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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pedia천재 과학자 랑주뱅(위)은 결투를 신청했다가 죽을 뻔했고, 대문호 푸시킨(아래)은 죽었다.

한때 할리우드 영화에서 ‘서부극’은 엄청난 인기를 빨아들이던 아이템이었다. 흐루쇼프의 회고에 따르면 악명 높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서부극을 즐겼다고 하니 그 팬 층의 저변(?)을 짐작할 수 있겠지. 서부영화의 클라이맥스로 빠질 수 없는 게 ‘결투’였어. 서부극 배우 중 누가 가장 빨리 권총을 뽑는 속사(速射)의 명수인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십 년 동안 논쟁거리였다.

비단 미국 서부뿐 아니라 서양 역사에서 어떤 명분이나 목표를 두고 두 사람이 정정당당한 결투를 벌이고 그 승자가 권리를 획득하는 방식은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지. 중세 유럽의 귀족과 기사들은 자신의 명예 혹은 이를 핑계 삼은 치정 싸움이나 채무 분쟁을 해결하게 위해 일대일로 맞서 칼을 휘둘렀다. 근대 이후 심지어 20세기 초반까지도 이 ‘결투’의 습속은 끈질기게 남아 있었어.

결투는 미욱하고 철없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1804년 미국 부통령 에런 버는 국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을 결투 끝에 죽여버리는 대참사를 저질렀고, 링컨 대통령은 젊은 시절 결투 신청을 받고 결투장에 나선 적이 있었어(주변의 만류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1864년 독일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은 약혼자가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약혼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되레 총에 맞아 죽는다. 유명한 퀴리 부인은 남편이 죽은 뒤 남편의 성실한 제자이자 천재 과학자였던 폴 랑주뱅과 사랑하는 사이가 돼. 랑주뱅은 부인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유부남이었지. 어느 프랑스의 황색 신문은 ‘폴란드 여자’ 마리 퀴리가 프랑스의 천재 과학자 랑주뱅의 가정을 파괴한다는 식의 스캔들 기사를 실었고, 랑주뱅은 이에 격분해 신문 편집자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 장소에 나온 신문 편집자가 “프랑스 최고의 두뇌에게 총을 쏠 수 없다”라며 결투를 포기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프랑스 최고의 두뇌’에도 덧없는 총탄이 박힐 뻔했다.

이렇게 공공연히 오랜 세월 결투가 이루어진 걸 보고 결투가 법적으로 허용됐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야. 가톨릭교회는 13세기에 이미 라테라노 종교회의에서 결투를 범죄로 단정했어. 16세기 중엽 트리엔트 종교회의의 의결 내용을 보자. “결투의 풍습은 악마의 선동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서 기독교 세계에서는 완전히 금지되어야 한다. (···) 결투 중에 사망하면 교회 묘지 사용이 영원히 금지될 것이다. 결투를 돕거나 결투하라고 꼬드긴 자들, 구경꾼들도 파문과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다.” 러시아의 서구화를 추진한 계몽군주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보다 훨씬 살벌한 결투를 벌이는 러시아인들에게 경악해 결투 금지령을 내린다. “결투를 하는 자들은 교수형에 처한다.” 트리엔트 종교회의나 표트르 대제의 금지령 이외에도 각국 정부와 군주들은 결투를 금지하려고 애썼어. 쌍방의 합의에 의한 결투라지만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이었고, 결투의 승리는 정의가 아니라 칼솜씨와 사격 실력으로 좌우되었던 만큼 악용되기 십상이었단다.

그러나 위에서 얘기했듯 결투는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 “개인적인 전쟁을 벌여 사람을 죽이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자, 귀족들은 최소한 서로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왕들이 가차 없이 압력을 가했는데도 그들은 근대가 시작되고 한참 세월이 흐를 때까지도 이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르네상스 전쟁회고록〉).” 결투에 대한 집착은 “왕의 권력에 맞서 귀족 계급 전체의 전통적인 지위와 명예, 그리고 특히 폭력을 휘두를 권리를 단언하고 지키려는 노력”이었다는 것이지. 즉 국가가 규정한 법적 테두리를 넘어 ‘결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특권의식의 발호였다는 분석이야. 이 특권의식은 봉건귀족뿐 아니라 새롭게 부상한 부르주아나 엘리트에게도 계승된다. 그들 역시 기꺼이 결투를 벌이면서 범죄자가 될 ‘권리’를 누렸지.

