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20년 11월11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30일 집중 행동 선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드디어 차별금지법 제정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다. 국회에서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대표 발의로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었고, 국가인권위원회는 평등법 예시 법안을 발표했다. 조만간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평등법안도 발의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국회의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것은 여러 차례였으나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된 적은 없었다. 국회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갈지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 어차피 입법을 위해서는 ‘정치 과정’을 피할 수 없다. 아니, 차별금지법이야말로 정치라는 무대에서 제대로 논의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단순히 국회의 형식적 입법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평등이 무엇이고 차별이 왜 금지되어야 하는지 치열하게 논의하고 토론하면서 그 의미를 확인하는, 그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사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도 즉각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이 법이 세상을 뒤바꿀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런 우려가 무색하게도 차별금지법에는 그렇게 무지막지한 위력을 가진 강제조치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당장 세상의 온갖 차별이 근절되고, 차별하는 사람들이 죄다 처벌받는 것도 아니다. 의도적이고 노골적인 차별은 차별금지법 없이도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고, 은밀하고 미세한 차별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도 쉽게 손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목 놓아 외치는 이유는 이 법을 통해 어떤 계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고 인권의 가치도 사회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나 차별금지의 원칙은 간과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차별금지 원칙을 ‘정치적’으로 확인해야 하며, 그 원칙을 바탕으로 사회 곳곳의 여러 제도와 관행들을 하나하나 바꿔나가야 한다. 평등과 차별금지는 헌법상 대원칙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원칙을 법률 수준에서 재확인하고 포괄적·체계적으로 이행 계획을 제시한 바는 없다. 더 이상 주저하거나 늦출 과제가 아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혐오와 차별이 우리 사회의 안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생생하게 확인된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차별금지의 원칙을 천명할 절호의 기회다.

“나중에”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법적 확인은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혐오와 차별에 관한 각종 국제규범이나 지침들은 정치와 정치 지도자의 역할을 크게 강조한다. 정치가 차별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는 그 사회의 상태를 진단하는 시금석이다. 정치는 혐오와 차별을 극단적인 폭력으로 부추기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AFP PHOTO2019년 1월19일 여성행진 시위대가 워싱턴 D.C. 연방의회 의사당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근래에도 세계 곳곳에서 참조할 만한 사례들이 나타났다. 2016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이주자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 정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데 능한 인물이다. 그의 당선으로 혐오 세력은 더욱 고무되었다. 미국 FBI 통계에 따르면, 2014년 5479건이었던 혐오범죄(hate crime) 발생 건수가 서서히 증가하더니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인 2017년과 2018년에는 각각 7000건을 훌쩍 넘어섰다. 미국 남부빈곤법률센터(SPLC)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일 직후 단 6일 동안 증오에 기반한 괴롭힘·협박 건수가 437건에 달했으며, 2015년 892개였던 미국 내 혐오 단체(hate group)의 수가 2018년엔 1000개를 돌파했다. 거의 같은 시기인 2016년 영국에서는 느닷없이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영국의 자유와 이익을 수호하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지만, 영국 내 이주자에 대한 불만과 혐오에 편승한 몇몇 정치인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영국에서도 브렉시트와 함께 혐오범죄가 급증했다. 잉글랜드·웨일스에서 경찰에 신고된 혐오범죄 건수는 2014년 4만 건 정도였으나 2016년, 2017년 즈음에는 각각 6만 건, 7만 건을 돌파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베 총리는 극우세력의 준동을 암묵적으로 응원하거나 침묵해왔고, 실제로 그의 장기 집권은 외국인을 혐오하는 세력들이 세를 넓혀가는 데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반대 사례도 있다. 독일의 경우, 신나치즘을 표방하는 극우 세력이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지난 선거에서는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상당한 득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건전한 보수로서 “혐오는 독일에서 설 자리가 없다”라고 강조하며 이주자·난민 포용정책을 펼쳐온 메르켈 총리의 존재가 극우세력의 준동을 막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에서도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통합진보당 해산 등 꾸준히 ‘종북 세력’ 척결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특정한 정치적 색깔을 가진 사람들을 ‘절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2014년에는 일베 이용자로 알려진 한 고교생이 이른바 ‘종북 콘서트’에 인화물질을 투척하는 사실상의 테러가 발생했다. 종북 세력은 그런 꼴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안 된다”라는 대통령의 입장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며칠 뒤 대통령은 “소위 종북 콘서트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우려스러운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침묵하거나 묵인하는 수준을 넘어 사실상 테러를 엄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2014년 일베 이용자들이 오프라인에 등장해, 단식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 농성을 벌이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혐오와 차별이 정치 지도자의 엄호 아래서 더욱 노골화한 것이다. 이런 흐름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은 2016년 촛불시위로 박근혜 정부가 물러나고 정권이 교체될 때쯤부터였다. 만약 그때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어떻게 더 벌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부는 혐오와 차별의 흐름을 뒤바꿔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재임 4년을 뒤돌아보면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형식적이긴 했지만) 국정·정책 과제로 올라 있었던 차별금지법 제정이 문재인 정부에서는 완전히 삭제되었다. 성소수자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외침에 대해 문 대통령 후보 측의 답은 “나중에”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나중을 기약해보자’는 바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거라는 민감한 시기를 지나 안정적으로 집권하고 나면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나중’은 아직까지도 찾아오지 않았다. 차별금지법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다. 차별금지 ‘정책’은 현행법 체제하에서도 정부 정책으로 얼마든지 추진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시도라도 해본 것이 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연합뉴스2018년 9월4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최영애 신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함께 환담장으로 향하고 있다.

종교기관은 차별해도 괜찮아?

그래도 코로나19 발발 이후에 나온 정치적 메시지들은 긍정적이었다. 총리, 장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나서서 ‘혐오와 차별은 안 된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혐오와 차별이 방역에 도움이 안 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겠지만, 그래도 정치지도자들의 입에서 혐오를 반대하는 메시지가 일관되게 나온 것은 긍정적인 일이었다. 지난 12월 문재인 대통령은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차별 문제에 적극적 대응이 필요하다”라면서, 차별금지법과 관련하여 “국회에서 활발하게 논의하면서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를 넓혀가길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국회의 일로만 떠넘기는 듯한 뉘앙스가 아쉽기는 했지만 긍정적인 신호임은 분명하다.

한편 민주당 의원들이 준비하는 차별금지법안(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에 이른바 ‘종교 예외 조항’을 넣는다는 소식은 유감이다. 사실 기존의 차별금지법안에서도 종교 고유의 활동은 규제 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예외인 것을 굳이 조문으로 확인하는 것이 형식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이 종교 예외 조항이 주는 ‘효과’가 문제다. 한국은 형식적으로는 종교 중립적인 세속국가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종교가 수많은 대학, 초중고교, 의료기관,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힘을 가지고 있다. 종교계의 헌신과 봉사는 존중되어야 마땅하지만 그걸 빌미로 차별을 용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종교 예외 조항이 자칫 ‘종교기관은 차별해도 괜찮아’라는 ‘면허’를 발급해주는 모양새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이제 우리 정치가 성숙한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다수의 의사로 운영되지만 소수에 대한 차별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의 위대함이다. 촛불항쟁의 성과가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이어진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함과 성숙함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의 여러 아쉬움을 털어내고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한국 사회가 혐오와 차별과 결별한다는 점을 ‘정치적’으로 확인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다.

※ 이번 호로 ‘홍성수의 굿바이 차별’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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