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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우리를 어떻게 바꿔놓았나? 2020년 5월, 〈시사IN〉과 KBS는 이 거대한 질문에 답을 찾는 공동기획을 꾸렸다. 서울대 사회학과 임동균 교수, 여론조사 전문업체 한국리서치와 공동으로 228문항 웹조사를 설계해 5월에 조사했고, 6월에 세 차례 연속 보도했다.
반년이 흘러 2020년 11월, 〈시사IN〉과 KBS는 다시 대규모 웹조사를 했다. 261문항을 썼다. 같은 문항으로 일본에서도 조사했다. 일본 조사의 문항 수는 239개, 조사 업체는 라쿠텐인사이트다. 〈시사IN〉 제692호에서 1부를 보도했고, 이번 호에서 2부를 보도한다.

1부에서 우리를 가장 심란하게 했던 결과로부터 다시 출발하자. 〈그림 1〉은 한국과 일본 조사에서 가장 극적인 대조를 보여준 데이터다. 코로나19 재난으로 피해를 본 집단을 제시하고, 이들을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을 비교했다. 일본에 비해 한국은 일관되게 지원 성향이 낮다. 자영업자를 “적극 지원해야”라는 응답(“전적으로 지원”과 “상당 부분 지원”을 합친 값이다)은 45%다.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구직자, 중소기업 등 다른 취약집단은 그보다도 낮다. 한국은 코로나19 재난 피해자들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절반을 밑도는 나라다. 일본은 일관되게 더 관대하다.

11월 조사 결과는 5월 결과보다도 나쁘다.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성향을 비교해보면, 5월 대비 11월에 12~21%포인트 하락했다. 숫자가 보여주는 경고는 분명하다. 우리는 이웃 나라보다 재난 피해자에게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경향이 원래 더 센 데다, 재난이 길어질수록 더 강해졌다.

이것은 왜 주목해야 할 신호인가. 재난은 속성상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끌어올리며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지키는 일에 참여하면서, 시민들은 공적으로 중요한 일을 한다는 고양감을 느낀다. 1997년 외환위기 시절에 한국인들은 ‘금모으기 운동’으로 출발했다. 재난기에 고양감은 사람들을 서로 돕도록 하는 힘, 연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재난이 길어지고, 연대가 연대로 보답받지 못할 때, 일은 잘못된 방향으로 굴러간다. 1997년 외환위기는 결국 대규모 실직 사태와 고용 한파로 ‘잃어버린 세대’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일시적인 후퇴로 그친 게 아니라 생애 내내 불안정 노동시장에 머무를 확률이 더 높았다. 이걸 직간접으로 경험한 한국인들은 한번 탈락하면 공동체가 구제해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정한울 한국리서치 전문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한 세대 동안 ‘각자도생’이 한국의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KBS 〈1박2일〉은 2000년대 최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초창기 대표 유행어가 “나만 아니면 돼!”였다. 재난이 남긴 각자도생의 교훈은 예능 프로그램에도 흔적을 남겼다.

코로나19 재난도 고양된 연대의식으로 출발했다. 5월 조사에서 시민들은 강한 국가 자부심과 고양된 시민의식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게 한국의 방역 성공을 이끄는 힘이었다(〈시사IN〉 제663호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의외의 응답’ 참조). 하지만 반년이 지나는 동안, 연대는 연대로 보답받지 못했다. 11월 조사는 각자도생이 다시 시대정신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덕진 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 한국인들이 지원 성향도 낮고,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도 일본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위험에 더 민감한 성향은 코로나19 말고도 일관됩니다. 다른 위험, 이를테면 광우병 같은 위험도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보다 민감해요. 한국은 위험에 ‘당첨’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각자도생 사회인데, 이러면 위험에는 더 민감해지고, 지원 성향은 더 인색해집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위험에 더 민감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 방역에 더 몰입한다(이게 1부의 주제 중 하나였다). 그래서 방역전을 더 잘 치러낸다. 하지만 그 위험 민감성은 각자도생 사회라는 토양에서 왔다. 이 토양은, 재난에 ‘당첨’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을 더 인색하게 만든다. 그 결과로, 재난 과정에서 연대가 작동할 공간이 좁아진다. 재난이 각자도생의 교훈을 남길 확률이 다시 올라간다. 이 악순환은 마치 외환위기가 남긴 교훈처럼 재난 이후의 한국 사회를 더 나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이 악순환의 입구에 있다.

