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정현

새해 벽두부터 상반된 두 풍경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의 실업급여 수급자 수가 사상 최대(2020년 5만1772명) 규모를 기록했다. 2020년 3분기 말 기준 가계부채 총액은 약 1682조원으로 국내총생산(2019년 4분기~2020년 3분기 GDP)을 처음으로 넘어섰다. 코로나19 3차 대유행으로 자영업자의 시름이 깊어지고, 오는 3월에 몰린 중소기업·소상공인 대출 만기 때 얼마나 많은 부도 사태가 발생할 것인지 공포 분위기까지 조성되고 있다.

주식시장의 분위기는 정반대다. 지난해 3월 1457포인트까지 떨어졌던 코스피 지수가 올해 1월14일 현재 3114포인트로 두 배 이상 치솟았다. 서점가에서는 재테크와 금융시장을 다룬 책이 인기를 끌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도 경제 전문가가 등장할 만큼 ‘투자’가 사회적 현상으로 확대됐다. 같은 나라, 같은 시대에 유례없는 ‘거대한 괴리’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2020년, 코로나19가 만든 위기로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부를 늘렸다. 평소 금융시장에 관심이 크지 않은 사람이라면 의아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우리가 체감하는 경제는 엉망인데 왜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은 치솟을까. 팬데믹은 어떤 기준으로 경제주체들을 환희와 절망으로 갈라치기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구하려면, 팬데믹 이전의 글로벌 금융환경과 지난해 주요 국가들의 금융적 대응을 함께 조망해야 한다. 그런 뒤에 올 한 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경제적 변수들을 미리 짚어볼 수 있다.

이 기사는 완결된 이야기일 수 없다. 우리는 이제 막 ‘팬데믹 경제의 기승전결’ 가운데 ‘기’와 ‘승’을 목격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2021년 벽두, 감염병이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은 국면에서 이 이야기의 ‘전’과 ‘결’이 어찌 흐를지 예단하긴 어렵다. 다만 이 같은 ‘괴리’의 진행 원리와 방향을 이해해야 팬데믹이 만든 격차와 불평등을 제대로 직시하고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 팬데믹 이전 11년– 고조된 과열

2019년 8월, 전 세계 금융시장은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미국 국채 시장에서 12년 만에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장기국채(10년 만기 미국 재무부 채권)의 수익률이 단기국채(2년 만기)의 수익률을 밑도는 현상이다.

채권의 가격과 수익률은 반비례한다. 채권 수요가 늘어나서 그 가격이 오르면 수익률은 떨어진다. 반대로 수요 하락 때문에 채권 가격이 내리면 수익률은 오른다. 또한 채권은 만기가 길수록 수익률이 높고 가격이 싼 경향이 있다. 잠시 빌려주는 것보다는 오래 빌려주는 돈에 더 많은 이자(수익률)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장단기 금리 역전’은 이런 당연함이 깨졌다는 소리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주체들이 경기 전망을 어둡게 볼 경우,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받는 미국 장기국채가 인기를 끌게 된다. 이에 따라 장기국채의 가격은 오르고 수익률은 떨어진다. 2019년 8월의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은, 경제주체들이 경기를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경제주체들이 장기국채를 너무 많이 사들여서 그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바람에 수익률이 단기국채의 수익률 이하로 떨어질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장단기 금리 역전은 ‘경기침체의 사전 지표’로 통한다. 1978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 국채의 장단기 금리 역전은 총 여섯 차례 발생했다. 이 현상이 발생한 뒤 1~2년 시차를 두고 어김없이 경기침체가 찾아왔다. 2019년 하반기 글로벌 금융시장 곳곳에서 ‘조만간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흘러나왔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위기의 불씨를 댕기는 주인공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2019년까지 글로벌 경제, 특히 주식 등 자산시장은 전반적으로 호경기였다. 과열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2010년 유럽발 재정위기를 겪은 후 전 세계 중앙은행이 10년 넘게 ‘초저금리 환경’을 제공한 덕분이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2008년 1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기준금리를 연 0.25% 정도로 유지했다. 이렇게 기준금리를 낮추면 시장금리 역시 하락해서 대출이 활발해지게 된다. 기업이 저금리로 돈을 빌려 투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실물경제에 활기를 띠게 하려는 목적이다. 전통적 통화정책의 기조다.

