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경북 김천시에서 CJ대한통운 택배 기사로 일하는 이금옥씨는 “올해 택배 일을 하면서 좀 더 이해받는 기분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컨베이어벨트 옆 언덕처럼 쌓여 있는 상자들에서 ‘신선한’이란 글자가 자주 눈에 띄었다. ‘오늘 수확한’ ‘신선한’ ‘갓 딴’ 쌈채소, 감귤, 사과 상자들이 ‘아침이면 문 앞에’ ‘깨지지 않게’ 도착하겠다는 약속을 제각각 하고 있었다.

11월27일 오전 경북 김천시의 한 서브 터미널. 택배 기사 이금옥씨(43)의 손과 발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CJ대한통운 로고가 박힌 스타렉스 차량 뒷좌석에 택배 상자가 빼곡히 채워졌다. 지난해 대비 물량이 30% 늘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마스크와 휴지, 생수 등 생필품 수요가 많아졌다. 비대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택배 상자 500여 개가 매일 이씨 손을 거치고 있다.

이씨가 택배 기사로 일한 지는 올해로 7년째다. 김천의 한 ‘맘카페’에서 택배 아르바이트 공고를 본 것이 계기였다. 첫째 아들이 9세, 둘째 딸이 5세가 되던 해라 잠시나마 몸을 움직일 시간이 생겼다. “김천은 소도시라 애 키우는 엄마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별로 없거든요.” 택배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일을 하다가도 유치원에서 아이를 데려오거나 집에 들락날락하기가 수월했다. 남편은 험한 일을 한다며 반대했지만 이씨는 ‘바깥’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2014년, 본격적으로 배송을 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 스타렉스 한 대를 장만했다. 아이들 학교·유치원 픽업과 택배 배송을 병행하기 위해 2.5t 트럭보다는 작은 차가 필요했다. 이씨가 일하는 남김천 물류터미널에 소속된 택배 기사 60명 중 여성 기사는 6명. 모두 비슷한 차를 몰고 있다.

그날 정오, 이씨는 율곡동의 한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손수레에 택배 상자들을 다시 산처럼 옮겨 담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엘리베이터를 오래 붙잡고 있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취재진을 본 주민 몇몇이 “택배 기사님들 고생 많다고 찍어가나 보네”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택배 기사들의 노동환경을 조명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다. 그 때문인지 ‘빠르고 친절하게 배송받을 소비자의 권리’만큼 ‘적절한 환경에서 안전하게 일할 택배 기사의 노동권’도 중요한 가치로 인정하는 택배 고객들이 많아진 것 같았다. 이씨는 올해는 택배 일을 하면서 좀 더 이해받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수고하십니다” “고맙습니다” 같은 인사들을 자주 들었고 불만 사항 접수도 전보다 많이 줄었다.

ⓒ시사IN 신선영11월27일 경북 김천시 율곡동에서 이금옥씨가 배달 업무를 하고 있다.

2020년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

그러나 여성 택배 기사가 받는 차별과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상자가 찌그러져 있기라도 하면 “남자들은 힘이 세서 제대로 갖다놓는데 여자라서 팍팍 놓는다” “그것도 못 들면서 택배를 뭣하러 하냐” 같은 소리를 듣기도 한다. “아줌마들이 나서니까 남자들 일자리가 없어진다”라며 무턱대고 꾸짖는 사람도 있다. 95%가 남성인 택배업에서 여성 기사가 겪는 어려움은 여전히 잘 드러나지 않는다.

2020년, ‘택배 기사 이금옥씨’가 택배 대란에 맞서는 동안 ‘엄마 이금옥’씨는 돌봄 대란에 부딪혔다. 지난 7년간 늘 ‘간당간당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올해는 일·가정 양립의 위기가 진짜 턱밑까지 차올랐다. 지난 3월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당장 두 아이의 끼니를 챙길 사람이 없었다. “배달하다 집에 가서 아침 주고 또 배달하다 점심때 가서 밥 주고.” 혹시라도 둘이서 라면을 끓여먹다가 다칠까 봐, 가스 불을 잠그지 않았을까 봐 늘 조마조마했다. 거리두기가 상향 조정될수록 택배 물량이 늘어나고 이씨의 퇴근 시간도 뒤로 밀렸다. 뒷좌석에 가득 찬 택배 상자들을 다 배송하기 전까진 밥을 먹지도 못했다. 허기가 질 때는 사탕을 입에 물었다.