탈출구가 없을까. 분석을 총괄한 임동균 교수(서울대 사회학과)와 함께 응답자들의 ‘마음’을 더 깊이 해부해봤다. 우리는 여러 문항을 사용해서 응답자들의 권위주의, 자유주의, 수평주의, 개인주의, 집단주의, 시민성 등 여러 사회심리적 성향을 측정했다. 이 중에 어떤 변수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따져봤다.

우리가 분석한 ‘좋은 결과’란 셋이다. 첫째, 방역 참여에 얼마나 적극적인가. 이것은 한국의 방역 성공을 이끈 힘을 묻는다. 둘째, 지원 성향이 얼마나 관대한가. 이것은 각자도생보다 연대의 원리로 사회를 이끄는 힘을 묻는다. 셋째, 코로나19 피해자를 돕기 위해 ‘내 세금’을 올린다면 찬성하겠는가. 이것은 연대를 위한 비용을 감당할 의사를 묻는다. 이 셋이 갖춰질수록, 우리 사회는 감염병을 더 잘 통제하는 동시에, 재난의 피해자들을 더 잘 돌볼 수 있을 것이다.  

분석 결과는 놀라웠다. 모든 ‘좋은 결과’를 전부 끌어올리는 변수가 하나 튀어나왔다. 임동균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굉장한 놈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그 변수를 이름조차 없이 그저 ‘듀티 1(Dut y1·의무 1)’이라고만 불렀다. ‘듀티 1’은 마치 성배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그래프를 우상향으로 끄집어 올렸다. 이럴 때 연구자들은 “별이 뜬다”라고 표현한다. 통계적으로 유의하다, 그러니까 두 변수가 관계 있다는 결과가 뜬다는 의미다. ‘듀티 1’은 사실상 모든 ‘좋은 결과’에 대해 우수수 별이 떴다.

‘듀티 1’이란 무엇인가. 〈그림 2〉 하단의 8개 문항은, 우리가 ‘시민적 의무감’을 측정하기 위해 던진 것이다. 각각의 문장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봐서 측정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사회심리적 성향을 측정하는 ‘문항 세트’가 꾸려진다. 그런데 임 교수는 시민적 의무감 결과를 분석하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통계분석을 해보면, 응답자들의 태도가 1~3번 문항과 4~8번 문항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시민적 의무감도 두 종류가 다른 효과를 낸다는 겁니다.” 그는 4~8번 문항을 임시로 ‘듀티 1’으로, 1~3번 문항을 ‘듀티 2’로 불렀다. 그게 분석 과정 내내 우리의 용어가 되었다.

1~3번 문항은 주로 공적제도와 관련된 시민적 의무를 다룬다. 여기서는 공적제도와 나의 관계가 중심이다. 4~8번 문항은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는 나와 동료 시민들의 관계가 중심이다. 즉, 시민적 의무감을 느끼는 대상이 다르다.

‘듀티 1’은 우리의 핵심 키워드를 떠올리게 만든다. 연대다. 동료 시민들과 함께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민이란, 곧 ‘연대적 시민성’을 더 많이 가진 시민이다. 우리는 이 “별이 쏟아지는 변수”를 ‘연대적 시민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반면 ‘듀티 2’는 공적제도에 대한 시민적 의무감을 보여준다. 이것을 우리는 ‘법제도 시민성’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좋은 시민이란 무엇인가

〈그림 2〉의 그래프들은 두 시민성이 ‘좋은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준다. 연대적 시민성(〈그림 2-1〉)이 높을수록(오른쪽으로 갈수록), 방역 참가, 지원 성향, 세금을 더 내겠다는 의사 셋을 다 위로 끌어올린다. 셋 다 통계적으로 유의하다. 연대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방역에 열심히 참여하고, 지원에 관대하고, 세금 인상마저 받아들인다.

연대적 시민성의 위력을 직관적으로 보기 위해 〈그림 3〉을 그려봤다. “코로나19 피해자를 돕기 위해 정부가 내 세금을 올린다면 찬성하겠다”라는 응답은 전체로 보면 29%다. 아주 인기가 없는 질문이다. 연대적 시민성 점수에 따라 응답자를 상중하 세 그룹으로 나눴다. 연대적 시민성이 높은 그룹에서는 찬성 응답이 45%가 나온다. 중간 그룹에서는 23%, 낮은 그룹에서는 15%다. 다른 어떤 변수도 ‘좋은 결과’에 이토록 강력하고 일관된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시민적 의무감의 또 다른 종류인 법제도 시민성은 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그림 2-2〉). 방역 참가와 세금을 더 내겠다는 의사는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다. 지원 성향은 오히려 역의 관계다. 법제도 시민성이 높을수록 지원 성향은 낮아진다.