그런데 2010년대 미국 연준은 이 ‘전통적인 방식’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금리만 낮춘 게 아니라 세 차례에 걸쳐 ‘양적완화(QE:Quantitative Easing)’라는 수단을 동원했다. 미국·유럽·일본 같은 금융 선진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도 초저금리 상황이었다. 원래 낮은 금리를 좀 더 내린다고 해서 큰 경기부양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정책수단으로 쓸 만한 ‘재료’ 자체가 적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연준이 꺼내든 카드가 바로 ‘양적완화’다. 원래 중앙은행은 시중은행과의 거래를 통해 금리를 내리거나(통화량 증가) 올린다(통화량 감소). 즉, 중앙은행이 시장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당시 연준은 아예 시장의 ‘큰손’이 되기를 자청했다. 연준이 새로 발행한 통화로 시중에 나가 있는 국채·회사채·주식 등의 자산을 매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민간의 경제주체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갖게 되었다.

연준이 이렇게까지 한 것은 대공황이 남긴 역사적 트라우마 때문으로 보인다. 1929년부터 1933년 사이 대공황 여파로 미국 시중 통화량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는데, 돈줄이 끊기자 기업과 가계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때 시중에 돌아다니는 돈(통화량)을 늘렸다면 공황의 여파와 지속 기간을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철학을 따라 ‘이번만은 넋 놓고 바라만 보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인 게 당대 ‘대공황 연구의 1인자’로 불리던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었다.

경기침체 상황에서 돈을 융통하기가 용이해진다는 것은 가계나 기업이 부도를 막을 수 있는 ‘숨구멍’이 생긴다는 의미다. 기업들은 저금리 상황에서 돈을 빌려 공장을 짓고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 이런 투자가 늘면 경제의 활력이 살아난다. 연준만이 아니었다. 힘이 센 화폐를 가진 나라들은 2010년대 들어 양적완화에 하나둘 동참했다. 유럽 중앙은행(ECB)은 2012년 무제한 국채 매입을 천명했고,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2013년부터 ‘아베노믹스’로 명명되는 돈 풀기에 나섰다.

하지만 빌린 돈은 생산적인 분야에만 쓰이는 게 아니다. 낮은 금리는 자산가격이 오를 수 있는 좋은 환경이다. 싸게 빌린 돈으로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큰손인 중앙은행이 채권이나 주식 같은 자산을 매입하면 시장 전체적으로는 해당 자산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그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어떤 회사들은 설비나 인력에 투자하기보다 자사주를 사들였다(자사주를 사들이면 주가 상승을 기대하는 주주들이 좋아한다). 주식시장이 활황을 누렸다. 2009년 3월 6547포인트까지 하락한 다우존스 지수가 팬데믹 직전인 지난해 2월12일엔 2만9551포인트까지 상승했다. 11년 동안 4.5배 정도로 치솟은 셈이다. 버냉키 의장 시절 연준은 시장에 3조 달러가 넘는 돈을 풀었다(그만큼의 자산을 사들였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충격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돈 줄기의 수도꼭지’를 잠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연준뿐 아니라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돈이 풀린 만큼 물가도 인상된다’고 믿었다. 엄청난 돈이 풀렸으니 물가가 엄청나게 오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돈을 푸는 규모를 줄이고, 이차적으로는 풀었던 돈을 거둬들여야 한다.  2013년 6월, 버냉키 의장은 ‘양적완화를 줄이겠다’는 말을 꺼냈다. 곧바로 자산시장이 출렁거렸다. 양적완화 자체도 처음이었지만, 양적완화를 줄이는 것도 당시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중앙은행은 ‘테이퍼링(tapering)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테이퍼링이란 중앙은행이 시중 자산(채권·부동산·주식 등)의 매입 규모를 줄이는 걸 의미한다. ‘매입 중단’이 아니라 ‘매입 규모 감소(돈을 푸는 규모를 줄인다)’에 불과했지만, 시장에서는 ‘큰손이 빠지기 시작한다’며 금리인상을 걱정한다. 은행들도 대출을 옥죄면서 경제 불안을 가중시켰다.

