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제공

사연을 들려주면 그에 얽힌 책을 찾아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책방에 방문한 J씨는 아내 ‘영자’씨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하지만 영자씨는 지금 J씨의 아내가 아니다. 영자씨는 2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꽤 촌스러운 이름이죠? 저도 처음엔 그랬는데 자꾸 부르니까 정이 들더라고요. 우리는 1982년 겨울에 맞선을 보고 다음 해 여름 결혼했습니다. 그해 겨울은 이상하게 눈보다 비가 많았어요. 선을 보기로 한 날도 비가 왔어요. 우리는 평창동에 있는 호텔 로비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J씨는 소개해주시는 분으로부터 영자씨 사진을 먼저 건네받았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선을 보기 전부터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설렜다고 한다. 이 만남을 꼭 성공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연애라면 학생 때부터 숙맥이라 고민 끝에 평소 ‘연애 박사’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얻기로 했다.

“그 친구가 말하길, 처음에 책 이야기를 하면 어쨌든 호감을 살 수 있다고 그러더군요. 상대 이름이 영자라고 하니까 잘됐다고 하면서 〈영자의 전성시대〉 이야기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보라고 그랬습니다. 그건 책이 아니라 영화 아니냐고 제가 물었더니 그 친구는 사실 그 영화가 조선작이라는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거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그 작가의 신작 소설이 마침 나왔으니 그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연애 박사 친구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자기가 먼저 조선작의 새로 나온 소설을 읽어봤는데 앞부분 이야기의 배경이 다름 아닌 ‘북악 P 호텔’이라는 것이다. 실제 맞선 장소는 ‘O 호텔’로 이름만 다를 뿐 위치가 서울 평창동 북악터널 근처라서 소설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친구는 J씨에게 “이게 바로 천생연분 아니겠냐”라면서 전화로 응원해주었다.

J씨도 곧장 서점에 나가 친구가 알려준 대로 〈모눈종이 위의 생〉을 샀다. 하지만 J씨는 아무래도 책과 친하지 않은 성격이라 장편소설을 다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앞부분만 간신히 살핀 다음 맞선 자리에 나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J씨는 책 얘기를 하면서 영자씨에게 호감을 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문제 없이 결혼했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생활은 참으로 행복했다. 2년 전 영자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느닷없이 홀로 남겨진 J씨는 한동안 방황하며 아픔에 시달렸다. 그러다 문득 책 생각이 난 것이다.

“우리는 서로 모순의 별들”

“맞선 보던 날 생각이 나요. 아내는 책을 좋아해서 제가 조선작 소설 이야기를 하니까 반가워하더군요. 그 책도 이미 읽었다고 했어요. 덕분에 우린 그날 이야기가 더 잘 통했죠. 아내는 소설 후반부에 등장인물이 부르는 노래가 나온다고 했어요. 그 노래 가사가 맘에 든다고 했는데, 저는 책을 앞부분만 읽었기 때문에 그 노래를 몰랐어요. 그래서 그냥 저도 좋아한다면서 웃으며 어물쩍 넘어갔지요.”

몇 달이 지난 다음 J씨가 의뢰한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소설에 나오는 노래 가사가 몹시 궁금했다. 다시 책방을 방문한 J씨에게 책을 드렸을 때 함께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는 서로 모순의 별들. 한동안 우리의 길을 잃은들 어떠랴. 우리가 아니면 누가 서로 이름 부르며 우리를 찾겠는가….” J씨는 이 부분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책방 주인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다음 그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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