연대적 시민성은 ‘좋은 결과’뿐만 아니라 ‘좋은 태도’도 모조리 끌어올린다(〈그림 4-1〉). 타인에 대한 신뢰, 이웃에 대한 믿음, 약자·타자에 열린 감정, 호혜성 믿음(내가 선하게 대하면 타인도 나를 선하게 대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모두 별이 뜬다. 법제도 시민성은 이런 효과가 없다. 넷 다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다(〈그림 4-2〉).

“진짜 재미있는 건 그다음입니다.” 임동균 교수가 〈그림 5〉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흔히 의무와 권리를 반대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적 의무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좀 국가주의 냄새가 나서 거부감이 들죠. 그런데 연대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들은 시민적 권리의식도 높고, 시민적 참여 성향도 높습니다. 의무, 권리, 참여가 한 묶음으로 간다는 얘깁니다.”

권리의식도 통계분석을 해보면 두 묶음으로 갈린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기본적 권리의식이 있고, 범죄자나 외국인처럼 권리를 보장받기 어려운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사회적 시민권 의식이 있다. 연대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들은 두 권리의식이 모두 높다(〈그림 5-1〉). 그런데 법제도 시민성이 높은 사람들은, 기본적 권리의식은 따라서 높아지지만, 사회적 시민권 의식은 오히려 낮아진다(〈그림 5-2〉). 공적제도에 대한 시민적 의무감은, 취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마음과 같이 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권리와 같이 가는 마음은 연대적인 의무감, 동료 시민들에 대한 의무감이다.

이것으로 우리가 찾아낸 성배의 효능을 확인했다. 연대적 시민성은 ‘좋은 결과’와 ‘좋은 태도’를 모두 끌어올린다. 심지어 의무와 권리라는 이분법마저 뛰어넘는다. 연대적 의무감이 높은 사람들은 시민적 권리에 더 민감하다.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좋은 시민이 많은 사회다. 좋은 시민이란 누구인가? 동료 시민들에 대해 연대적 의무감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들이다. 다른 어떤 변수보다도, 연대적 의무감이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결정적 변수라고 데이터는 보여준다.

장기적으로 사회가 더 좋아지는 비밀도 연대를 어떻게 확장시키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 데이터는 이 외에 다른 경로는 장기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시사한다. 임동균 교수는 ‘마스크에 대한 태도’에서 흥미로운 경향을 찾아냈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는 이유’로 여러 문장을 제시하고 동의하는 정도를 측정했다. 그중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맞기 때문이다.” 이에 동의하는 정도가 강할수록, 지원 성향이 낮아졌다. 그러니까 피해자들을 정부가 도와야 한다는 비율이 낮았다.

‘사회적 압력’은 한국의 방역 참여를 설명하는 유력한 경로로 제시되곤 했다. 한국의 강한 눈치 보기 문화 때문에 방역이 잘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사회적 압력’에 더 세게 반응하는 사람들일수록(“눈총 맞기 싫어서 마스크를 쓴다”),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식은 낮아진다. 각자도생으로 빠지는 경로다. 이 ‘사회적 압력’ 경로는 단기적으로 방역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다. 방역을 작동시키면서도 각자도생으로 빠지지 않는 좋은 시민의 열쇠는 연대적 시민성이 쥐고 있다.

좋은 시민은 무골호인과는 다르다. 좋은 시민은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 이런 식의 이분법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제3의 꼭짓점’이다. 좋은 시민은 개인이 자유롭고 싶어 하지만, 간섭이 없는 고립 상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내가 자유로우려면 좋은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공동체가 있어야 나의 자유가 지켜진다. 연대적 시민성이 묘사하는 사람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내가 자유롭기 위해 좋은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민’이다. 코로나19 재난기는 이 좋은 시민의 원칙을 체감하도록 만들어준다. 팬데믹 시기에 건강은 나 자신의 노력에만 달려 있지 않다. 좋은 공동체가 나의 건강을 지키는 핵심 자원이다. 따라서 나도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데 투자해야 한다. 이런 걸 한 단어로 바꾸면, 연대다.

연대는 동료 시민들을 서로 돕는 일이지만, 자선과는 거의 정반대일 만큼 다르다. 자선이 시혜적이라면, 연대는 상호 의무로 묶인 관계다. 자선이 누군가의 불행을 안타깝게 여기는 접근이라면, 연대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공동의 노력이다. 내가 몇 살까지 살지는 근본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사회는 평균수명을 계산할 수 있고, 따라서 노인복지에 쓸 비용을 계산하고 대응할 수 있다. 그게 연금이다. 내가 암에 걸릴 위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암 환자에게 어느 정도 비용을 써야 할지는 계산하고 대응할 수 있다. 그게 건강보험이다.