몇 차례 부침을 겪었지만, 실제의 ‘테이퍼링’은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게 진행되었다. ‘저금리 환경’이 극적으로 뒤바뀌진 않았다. 2014년 벤 버냉키의 뒤를 이은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중앙은행이 ‘물가안정’뿐만 아니라 ‘고용’도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었다. ‘물가안정’을 위해 함부로 돈줄을 조이다가 경제위기가 재발하고 고용이 불안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옐런은 ‘충분한 고용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낸다. 이렇게 양적완화를 서서히 퇴조시키면서 경제 충격을 최소화하는 소방수 역할이 옐런에게 부여되었다. 옐런 의장은 2018년 퇴임할 때까지 미국 경제의 실업률을 4.1%까지 낮추고, 다섯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0.25%에서 1.5%까지 조심스럽게 올렸다.

ⓒAP Photo2017년 11월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왼쪽)과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폴 더글러스 시상식에 참석했다.

회복에는 긴 시간이 소요됐다. ‘제대로 회복된 것이 맞냐’는 의구심도 남았다. 금융·재정 위기의 후폭풍으로 2010년대는 ‘로플레이션(Lowflation)’ 시대로 기억된다.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 낮은(로) 시대라는 의미다. 오히려 2010년대의 선진국 경제관료들은 그렇게 돈이 많이 풀린 상황에서도 물가상승이 아니라 디플레이션(물가하락 등 경기침체)을 우려했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저금리와 양적완화로 엄청난 돈을 풀었지만 실물경기가 크게 개선되지는 않았다. 재화와 서비스, 나아가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지 않으니 생활물가와 임금(노동의 가격)도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떨어질 것이 우려되었다. 풀린 돈이 실제 생산이나 소비로 이어지기보다는 금융기관으로 흘러가 자산시장의 과열을 일으킨 것이다. 주가는 뛰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자산시장 폭등과 이에 따른 ‘괴리’는 최근의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제기되던 문제였다. 지금은 ‘괴리’는 좁혀지지 않은 채 폭발에 대한 우려가 커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은 조심스럽게 경제를 어르고 달래는 풍경이 2021년 초에 나타난 ‘괴리’의 ‘전초전’이다. 이렇게 과열되었던 자산시장이 엉뚱한 원인과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된다. 주인공은 바이러스였다.

■ 바이러스가 초래한 붕괴와 회복

지난해 3월, 전 세계 경제지표가 와르르 무너졌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출현과 유가 급락이 불씨를 지폈다. 역사상 손꼽힐 대규모 폭락이 뒤따랐다. 2020년 2월12일 2만9348포인트였던 다우존스 지수는 한 달여 만인 3월23일 1만8591포인트로 급락했다. 한국의 코스피 지수도 2020년 3월5일 2085포인트에서 3월19일 1457포인트로 폭락하는 유례없는 패닉을 경험했다.  

전 세계 금융당국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미국 연준은 다시금 무제한적인 양적완화를 천명했다. 2020년 3월15일 기준금리를 0~0.25%까지 낮췄고, 민간기업들의 채권과 어음(CP)도 매입하면서 시장을 현금으로 폭격했다. 2008~2012년에 이어 역사상 네 번째 양적완화였다. 코로나19로 인한 충격은 경제활동 자체를 중단시켰다. 가장 먼저 쓰러지는 건 경영 사정이 좋지 못한 기업이다. 이런 기업이 무너지면 연쇄적 부도와 대량실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선진국 정부들이 10여 년 전에 개시했다가 서서히 빠져나오려고 했던 ‘돈풀기 정책’에 다시 풀무질을 시작한 배경이다.

한국도 이에 발맞춰야 했다. 한국은행은 2020년 3월26일, 유동성 공급정책을 발표하며 사상 처음으로 ‘한국형 양적완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는 “지금은 2008년 금융위기보다 엄중한 상황이다”라고 정책 배경을 설명했다.

