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원 제공최재원씨(왼쪽)는 대화, 여행, 명상 등을 제공하는 휴식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30대였다. 잦은 이직으로 토막 난 이력서와 텅 빈 통장만 남아 있었다. 최재원씨는 대학 졸업 뒤 광고회사와 음반기획사 등을 다녔다. 온 마음을 다해 일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다짐했다. 앞으론 가고 싶은 길이 생겨도 모든 걸 걸고 ‘유턴’하지 않겠다고. ‘지금의 길을 묵묵히 가면서 다른 방식으로 어려움을 돌파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작게, 부담 없이, 좋아하는 걸 시작했다. 숙소 공유 플랫폼 ‘에어비앤비’를 통해 외국인 여행객을 만났다. 그에게 ‘숙소 호스트(숙소 제공자)’라는 ‘부캐’가 생겼다.

부캐. 게임에서 사용하던 용어다. 본래 사용하던 캐릭터 이외의, 부캐릭터를 의미한다. 지난해 대중문화 트렌드를 요약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래퍼 매드클라운이 눈코입만 드러내는 비니를 쓰고 ‘마미손’이라고 시치미를 뗀 게 시작이었다. 코미디언 유재석은 트로트 가수 ‘유산슬’과 남녀 혼성 댄스 그룹 싹쓰리의 ‘유두래곤’으로 활동하며 부캐를 각인시켰다. 제2의 자아를 일컫는 부캐라는 용어가 일상에서까지 폭넓게 활용되었다.

퇴근한 뒤 요가 강사로 활동하거나 글쓰기 플랫폼에 에세이를 연재하는 직장인에겐 요가 강사와 작가가 부캐다. 요가와 글쓰기 자체를 ‘사이드 프로젝트 (Side Project)’라 부르기도 한다. ‘생업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의미다. 비유하자면, 메인 메뉴를 주문해야 시킬 수 있는 사이드 메뉴다. 가끔 사이드 메뉴가 먹고 싶어서 메인 음식을 주문하는 것처럼 관계가 역전되기도 한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한 숙소 호스트라는 정체성이 최재원씨의 인생을 바꿨다. 투룸짜리 집의 방 하나를 내주었다. ‘여행을 못 가는 워커홀릭 직장인에게 매일 밤 여행지의 기운이 제 발로 찾아왔다.’ 이들과 나누는 수다가 일상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힘을 빼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더니 그게 캐릭터가 되었다. 퇴근한 뒤 갈 수 있는 재밌는 놀이터가 있다고 생각하니 회사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 균형감이 좋아 기록이라는 형태로 스스로에게 선물을 하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사진과 글을 남겼다. 외국인과 소통하는 그를 보고 회사에서 해외 업무를 맡겼다. 얼마 뒤 그는 숙소 호스트를 본업으로 전환했다. 현재는 대화, 여행, 명상 등을 제공하는 휴식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다. 최근 자신의 경험과 사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을 담은 책 〈나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를 펴냈다.

사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정의는 개인마다 다르다. 자기계발 시장에선 일찍이 부업의 의미로 통용되었다. 소자본 창업에 성공한 사람들을 취재해 책으로 출간한 미국의 사업가 크리스 길아보도 이 점을 강조한다. 호텔 청소부이던 저소득층 워킹맘이 온라인 제빵 강좌를 개설해 억대 수입을 올리거나 TV 프로듀서가 핸드메이드 스카프 브랜드를 만들어 성공을 거둔 사례를 소개하는 식이다. 반면 최재원씨는 즐거움에 방점을 찍는다. “틈새 시간을 활용해 돈을 버는 게 부업이라면 사이드 프로젝트는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에 가깝다. 하나의 정체성을 갖고 사느라 넣어두었던 제2의 페르소나를 꺼내는 거다. 결과적으로는 부업이 될 수도 있겠지만 펼치지 못한 가능성과 재미에 주목한다.”

ⓒ윤이나 제공회사 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요가를 시작한 윤이나씨는 지난해 요가 강사 자격증을 땄다.

부캐가 본캐의 정체성을 앞지르기도

최근 몇 년 최씨처럼 회사 밖의 자아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멀티 페르소나(다중적인 자아)’라는 말이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상황에 맞게 가면을 바꿔 쓰듯 시공간과 역할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현대인을 의미한다. 새로운 얘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부캐, 사이드 프로젝트는 최근 생긴 말이지만 취미, 딴짓, ‘N잡(여러 개의 직업)’ 등 비슷한 단어가 쓰여왔다. 어떤 것을 새로 도모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영향으로 퇴근이 빨라지자 여가나 자기계발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원데이 클래스’도 인기다. 솜씨당, 프립 등 하루에 서너 시간을 투자해 손쉽게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이 등장했다. SNS 역시 또 다른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부계정을 만들어 한 가지 키워드로 자신만의 관심거리를 올리기도 한다. 하루 10분 글쓰기, 하루 한 장 SNS 계정에 사진 올리기 같은 간단한 일부터 자격증 준비, 외국어 공부 등 전통적인 자기계발을 비롯해 명상 등 휴식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도모하는 일의 종류는 다양하다. 요즘 시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활동은 유튜브 크리에이터다. 글쓰기 플랫폼이나 독립출판 등이 활성화되면서 작가라는 정체성도 확장되고 있다.

