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제공〈중남미 현대 단편소설집〉보르헤스 외, 문학사상사, 1992년 초판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책을 찾아달라는 손님이 있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그는 나보다 몇 살 위였는데, 눈매가 깨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없어서 나이보다 적어도 열 살은 어려 보였다. 마치 어느 순간부터 나이를 먹지 않는 마법에 걸린,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인상이었다.

나는 책 내용이 조금이라도 기억나는지 물었다. 손님은 그 책은 단편집이며 한 작품 내용이 조금 기억난다고 했다.

의외로 그는 작품 내용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소설은 일종의 환상소설인데, 고양이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어떤 청년에 관한 이야기다. 청년은 어느 날 고양이 속으로 들어가 고양이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거리를 떠돌며 여러 경험을 한 청년 고양이는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깨달았다는 이야기다.

“인간이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작은 부분을 고양이가 되어서는 볼 수 있었던 거지요. 어때요, 흥미롭지 않나요?”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소설 줄거리를 단서로 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손님은 그날 청년과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를 두어 시간이나 하고는 돌아갔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작품을 아느냐고 묻는 한편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봤다.

한 달 정도 지나 그가 다시 책방에 왔다. 나는 아직 책을 찾지 못했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랬더니 책에 있는 또 다른 작품이 기억나서 찾아왔다며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가 들려준 두 번째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작가는 소설 속에서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는데, 거기서 또다시 소설 속 주인공이 다른 소설의 화자가 된다. 그렇게 무한히 반복되는 이상한 이야기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냐고 물었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몇 시간 동안 복잡하게 얽힌 소설 속 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세 번째 방문했을 때는 인기 야구선수를 좋아해서 그가 쓰던 낡은 글러브를 훔치는 야구 마니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역시 처음 듣는 작품이었다. 나는 도무지 책을 찾을 수 없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내 소설 이야기를 들어줘 고맙다

손님은 그제야 자기가 찾는 책이 〈중남미 현대 단편소설집〉이고 민용태 교수가 엮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제야 제목이 기억났다고 했다.

좀 허탈했지만 어쨌든 그 책은 얼마 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책을 아무리 살펴봐도 손님이 들려준 이야기와 일치하는 작품은 한 개도 없었다. 책을 받으러 다시 책방에 들른 손님은 뜻밖의 사실을 고백했다. 지금까지 내게 들려줬던 얘기가 사실은 직접 쓴 소설이며,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서 몰래 습작을 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 후 가정을 꾸려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소설가의 꿈은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가정에서도 소설 얘기를 하면 타박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자기가 소설 이야기를 했을 때 진지하게 몇 시간씩 들어준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모두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것이, 〈중남미 현대 단편소설집〉만은 가장 좋아하는 책인데 잃어버려서 꼭 다시 찾아 읽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그 책에 나오는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처럼 위대한 환상문학가를 꿈꿨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손님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처음으로 그를 봤던 날을 떠올린다. 여전히 그는 소설을 쓰고 있을까? 나는 그가 소설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동안 영원히 늙지 않는 마법이 유효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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