거시경제 역사상 전례 없는 돈이 흘러나왔다. 기존 양적완화와 다른 점은 정부의 재정정책도 동원됐다는 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연준이 양적완화로 퍼부은 돈은 약 3조7000억 달러(약 4070조원)에 달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직후 10개월여 동안 미국 정부는 이보다 많은 약 4조 달러(약 4400조 원)를 재정지출로 투입했다. 새로 취임한 바이든 행정부는 2조 달러(약 2200조원) 규모의 추가 부양책을 앞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월19일 〈월스트리트저널〉은 전 세계 코로나 관련 정부 재정지출이 약 13조 달러(약 1경4300조원)에 달한다고 전했다.  

ⓒ시사IN 이정현

2020년 봄에 시작된 코로나19 위기 국면에서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위협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은 아직까지 금융시장에서 ‘이머징 마켓’으로 불린다. 일종의 ‘금융 개발도상국’ 등급이다. 한국이나 타이완처럼 경제의 개방 정도가 강한 국가는 위기가 닥치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하기 쉽다. 이 때문에 지난해 3월엔 환율부터 들썩였다. 2020년 3월23일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273원까지 치솟았다. 다행히 한·미 통화스와프로 한국은행이 일종의 ‘달러 마이너스통장’을 갖게 되면서 외환시장의 불안을 잠재웠다. 이후 한국 정부는 전 세계적인 저금리·양적완화·재정지출 기조를, 비록 충분하지 못하다고 해도, 쫓아왔다.

지금의 ‘거대한 괴리’는 2020년 봄부터 본격화되었다. 한국의 방역 수준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만큼 사회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그러나 1·2·3차 대유행을 겪으며 전통적인 대면 서비스 자영업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권리금’에 발목이 묶인 자영업자들은 경제적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은 채 버텨야 했다. 서비스직군, 저소득층 임시직부터 사라졌다. 1월13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1년 동안 연간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21만8000명이나 감소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127만여 명 감소) 이래 최대 규모다.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교육서비스업 같은 대면 서비스 분야에서 실업자가 늘었다. 아무리 한국이 수준 높은 방역을 통해 전 세계에서 일자리·경기 방어를 잘했다 하더라도 GDP(국내총생산)의 역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반면 자산시장은 빠르게 회복되면서 코로나19 이전의 지표를 훌쩍 뛰어넘어 버린다. 미국의 다우 지수는 코로나19 충격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 7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코스피 지수는 두 달 만인 5월26일에 2000포인트를 회복한 뒤 2021년 들어서는 3000포인트를 넘겼다.

ⓒ연합뉴스1월7일 한국거래소에서 코스피 3000 돌파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소비를 진작시키고 투자를 늘리는 데 쓰여야 할 시중 유동성이 자산시장에 붙어 있게 되었다. 금융시스템의 문제만은 아니다.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환경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기업의 영업 환경이 개선되지 못했으며, 장사를 벌일 만한 환경도 조성되지 않았다. 돈이 고여 있는 방죽에서 그나마 새어 나오는 물줄기는 인터넷 쇼핑 같은 ‘언택트 산업’으로 흘러나갔다.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엔 은행·보험사가 무너지고 금융시스템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에서는 시스템이 고장 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소비를 할 수 없다. 2008년 금융위기는 정부가 금융회사를 수습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고쳐나갔다. 2020년의 정부는 의학기술로 집단면역을 이루지 못하는 한 경제주체들에게 ‘버티는 삶’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 자산시장에선 전례 없는 강세장이 다시 펼쳐진다.

코로나19가 만든 강세장은 2009~ 2019년과는 조금 성격이 달랐다. 아무도 호텔, 항공사, 여행사 등이 금세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혜를 입는 기업, 사람들의 돈이 몰리는 기업은 극소수 테크 기업으로 좁혀졌다. ‘MAGAT(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애플, 테슬라)’나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으로 불리는 기술 기업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특히 2020년 ‘시대의 아이콘’이 된 기업이 바로 미국의 전기차 회사 테슬라다. 2020년 3월19일 주당 85.51달러(액면분할 이후 가격 기준)였던 테슬라 주가는 1월8일 주당 880달러까지 치솟았다. 10개월 만에 11배가 오른 셈이다.