위험은 개인에게 닥치면 숙명이지만,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대응하면 ‘계산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무엇’이 된다. 위험에 개인이 대비하도록 내버려두면, 위험을 감당하지 못하는 시민이 속출할 것이다. 미국의 의료보험 체제가 이런 문제를 안고 있어서 건강 위험이 치명적 결과로 이어진다. 세계 최강대국도 연대의 실패를 돈과 기술로 만회하지 못한다. 위험이 숙명이 될 때 인간은 의존적이 된다. 위험을 계산하고 대응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연대는 위험을 관리 가능하게 만들어 함께 자유로워지는 전략이다.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월14일 청와대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12월에야 나온 대통령의 답

그래서 연대의 원리는 보험과 비슷하다. 연대는 위험에 ‘당첨’되는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이고, ‘당첨’될 확률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하나의 보험체제로 함께 손잡는 원리다. ‘당첨’되지 않은 사람들도 비용을 낸다. 하지만 그는 손해를 본 게 아니라, 위험을 관리한다는 공동의 프로젝트에 투자하여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산 것이다. 시민들이 이런 합의를 만들어내도록 이끄는 게 연대의 정치다. 특히, 위험에 ‘당첨’될 확률이 낮은 시민도 이 공동의 프로젝트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게 연대의 정치다. 이게 실패하면, 시민들은 내가 위험에 ‘당첨’되지 않았으니 비용을 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미끄러진다. 각자도생이다.

복지국가 모델을 선도한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1950년대에 일찍이 이런 인식에 도달했다. “개인의 해방은 사회안전망에 좌우된다. 사회안전망이 있을 때에만 모든 사람의, 특히 변화에 취약한 사람의 자유, 기회, 역량이 보장된다.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이들의 연대에 달려 있다.” 북유럽의 이 지독한 개인주의자들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사회,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연대를 사회의 작동원리로 끌어올렸다.

이제 재난이 공동체를 연대와 각자도생의 갈림길에 세운다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재난은 공동체를 덮치는, 차원이 다른 위험이다. 연대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은, 사회 전체가 이 위험을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의미다. 이럴 때 위험에 ‘당첨’된 사람들은 연대라는 보험 원리의 도움을 받아 버텨낸다. 불쌍해서 자선을 받는 게 아니다. 반대로 각자도생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은, 위험에 ‘당첨’된 사람들이 속절없이 낙오한다는 의미다. 이러면 낙오된 사람들이나 그걸 지켜본 생존자들이나 각자도생의 원리를 내면화한다. 이게 우리가 1997년 외환위기라는 재난에서 선택한 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다시 이 길로 미끄러지는 중이라고 데이터는 경고한다.

좋은 시민은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핵심 자원이다. 하지만 과연 핵심 자원답게 희소해서, 여론 전체를 ‘좋은 결과’로 끌어당길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좋은 시민이라 해도, 각자도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 홀로 연대에 나설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일본과 비교해 낮은 지원 성향은 그 결과다. 결론은 간명하다. 연대가 연대로 보답받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연대가 사회 전체의 작동원리로 확장될 것이다. 이 열쇠는 정치가 쥐고 있다. 위험을 사회 전체가 나눠 드는 공동의 노력을 만들어내는 책임, 위험에 ‘당첨’되어도 보호받는 경험을 만들어내는 책임. 이게 재난기 정치의 몫이다. 이게 될 때만 좋은 시민들도 연대에 마음 놓고 나설 수 있다.

출발은 좋았다. 봄과 여름의 방역 성공은 사령탑인 정부에 대한 신뢰를 한껏 끌어올렸다. 연대의 원리를 작동시킬 정치적 자원이 쌓였다. 방향도 잘 잡았다. 6월9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습니다. 위기를 불평등을 줄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상생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위기 극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름의 안정기 동안 정치는 연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위험 분산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코로나19 재난기에서 자영업자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무기를 가동하느라 피해를 본 희생자다. 유행이 돌아오면 위험에 ‘당첨’될 것이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지난 12월14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라 영업이 제한 또는 금지되는 경우 매출 급감에 임대료 부담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인지에 대한 물음이 매우 뼈아프게 들립니다.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약자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고통의 무게를 함께 나누고 정부의 책임과 역할을 높여 나갈 방안에 대해 다양한 해법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받은 질문을 우리의 용어로 바꾸면, 연대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그걸 위해 정치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대통령은 이 질문이 “매우 뼈아프게 들린다”라고 12월에 말했다. 이 질문은 봄부터 나왔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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