확률이 절반이니, 100만원을 투자한 저는 ‘150만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기대수익률이 50%입니다.

채권자는 어떨까요. 투자가 성공했을 때 변진경 기자는 빌려준 돈을 받았으니 본전입니다(이자는 동기니까 안 주는 걸로 하겠습니다). 반대로 실패하면 100만원을 받을 방법이 사라집니다. 유일한 주주인 저는 투자액을 넘어서는 손실에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100만원을 빌려준 변진경 기자는 ‘50만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기대수익률이 -50%입니다.

저와 변진경 기자가 합의로 결정한다면, 제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이런 투자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경제헌법에 따라, ‘주식회사 천관율’의 경영자는 주주인 제 수익을 극대화하는 임무만 있습니다. 이 투자는 집행됩니다. 경제헌법 1장 1절은 주주가 채권자에게, 또는 기업의 다른 이해관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무기로 쓰입니다. 이 사고실험을 소개한 후에, 메이어는 이렇게 씁니다. “이것이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이다.”

주인이란 최종 권한을 갖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최종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실한 자영업자들은 가게가 망했을 때 “내 투자금만큼만 책임지겠다”라고 버티지 않고 빚을 다 떠안습니다. 그래서 기업의 주주는 대단히 독특한 의미의 ‘주인’입니다. 유한책임 원리 덕에 주주는 기업의 손실에 최종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기업의 불법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이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일으켜도, 산업재해로 노동자가 죽어나가도 주주가 처벌되지는 않습니다. 투자자가 이 모든 일을 직접 책임질 방법이 없으므로, 투자자에게 기업활동의 책임을 온전히 묻는 것은 당연히 부적절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투자자를 주인이라고 부를까요?

이것은 보기만큼 자명하지도 않고 불변의 원리도 아닙니다. 법인기업의 유한책임이란 원래 이례적 특권이었습니다. 미국의 언론인 톰 하트만은 책 〈기업은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에서 19세기의 회사법을 분석하여 이렇게 씁니다. “투자자의 책임을 제한해주는 대가로 정부는 기업에 ‘공익을 위하여, 공공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책임을 요구했다. 국민이 선출한 정부가 기업에 책임을 감면해주는 대신 국민에게 보탬이 되거나 적어도 해를 끼치지는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즉 유한책임은 유한한 권한과 한 쌍이었습니다. 태동기부터 19세기까지, 기업은 특권과 공적 의무가 교환되는 일종의 공공기관으로 간주됐습니다.

그런데 20세기를 거치며 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 경제학자들이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명제를 경제헌법으로 격상시킵니다. 시카고학파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이 이 흐름을 주도했습니다. 이로써 ‘유한책임’과 ‘무한권한’이 결합했습니다. 기업은 유한책임의 특권을 받았으니 공익 증진에 책임이 있다는 19세기의 상식을, 이제는 교양 있는 지식인들이 웃으며 교정해줍니다. “아닙니다. 기업의 목적은 주주 가치 극대화입니다.” 둘째, 기업은 점점 더 덩치가 커져서, 사회적 참사를 일으키고 경제 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비대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기업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은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흔들 만큼 중요해졌습니다. 이것은 “누가 결정하는가?”를 묻는 동시에 “누가 책임지는가?”를 묻습니다.

ⓒ삼성전자 제공2020년 10월20~2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베트남 하노이 인근 삼성 복합단지를 살피고 있다.

주주는 기업 이해관계자의 하나일 뿐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헨리 한스만은 법학자이자 경제학자입니다. 미국 법경제학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그가 쓴 〈기업 소유권의 진화〉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우리 질문을 정면으로 다뤄서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책을 시작합니다. “소비자 협동조합은 소비자가 소유자다. 생산자 협동조합은 원료 공급자가 소유자다. 주식회사는 자본 투자자가 소유자다. 주식회사는 자본을 공급하는 사람들의 협동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만나본 연구자들이 ‘주주가 주인’이라는 명제가 생각만큼 자명한 게 아니라고 알려주었다면, 한스만은 한술 더 뜹니다. 그는 ‘기업의 주인(주주) 대 이해관계자’라는 대비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여기서는 주주도 그저 기업의 이해관계자 중 하나입니다. 기업은 투자자(주주), 노동자, 원료 공급자, 소비자 등의 이해관계자와 거래합니다.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기업과 얽혀 있고, 서로에게 비용을 떠넘기려 쉴 새 없이 빈틈을 노립니다.

시사IN의 의사결정 구조를 보면 경영자가 수익을 모조리 성과급으로 직원들에게 나눠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시사IN이라는 기업에서 한 이해관계자(노동자)가 다른 이해관계자(주주)를 착취하는 셈입니다. 이 착취는 반대 방향으로도 가능합니다. 모든 수익을 남김없이 배당으로 지급하는 회사는, 한 이해관계자(주주)가 다른 이해관계자의 몫을 그만큼 더 가져가는 것입니다. 시사IN 주주가 광고를 받고 기사를 빼내는 데 성공한다면, 주주가 노동자인 기자들과 독립언론을 구독하는 소비자를 동시에 착취하는 셈입니다.