2020년 경제는 한마디로, ‘현금’을 들고 있는 것 자체가 손해가 되는 시기였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국은 그 정도가 매우 도드라졌다. 2020년 3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여행·항공·숙박 서비스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대다수 산업군의 주식이 팬데믹 이전 가격을 상회했다. 코스닥 지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시장으로 평가받았다. 2020년 3월19일 428.35포인트였던 코스닥 시장은 2021년 1월7일 988.86포인트로 치솟았다.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경제활동이 꽁꽁 묶인 상황에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전례 없던 방식으로 돈을 풀었다. 일단 ‘살포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부도를 막고 일자리를 지켜야 바이러스를 퇴치한 이후 국가경제의 회복을 도모해볼 수 있다. 그때까지는 돈을 살포하며 버티기라도 해야 한다는 게 ‘합의된 질서’였다. 하지만 2021년 과열된 자산시장을 마주하며 동시에 논의되는 것이 바로 ‘머니 무브(Money Move)’다. 머니 무브는 자산시장에 있는 돈이 실물경제로 향하게 된다는 의미다.

ⓒ한국은행 제공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1월15일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 참석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2021년의 화두, 인플레이션은 오는가

2020년에 세계가 겪은 대규모 ‘현금 살포’는, 1980년대 이후 ‘주류 경제학’으로는 나오기 힘든 처방이었다. 당시의 주류 경제학과 정부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었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물가는 통화량 증가만큼 오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20년까지 살포된 현금들은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못했다. 다만 백신이 보급되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서서히 퇴조할 2021년부터 경제활동 재개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돌아올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문제는 2021년 초 현재 대다수 국가의 실물경제가 여전히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질병을 통제했다고 자평하는 중국, 상대적으로 빠른 방역으로 경제활동이 유지되었던 한국·타이완을 제외하면 여전히 경제활동은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물가상승(인플레이션) 자체는 듣기 좋은 소식일 수 있다. ‘머니 무브(금융→실물)’가 실제로 이뤄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앙은행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중앙은행의 가장 큰 임무는 물가를 잡는 것이다. 그런데 고용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만약 물가를 잡으려고 금리를 올리면 고용은 어떻게 될까? 혹은 물가상승을 그냥 놔둔다고 고용이 정상화될 수 있을까?

일단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 실제로 벌어질 것인가’라는 논쟁부터 정리해보자.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댄다. 전례 없는 재정·통화 정책으로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고, 사람들은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돈을 쓰기 위해 벼르고 있으며(이전 수요), 물가의 근간이 되는 에너지·원자재 가격이 상당히 올랐다는 것이다. 특히 구리·니켈·대두 등은 투기적 수요까지 몰리면서 가격이 급상승했다. 물가가 상승할 경우 화폐는 물론 주식 같은 자산의 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에 일종의 위험 대비(인플레 헤지) 수단으로 원자재를 찾는 이들이 늘어서다.

하지만 물가상승에 대한 걱정이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여기는 측은 ‘코로나19가 그렇게 만만한 위기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일시적인 물가상승이 찾아올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물가가 계속 오를 가능성은 예상보다 낮다는 인식이다. 무엇보다 일자리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다. 백신 확대 이후 경기가 살아난다 해도 고용은 여전히 불안할 가능성이 크다. 2010년대 이후 발생한 사회적 변화도 고민거리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대면 서비스 상당수가 비대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통분야에서는 그 변화가 극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일상 속 생산과 소비가 2019년 수준으로 바로 복귀하긴 어렵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백신 직후 일시적인 물가상승이 다가올지 몰라도, 지금 돈을 뿌려둔 것 때문에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기란 어렵다는 관측이다.

