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술계는 대중문화와는 판이 다르다. 우리는 비싸야 몇만 원이면 음반이나 영화 DVD를 소유할 수 있지만, 그림은 아니다. 세기적인 천재 화가의 작품은 종종 옥션에서 수백억 원에도 팔리는 그들만의 리그다.

그런데 아주 가끔, 문턱 높은 미술이 대중문화와 만날 때가 있다. 1960년대 팝아트를 창시한 앤디 워홀이 그랬고, 최근에는 그래피티로 예술계를 비판하는 뱅크시가 있다.

그런데 뱅크시보다 훨씬 앞선 1980년대에 낙서로 이름을 알린 아티스트가 있었다. 흔히 ‘검은 피카소’로 알려진 장미셸 바스키아다. 그래픽노블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술계에 갑자기 등장해 불꽃처럼 타오르다 요절한 바스키아의 일생을 보여준다.

바스키아는 그저 거리에서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그는 열다섯 살에 집에서 뛰쳐나와 거리에서 살았다. 그는 거리에서 세상을 배웠고 마약 딜러, 사기꾼, 하층민의 삶에 대해 빠삭했다. 그가 그림 그릴 곳으로 캔버스가 아니라 길거리를 선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평생 마약을 달고 살았고, 낮에는 자다가 밤이 되면 클럽으로 가 돈이 없어도 제일 비싼 칵테일을 마셨다. 고리타분한 윤리보다 그는 자기의 삶과 예술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의 삶은 자기 파괴의 ‘클리셰’ 같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삶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직관적이고, 분노와 반항의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 보인다.

‘검은 피카소’보다 ‘거리의 피카소’

그는 그림뿐 아니라 마케팅에도 천재였다. 바스키아는 자신의 그래피티를 과대 선전했다. 정치적이기도 하고 종교적으로 보이는 메시지를 덧붙였다. 예술적이고 신비로워 보이는 10대 소년의 ‘어그로’는 결국 뉴욕 큐레이터의 눈에 포착된다. 1981년부터 주류 갤러리로 진입한 바스키아는 이후 1988년 급성 마약중독으로 사망할 때까지 30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길거리에서 자고 눈에 보이는 아무 데서나 그림을 그리던 바스키아는 이제 갤러리 관장의 후원을 받아 작업실을 마련하고 비싼 값에 그림을 팔았다. 앤디 워홀 같은 미술계의 슈퍼스타와 함께 전시회를 하고 저명인사들과 두루 교류했다. 그는 스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순식간에 이뤘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은 이용당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바스키아는 “나는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다. 나는 아티스트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바스키아〉를 보니 그에게 ‘검은 피카소’보다는 ‘거리의 피카소’라는 말이 훨씬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스키아〉는 스토리텔링이 친절하지는 않지만 강렬한 에너지의 색감이 인상적이다. 실제 바스키아가 초기에 자주 사용하던 색을 활용했다고 한다.

기자명 박성표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