ⓒ연합뉴스2004년 2월27일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김상조 소장 등 참여연대 회원들이 진행요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기업이라는 전장에서 이해관계자들이 서로에게 비용을 더 넘기려는 전투가 일상으로 벌어집니다. 이것은 누구도 진정한 주인이 아닌 동시에 누구나 조금씩은 주인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주인들의 각축전’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업의 의사결정이란, 어떤 자명한 원리(‘경제헌법’)의 문제에서,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자원배분을 결정하는 문제로 바뀝니다. 즉 정치의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질문도 바뀝니다. “누가 기업의 주인인가?”에서, “여러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기업이 책임 있게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바뀝니다. ‘책임성’은 기업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주목하는 키워드입니다. 고질적인 주주 책임성 문제를 뛰어넘을 방법이 필요합니다. 책임성은 주주들 사이에서도 엇갈립니다. 단기 주주는 기업의 장기 전망에 아무런 관심이 없지만, 그들도 의결권을 행사합니다. 콜린 메이어는 단기매매로 차익을 노리는 주주와 10년 혹은 대를 이어 주식을 보유할 주주가 같은 의결권을 행사하는 건 매우 이상하다고 지적합니다. 기업 인수합병의 자유경쟁이 가장 치열한 영국에서 주주의 책임성 문제는 깊은 고민거리입니다.

한국의 재벌체제는 ‘오너’라는 독특한 ‘주인’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은 0.6%이지만 삼성 계열사의 복잡한 지분구조에 기대어 경영권을 방어합니다. 재벌체제가 내세우는 명분도 책임성입니다. 주주는 기업의 장기 전망과 미래 전략에 관심도 없고 책임성도 낮기 때문에 ‘오너’가 기업에 책임성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주나 외국인 투자자보다는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의 미래에 더 관심이 많을 가능성이 아무래도 높습니다.

개혁 세력은 오너 체제의 대안으로 주주 권리 보호를 주창했습니다.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여 ‘오너 독재’를 끝내자는 노선입니다. 독재의 대안은 국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민주화라는 논리와 구조가 같습니다.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도 이 차원으로 등장합니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연이어 맡은 장하성·김상조 교수가 상징적 인물입니다. 이것으로 기업 문제를 다루는 한국의 정치 지형이 결정됩니다. 지난해 연말의 ‘공정경제 3법’ 논란은 이 두 노선의 대결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에 비춰보면 이 양자택일은 선택지를 지나치게 좁혀버리는 것 같습니다. ‘오너 체제’를 답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오너 체제’는 장점과 단점 모두 군주정과 비슷합니다. 근대 정치철학을 정립한 토머스 홉스는 군주정을 옹호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군주정에서는 군주의 사익과 공익이 일치한다.” 이것은 ‘주주보다는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의 미래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라는 재벌체제 옹호론의 17세기 버전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17세기에도 군주정은 군주 캐릭터의 예측 불가능성과, 군주의 오판을 교정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21세기 한국 재벌체제의 ‘오너 리스크’와 판박이입니다.

반면에 개혁 세력의 주주 권리 강화 노선은 우리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추적해온 문제와 충돌합니다. 이 노선은 주주라는 ‘이해관계자 중 하나’에게 ‘주인의 특권’을 강화해줍니다. 주주가 다른 이해관계자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문제, 주주의 책임성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즉 경제민주화 노선에서 ‘민주화’의 범위를 주주로 한정할 것인가, 더 넓혀서 이해관계자를 포괄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오너 대 주주’ 대립 구도는 한국 특유의 전선에 가깝습니다. 국제적으로 주된 대립 구도는 ‘주주 자본주의 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주주 자본주의는 경제헌법의 정신, 밀턴 프리드먼의 정신입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노동자, 공급자, 소비자의 이해관계가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200대 대기업 협의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은 2019년 8월에 인상적인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기업의 목적을 변경했다. 주주 이윤 극대화라는 가치를 넘어 종업원과 고객, 납품업체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무를 강화하겠다.” 독일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대표 국가로 손꼽힙니다. 1976년 제정된 공동결정법에 따라 노동자들이 기업 감독위원회(이사회의 경영을 감독하는 기능을 합니다)에 노사 동수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분명 더 정의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더 효율적이기도 할까요?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이 되면 유리한 점이 꽤 있습니다. 저는 시사IN의 미래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업특수적 숙련(지금 다니는 기업에서만 유용한 특수한 숙련)’ 덕분에 제가 일을 가장 잘할 곳은 14년을 다닌 지금 회사입니다. 따라서 회사가 사라지면 손해가 매우 큽니다. 언론업의 성격이나 미래 전망도 보통의 투자자보다는 잘 알고, 경영자를 압박할 만큼 정보가 있으며 늘 가까이에서 일하니 감시하기 편합니다. 이들 대부분은 주주가 갖지 못하는 장점입니다. 공동결정제를 운영하는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 노사 평화는 유럽 최고 수준입니다.