재택근무나 아프면 쉬기, 거리두기 같은 방역 수칙들은 이씨의 삶과 무관했다. 특히 지난 5월 쿠팡 물류센터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했을 때 이씨는 ‘죄인 같은 느낌’을 받으며 일했다. 그녀는 김천시 율곡동의 1500여 가구를 맡고 있다. 몸 컨디션이 저조해질 때마다 불안에 떨었다. 이씨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 누가 있으면 “먼저 가시라”고 말했다.

과로사와 생계 문제로 올해 택배 노동자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씨는 착잡한 마음으로 뉴스를 지켜봤다. 심근경색, 뇌출혈, 심장마비라는 사인 뒤에는 주당 평균 71.2시간에 달하는 근무, 새벽까지 이어지는 심야 노동, 아파도 쉴 수 없는 환경 등 익숙한 이야기들이 따라 나왔다. “병원비가 많이 나왔다는 분은 오히려 다행인 편이에요. 적어도 병원엔 갈 수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보통은 다리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못 쉬어요.” 이씨도 지난 7년간 일요일을 제외하고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도착하는’ 우리나라 물류시스템 덕분에, 많은 이들이 ‘비대면’이라는 생존 대안을 선택하면서 지난 11개월 동안 대부분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이 작동했던 이유는 이씨와 같은 택배 노동자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택배 노동자들의 사망사고가 연이어 불거지고 나서야 사회적 관심도 조금씩 커졌다.

ⓒ시사IN 신선영배달 출발 전 이금옥씨가 상하차 분류 작업이 끝난 택배물을 자신의 차에 실었다.

지난 10월 CJ대한통운, 한진택배, 롯데글로벌로지스 등 대형 배송 3사는 택배 기사들의 과로사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았다. 택배 분류 작업에 추가 인력을 투입하고 심야 배송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 이씨는 분류 작업이 사실상 ‘공짜 노동’이었다고 말했다.

분류 작업이란, 택배 노동자들이 컨베이어벨트에서 자신이 배송할 물품을 골라내는 일을 의미한다. 그 2~3시간에 대해서는 어떤 대가도 지급되지 않는다. “새벽부터 레일이 돌아가면서 내 물건을 계속 쏟아내니까 그거 받느라 화장실도 못 가고 서 있었어요.”

이씨가 일하는 남김천 물류터미널에 분류 작업 인력이 일부 공급된 것은 지난 11월 초다. 그들은 배송 물품을 각각의 택배 노동자별로 미리 정리해놓는다. 이제 벨트 앞에 서서 ‘공짜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 삶이 크게 변했다. “8시 반에 출근해도 레일 앞에 제 배송 물품이 딱 나와 있고, 춥거나 힘들면 휴게실 가서 쉴 수도 있다는 것.” 이씨가 꼽은, 2020년 가장 기억에 남은 한 장면이다.

이씨를 만난 11월27일은 분류 작업에 인력이 투입된 지 한 달 정도 되던 때였다. 출근했을 때 레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조급함이 줄었다. 출근 시간이 여유로워지면서 가족과 7년 만에 아침 식사를 했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꽉 차 있고 출근길이 막히는데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이런 게 사람 사는 거지. 주변에 자랑하고 다녔다니까요.” 이씨는 달라진 일상을 ‘사람대접’이라고 느꼈다. 새벽 어스름을 뚫고 나와 텅 빈 도로를 달리던 투명인간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였다. 작은 행복에 웃다가, 어떨 때는 그동안 일하다가 죽은 택배 기사들의 목숨값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멘다. “꼭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간 뒤에야 정책이 바뀔 수 있는 걸까요?”

이씨는 일의 보람을 ‘변화’에서 찾는다. “일터가 조금씩 바뀌어나가는 모습을 보는 게 굉장히 설레거든요.” 더디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2020년 끝자락이 되어서야 확인한다. 내년에는 또 다른 일터의 변화를 기대하고 싶어졌다. “모든 택배 노동자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해요. 택배사들의 선의나 노동조합의 파업에만 의지할 수는 없어요.” 택배 상자를 가득 실은 그의 스타렉스 뒤쪽에 ‘생활물류서비스법 제정하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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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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