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인간이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별난 현상이 아니다. 인류는 애초부터 사냥한 동물의 남은 뼈나 수확한 작물의 껍질을 버리며 살았다.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체는 어떤 형태로든 쓰레기를 낳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썩지 않는 쓰레기를 만든다. 플라스틱 폐기물은 자연분해가 되지 않고, 생물분해도 되지 않는다(워낙 다양한 플라스틱 유형 가운데 분자량이 아주 작은 것은 생물분해가 되기도 한다). 전 세계의 매립 쓰레기 총량에서 플라스틱 폐기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20%가 되지 않지만, 플라스틱의 내구성이 치명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햇빛에 노출된 플라스틱이 광분해(분자가 빛을 흡수하여 더 작은 단위로 분해되는 화학적 과정)되기도 하지만, 속도가 너무 더디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문제는 플라스틱이 광분해되어 5㎜ 미만의 미세 플라스틱이 되거나 그보다 더 작은 100㎚ 미만의 초미세 플라스틱이 되는 것이다(㎚, 즉 나노미터는 100만 분의 1㎜ 크기이며, 100㎚는 머리카락 굵기의 500분의 1 정도다). 광분해를 통해 사라지는 것은 플라스틱 폐기물의 원래 형태와 쓸모이지, 플라스틱 원료로 쓰이는 입자인 너들(nurdle)이 아니다. 최근 친환경을 내세우는 화학 기업들이 생물분해가 가능하다는 비닐봉지를 만들고 있지만, 대부분이 셀룰로스(섬유소)와 폴리머(중합으로 만들어진 화합물을 일컬음. 플라스틱은 폴리머다)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셀룰로스 성분이 분해되고 나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투명한 수없이 많은 플라스틱 입자만 남는다.

플라스틱 폐기물이 매립지를 차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플라스틱이 마모되어 점점 작아질수록 문제는 더 커진다. 육지에서 바다로 씻겨 내려간 플라스틱 입자는 동물성 플랑크톤이 먹고, 각종 어류는 플라스틱 입자를 삼킨 플랑크톤을 먹을 뿐 아니라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알갱이까지 먹이로 착각한다(물론 형태가 온전한 생수병과 부표와 같은 어구도 먹는다). 그 어류를 먹이사슬 끝에 위치한 인간이 먹는다.

쓰레기 문제는 플라스틱으로 모이고, 플라스틱 문제는 바다에서 끝난다.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알에이치코리아, 2007)과 피에로 마르틴·알레산드라 비올라의 〈쓰레기에 관한 모든 것〉(북스힐, 2020)이 그랬는데, 아예 책 제목과 부제 또는 표지를 통해 플라스틱과 바다를 명시적으로 연관 지어놓은 책도 많다. 데이비드 드 로스차일드의 〈플라스티키, 바다를 구해줘〉(북로드, 2013), 찰스 무어·커샌드라 필립스의 〈플라스틱 바다:지구의 바다를 점령한 인간의 창조물〉(미지북스, 2013), 윌 매컬럼의 〈플라스틱 없는 삶〉(북하이브, 2019), 미힐 로스캄 아빙의 〈플라스틱 수프:해양오염의 현주소〉(양철북, 2020) 등이 그렇다. 이런 연관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도 매우 흥미롭다. 신화나 물질적 상상력 속에서 바다는 생명 또는 근원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상징은 양가적이다. 기독교와 정신분석 일부에서는 바다를 생명보다 죽음에 가깝게 해석한다. 플라스틱을 껴안은 바다는 인간에게 묻는다. ‘너희, 살래? 죽을래?’

해양과학자들과 쓰레기 연구자들은 플라스틱이 바다로 모이는 경로를 오랫동안 관찰한 끝에, 해군과 어선을 비롯한 각종 선박에서 매년 버리는 플라스틱이 어마어마한 양이라는 것을 밝혔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양도 육지에서 바다로 떠내려오는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폴리머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바다 한가운데에 ‘쓰레기 대륙’을 조성한 플라스틱 폐기물의 80%는 바람이나 강물을 따라 바다에 도착한 것이다.

버렸다지만 버려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물리치료사를 하며 주부로 평범하게 살던 산드라 크라우트바슐은 2009년 여름, 가족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휴가를 갔다가 그곳의 해변에 쌓여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더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휴가에서 돌아온 그녀와 가족은 플라스틱 없이 살아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가족이 10년 동안 실천했던 경험담이〈우리는 플라스틱 없이 살기로 했다〉(양철북, 2016)에 자세히 담겨 있다. 이 실험의 핵심은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데만 있지 않았다. 값싸고 편리한 신상품에 대한 욕구는 결핍을 재생산한다는 것, 소비 욕망을 거부하는 데서 좋은 삶이 시작된다는 것, 오늘의 지구 경제를 떠받치는 낭비 경제는 자원을 고갈시키고 기후위기를 불러온다는 것이 ‘플라스틱 없는 세상 만들기’가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이다.

쓰레기 문제로 지혜를 모으고 있는 현자들의 하나같은 생각은 그들의 국적과 무관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쓰레기 시멘트’와 콘크리트혼화제의 실상을 혼자서 파헤쳤던 환경운동가 최병성 역시 〈일급경고:쓰레기 대란이 온다, 그 실상과 해법〉(이상북스, 2020)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비는 곧 쓰레기다. 오늘 내가 구입한 물건은 언젠가 쓰레기로 변한다.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길은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지구는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의 단계에 와 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조금 더 소박한 삶’이라는 불편함을 살아갈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때다.”

미국의 문학이론가 브라이언 딜은 〈쓰레기〉(플레이타임, 2017)에서 대개의 판단이 그렇듯 쓰레기에 대한 판단도 기업이 우리에게 만들어준 것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 우리는 쓰레기통이나 배수로에 버려진 것만 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짜 눈에 띄지 않는 쓰레기들은 쓰레기통이나 배수로에 있지 않다. 다이소에 쌓인 무수한 저가 상품과 백화점 진열장에서 번쩍거리는 샤넬 백도 우리의 과잉 소비를 부추기는 쓰레기일 수 있다. 이처럼 쓰레기 문제는 소비주의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소비를 거부하는 것은 어렵다. 경제를 살리려면 소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는 ‘소비=선, 절약=악’이라는 양도논법에 빠져 있다.

브라이언 딜의 철학적 논변에 따르면, 쓰레기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버리는 쪽과 버려지는 쪽이 있고, 그 사이에 경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핵폐기물은 인간이 버렸다고 우기지만 결코 버려진 게 아니다. 인간은 핵폐기물의 반감기(半減期)가 오기도 전에 멸종할 가능성이 크다. 버리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었으나, 점점 버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빈 플라스틱 생수병을 버린다고 하지만, 플라스틱 병은 없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이 버려지고 있고, 인간이 쓰레기가 되어간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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