윤이나씨(가명)는 부캐 역전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부캐가 본캐의 정체성을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의 페이스북 소개글을 보면 ‘본캐는 요기니(요가하는 여성), 부캐는 월급쟁이’다. 지난 2년, 요가에 흠뻑 빠졌다. 2019년 1월부터였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커지자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요가를 시작했다. 퇴근하면 육아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점심 시간을 이용했다. 직장 근처 요가원에 등록했다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요가는 하는 만큼 따라와주었다. 현실이 개선된 건 아니지만 회사 생활의 스트레스가 완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주 3회 다니다가 5회로 바꿨는데 6회로 늘었다. 강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동안 토요일에도 수련을 했다. 지난해 5월 요가 강사 자격증을 땄다. 직업을 바꿀 계획은 아직 없지만 집으로 수강생을 초대하는 소규모 요가 강의를 기획하고 있다.

윤씨처럼 본업 이외의 뭔가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도 있다. ‘사이드 프로젝트 사이트.’ 프리랜서 마케터 정혜윤씨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다. 2017년 회사를 그만두고 1년간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그 당시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디지털 노마드(시공간의 제약 없이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정보를 찾고 생산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직업이 여럿인 시대라는 점을 알게 되었고,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기록하자는 의미로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도메인을 사두었다. 그때 생각한 사이드(SIDE)의 정의는 이랬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사이드 프로젝트, 일반적인 길을 벗어나 옆길로 새보는 사람들이니까 SIDE.’ 사이트를 꾸리는 일이 현재로서는 그의 사이드 프로젝트다.

정씨는 에밀리 와프닉의 책 〈모든 것이 되는 법〉에서 다능인 (Multipotentialite)이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한 가지 분야에 스스로를 규정짓지 않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주변의 다능인을 인터뷰하고 기록했다. 당장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게 뉴스레터 형식이었다. 2020년 9월 뉴스레터 0호가 발행되었다. 구독을 신청한 사람이 600여 명이나 됐다. “2017년에 미리 도메인을 사놓았다는 사실과 이것저것 하는 게 많은 사람들을 위한 뉴스레터라는 요소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 같다.” 1호 때는 구독자가 1500명으로 늘고 12호가 나온 현재 2500명이다.

좋아하는 일을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하려는 흐름도 감지된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끼리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는 유료 모임도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끌었다. 독서 모임 ‘트레바리’와 각종 취향을 공유하는 ‘소셜살롱 문토’, ‘취향관’ 등이 대표적이다. 느슨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취향의 공동체다. 개인이 소규모 모임을 꾸리기도 한다. 최재원씨가 책에서 소개하는 ‘찬빈네집’도 처음엔 박찬빈씨가 자신의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해 커피 모임을 한 데서 시작했다. 찾는 사람들이 늘었고 그에게는 바리스타라는 부캐가 생겼다. ‘찬빈네집’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인스타그램 계정에 집과 집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그걸 모아 독립출판으로 책을 냈다.

ⓒ정혜윤 제공프리랜서 마케터 정혜윤씨는 ‘사이드 프로젝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본캐에 얽매이지 않는 흐름은 직업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기도 한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이름, 나이 다음에 직업을 묻는다. 자유 기고가이자 북바(책 읽는 술집)의 주인이기도 하고 독립잡지 〈딴짓〉을 만드는 박초롱씨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난감하다. 몇 개월 단위로 하는 일이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직업은 평생 한 직장에 머무르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그러니까 우리 부모 세대에 적합한 단어’라고 말한다. ‘직업이 곧 계층이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던 시대’의 이야기다(〈딴짓 좀 하겠습니다〉 중). 그에게 ‘직업은 정체성이 아니라 상태’인 셈이다.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도 여러 가지 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를 직업 삼아 살고 있다. 〈일하는 마음〉에서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전문성이라기보다는 어디를 가든 커리어를 지탱해줄, 혹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디딤돌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전문성보다는 탁월성을 강조한다.

각종 신조어의 향연이, 생계 때문에 비자발적으로 부캐에 내몰리거나 본업을 일구는 것만으로도 벅찬 누군가에겐 사치로 느껴질 수 있다. 설사 부캐에 만족하더라도 뭔가 더 일을 벌여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윤이나씨는 요가를 하는 자체로 만족스러웠지만, 어느 순간 이런 경험을 또 다른 결과물로 전환하지 못하는 데 대해 조바심이 생겼다. 남들 하는 대로 유튜브나 팟캐스트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다. 사회학자 미키 맥기는 일찌감치 자기계발 시장이 대가와 상관없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부추기지만, 우리가 추구하려는 자아가 실은 ‘끊임없이 작업당하는 자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기계발의 덫〉에서 평생직업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들어 새로운 불안정성을 부추기는 현상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최재원씨도 본인이 말하는 사이드 프로젝트가 모두를 위한 라이프스타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본업을 더 잘하고 싶으면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간판이나 타인의 욕망을 좇다가 지친 분들, 혹은 원래 이런 삶을 살고 싶었는데 그거랑 너무 멀게 느껴지는 분들께 권한다. 혹 번아웃이 올 정도로 힘들어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면 잘 쉬는 것도 사이드 프로젝트의 일종이다. 굴러가던 방향과 다른 쪽으로 바퀴를 굴려본다는 의미다.” 신년은 뭔가 시작하기 좋은 시기다. 코로나19 이후 최초로 맞이하는 새해이기도 하다. ‘집 안’에서 작은 바퀴 하나 굴리는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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