그러나 주주는 여러 단점을 뛰어넘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주주 가치 극대화’라는 목표는 측정하고 평가하기가 아주 편합니다. 주주는 매우 동질적 자원인 돈을 투자합니다. 그리고 매우 동질적 지표인 수익성으로 성적표를 냅니다. 그래서 기업이 의사결정을 할 때 이해관계의 충돌이 적습니다. 동질성 높은 목표만 보고 달리면 되니까요. 한스만은 이런 걸 ‘의사결정 비용’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주와 달리 노동자들은 직무에 따라, 연차에 따라, 숙련도에 따라 이해관계가 마구 엇갈립니다. 그래서 노동자 소유 기업은 의사결정 비용이 지속 불가능한 수준으로 높아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대다수의 기업을 주주가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한스만은 주장합니다. “주인 없는 회사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세간의 통념에는 이론적 바탕이 있습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자주 좌초하고 진전이 더딥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기업 의사결정 구조에 이해관계자들이 들어가는 거버넌스 모델을 뜻합니다. ‘선한 기업가’가 주주 외의 이해관계자들을 잘 돌보자는 도덕 캠페인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BRT가 인상적인 성명을 내놓고 1년이 지나도록 이사회의 지배구조가 바뀐 기업이 사실상 없다는 연구가 나왔습니다. 모델 국가라는 독일에서조차도 노사 공동결정제가 이뤄지는 곳은 이사회가 아니라 감독위원회입니다.  

ⓒ시사IN 이명익2018년 1월18일, 〈시사IN〉 공채 1기로 입사해 10년째 일하고 있는 변진경 기자가 사무실에서 아이를 보며 본인이 쓴 기사의 편집대장을 확인하고 있다.

‘스스로를 통치하는 경험’이 일터의 일상

시사IN은 절반쯤 노동자 경영 기업이어서, 의사결정 비용의 문제에도 절반쯤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시사IN은 연봉 협상이 없습니다. 임금은 직무와 연차에 따라 고정돼 있습니다. 성과를 평가해 급여에 반영하는 시스템도 없습니다. 요즘 기업의 상식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지만, 그 덕분에 노동자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엇갈릴 일이 줄어듭니다. 노동자 경영 기업의 성격에 맞춰서, 의사결정 비용을 최대한 낮추는 시스템이 장착된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노동자 경영 기업에 다닌다는 건 꽤 피곤한 일입니다. 판단해야 할 일도 많고 노동자끼리 엇갈리는 이해관계의 조정도 버겁습니다. 그러고도 밖에서 보면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관성대로 흘러가는 기업으로 보입니다. 이럴 때 “주인 없는 회사는 한계가 있다”는 말은 쉬운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지성사를 살펴보면 민주정 역시 19세기 초반까지도 비슷한 평가를 받은 낯선 정치체제였습니다. “주인 없는 체제는 한계가 있다”라는 논평이 민주정에 쏟아졌습니다. 인민이 뽑은 지도자는 지성과 경험이 부족할 것이고, 인민은 권력을 제어하지 못해 폭주할 것이며, 군주가 없는 나라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상식처럼 통했습니다. 역량이 모자라서든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서든, 인민은 스스로를 지배할 수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군주정은 적어도 국가를 지속 가능하게 해주므로 참을 만한 악덕이었습니다.

이런 시절이던 1835년에 프랑스의 한 젊은 귀족이 미국을 다녀온 여행기를 펴냅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이 어떻게 그 약점 많은 민주정을 50년째 유지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가 쓴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민주정이 가능한지를 치열하게 관찰한 여행기입니다. 21세기 독자의 눈으로 읽으면, 19세기 지식인의 눈에 민주정이 얼마나 낯설고 위태위태해 보였는지 생생히 드러납니다.

토크빌은 마치 우리 시대가 ‘주인 없는 회사’를 보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미국 민주정을 관찰하면서도, 이런 이례적인 정치체가 어쩌면 꽤 오래 잘 작동할 미묘한 조건을 포착해냅니다. 길은 매우 좁고 까다로웠으나, 불가능하지는 않았습니다. 토크빌의 여행기는 20세기 민주정의 번성을 예언하는 통찰을 보여줍니다.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따라 여행하다 보면, 1830년대의 미국을 여행하던 토크빌의 관찰을 따라가는 기분이 듭니다. 우리 시대는 기업의 지배구조에 이해관계자를 폭넓게 포함시키면서 효율성을 유지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길은 매우 좁고 까다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릴 때는 아닙니다.

스스로를 통치하는 시민은 민주정을 작동시키는 고갱이입니다. 멀게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가깝게는 로버트 달까지, 고금의 위대한 정치철학자들이 강조해온 가치입니다. 보통 일터가 주는 경험이란, ‘스스로를 통치하는 경험’보다는 ‘군주정의 신민이 되는 경험’에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거대 기업이 경제활동의 표준이 된 우리 시대에는 ‘퇴근 후에만 스스로를 통치하는 시민’이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이자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에서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면, 시민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통치할 훈련을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민주정이 직면한 최대의 도전일지 모릅니다.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는 독립언론에서 일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통치하는 경험’이 일터의 일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꽤 피곤한 일이기는 하지만, 분명 특별한 행운입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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