미국 연준이 경기회복에 따른 단기적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을 어느 정도 용인하겠다는 의사도 밝힌 바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해 8월27일 잭슨홀 회의 연설에서 “연준의 새로운 전략은 ‘유연한 형태의 평균물가목표제(Flexible Form of Average Inflation Targeting)’다”라고 말했다. 과거 연준은 물가상승률을 억제하는 상한선을 2%로 잡고, 매 시점 가이드라인인 2%를 넘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물가상승률이 목표 수치를 위협하면 금리인상을 단행한다. 그러나 이제는 ‘특정 기간에 걸쳐 평균적으로’ 2% 정도 물가가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는 의미다. 가령 올해 물가가 3% 넘게 상승했다고 치자. 연준의 원래 규범대로라면 ‘올해 물가상승률이 2%를 넘겼으니 금리인상을 바로 단행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물가가 많이 떨어져 ‘특정 기간(지난해와 올해)’의 평균적인 물가상승률이 2% 이하라면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직된 가이드라인에 따르지 않고 경제가 본궤도에 오르기까지 일시적인 물가 급상승은 용인하겠다는 의미다.

물가상승은 저축과 연금, 주식 등 자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가령 삼성전자 주식이 8만원에서 8만5000원으로 오른들, 물가가 10%가 뛰면 주식의 실질적 가치도 하락해 결국 손해를 입게 된다. 자산 상승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인플레이션을 계속 걱정하는 이유다.

ⓒAP Photo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2020년 3월3일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전격 인하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파티는 계속될 것인가

2020년 각국 중앙은행은 자산시장 참여자들의 환호를 에둘러 무시했다. 자산 유무에 따른 격차가 점차 커졌지만, 당장 경제를 무너뜨려 실업자를 쏟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유동성 파티가 벌어지는 와중에 자산시장 참여자들은 슬슬 중앙은행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린다면, 순식간에 버블은 사그라들고 가격은 하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3년의 벤 버냉키처럼 ‘돈을 줄이겠다는 신호’만 시장에 보내도 경기는 출렁이게 된다. 최근 금융시장은 연준의 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앞서 설명한 ‘테이퍼링(양적완화를 통한 자산 매입 축소)’을 언제 시작할 것이냐는 질문이 뒤따른다. 비유하자면 연준은 현재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튼 다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수도꼭지를 잠그기 위해 조금씩 발걸음을 떼는 것만으로도 시장이 반응할 만큼 자산시장이 과열되어 있다. 양적완화 환경에서 자산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힐끔힐끔 중앙은행의 몸짓을 살피고 있다. 중앙은행이 잠시 시계를 흘깃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장이 움찔거리는 게 최근 시장의 경향성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은 혹여 유동성 공급을 줄일 때에는 미리 신호를 주겠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낸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1월14일 프린스턴 대학이 주최한 온라인 간담회에서 “출구전략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금리를 올려야 할 때가 되면 분명히 그렇게 하겠지만 당분간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가상승(인플레이션) 우려에 대해서도 “한 번의 가격 상승은 그리 크지도 지속되지도 않는다”라고 답했다. 자산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파월 의장의 ‘신호를 보내겠다’는 메시지에 주목한다. 파월 의장은 “점진적인 자산 매입 축소의 시작을 고려하기 전에 매우 명확히 대중과 소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테이퍼링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는 시그널을 미리 주겠다는 의미다. 수도꼭지를 향해 발을 내밀기 전에 미리 ‘나 지금 한 발짝 옮길 거야’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과연 과열된 자산시장을 이대로 보고만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만만찮다. 실물경제로 돈이 충분히 옮아오기 이전에 자산시장에서 버블이 터진다면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경기는 지금 당장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경제주체가 ‘어떤 예상을 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2021년 1월 현재를 축약하자면 모두가 자산시장이 과열되었다고 인식하고, 언제 수습책이 나올지 긴장하는 상태다. 대규모 재정정책으로 인한 국가부채도 문제시되고 있지만 ‘나중 일’로 치부된다. 물론 코로나19가 수습된 뒤에는 본격적으로 ‘증세 문제’도 언급될 것으로 전망된다.

적어도 정부와 중앙은행은 부채 문제를 터뜨리지 않는 선에서 ‘거대한 괴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발생한 자산 불평등을 금융시스템을 통해 회복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백신이 확대되기까지 정부와 중앙은행이 우선시하는 것은 고용 충격이 최소화되도록 시간을 버는 일이다. 다만 2021년에 2020년 같은 자산시장 폭등을 경험할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서로가 눈치를 보며 중앙은행의 ‘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괴리를 좁히기 위한 연착륙은 2010년대만큼이나 섬세하고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될 것이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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