의분을 앞세운 사적 행동은 안타까운 시대착오

결투가 불법이었던 러시아에서 상습적으로 “결투다!”를 부르짖었던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을 빼놓을 수 없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라는 시구 하나만으로도 불멸의 명성을 지녔고,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지. 이 이름 높은 시인은 평생 20번이 넘게 결투 신청을 주고받았던 결투 애호가이기도 했다.

그는 치열한 구애 끝에 황제 니콜라이 1세조차 연모했다는 미녀 나탈리아와 결혼해서 아이를 넷 낳고 행복하게 사는 듯했다. 그런데 나탈리아는 사교계의 꽃으로 염문이 끊이지 않았어. 그중 푸시킨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 이가 있었으니 프랑스 군 장교로 러시아에 망명해 있던 조르주 당테스였지. 그는 끈질기게 나탈리아에게 구애했고 이는 러시아 사교계의 화젯거리가 됐다. 속을 끓이던 푸시킨은 참지 못하고 당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지만 당테스는 당황스럽게도 나탈리아의 언니이자 푸시킨의 처형 에카테리나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천하의 푸시킨도 이 순간의 황망함을 시로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거야. 결투는 유야무야됐어.

하지만 나탈리아를 둘러싼 소문은 끊이지 않았지. 급기야 푸시킨은 “아내에게 배반당한 것을 축하하오”라는 식의 악의적인 익명 편지를 받고 분노에 떨게 된다. 푸시킨은 이 편지를 보낸 이가 당테스와 그의 양아버지인 러시아 귀족이라고 여겨 비난을 퍼부었고, 마침내 결투가 벌어지고 말았어. 결투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시인 푸시킨이 군대에서 산전수전 겪은 장교와 싸워 이길 가능성은 없었지. 그러나 푸시킨은 결투에 나선다. “귀족이자 가장으로서 나의 명예와 아이들에게 물려줄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야.  결투의 규정에 따라 당테스가 먼저 총을 쏘았고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결투가 진취적인 사상을 지니고 러시아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던 푸시킨을 제거하려는 음모였다는 소문이 돌았어.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시인 레르몬토프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시를 통해 푸시킨을 죽음으로 이끈 배후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지. “시인의 마음은 하잘것없는 치욕조차 용인할 수 없었나니 / 그는 홀로 세상의 입방아에 맞서 일어서고 죽음을 당하였도다.” 하지만 얄궂게도 레르몬토프 역시 후일 러시아 군 장교와 여자 문제로 다툰 끝에 결투를 벌이다가 총을 맞고 죽게 된단다. 이렇듯 결투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이유로 사적인 복수와 응징에 나서게 했고, 그에 따라 수많은 범죄자 그리고 피해자를 양산했던 오래된 ‘야만’이었다.

근대 법체계가 세워진 국가는 어떤 명분으로든 자력구제나 사적인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직접 복수도 허용되지 않으며 가해자에 대한 응징 등 정의구현 역시 법에 의거해서만 가능해. 결투가 행해지던 시대처럼 법 자체가 무력화되고 강자의 횡포와 약자의 희생이 정당화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야. ‘정의’를 위해 범죄자를 직접 응징하겠다는 생각은 ‘명예’를 위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불법’ 결투자들의 시대에 부합될 뿐, 결코 오늘날까지 이어받을 것이 못 된단다. 어떤 흉악한 범죄자라도 법외의 수단으로 그를 처벌하는 것은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고, 아무리 불의한 일을 보더라도 의분(義憤)을 앞세워 사적 행동에 나서는 것은 안타까운 시대착오로 남을 뿐이야. 개인적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상대방의 생명을 노리는 ‘야만’은 푸시킨의 시대로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21세기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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