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란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현실에 만족하기보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세력이 스스로를 ‘진보’라 부른다. 불평등 문제에서 진보의 대안은 국가가 적극 개입해 재분배에 나서는 것으로, 보수의 대안은 시장에 맡기고 국가는 최소한의 개입만 하는 것으로 수렴해왔다. 많은 경우 경제학은 후자의 무기였다.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부부 개발경제학자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가 쓴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은 진보의 철학을 경제학이라는 렌즈로 풀어낸다. 이민자에게 막연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왜 노동시장에 수요-공급의 법칙을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지 논증한다. 무역의 편익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특정 계층에 불러일으키는 고통을 직시한다. 무역이나 자동화로 타격을 입은 노동자들이, 경제학이 상정하는 것처럼 다른 장소와 일자리로 ‘쉽게’ 옮아갈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들여다본다. “경직된 경제에서는 자원의 ‘매끄러운 재배분’이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 정부가, 국가가 뒤처지고 밀려난 이들의 고통을 경감시킬 정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무역이나 자동화의 타격을 입은 이들의 이주와 재취업을 촉진하며, 나이가 많아 이동이 어려운 노동자들을 위해선 원래 있던 곳에 머물면서도 살아갈 수 있게끔 보조금을 지원해야 한다. 부유한 이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일이 경제성장을 가져다준다는 실증적 근거는 없다는 것, 영속적인 고도성장을 다시 불러올 방법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경제학은 우리가 더 인간적인 세계를 지으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게 하는 철의 법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책은 기후변화, 인공지능, 기본소득 등 경제학의 최신 쟁점을 어렵지 않게 풀어낸다. 유려한 문장과 유머도 큰 미덕이다. 저자들이 반복해 묻는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태도가 울림을 준다. “사회시스템의 일부가 징벌과 모멸을 실어 나를 때, 그것 때문에 움츠러들게 되는 것은 사회 전체다” “그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같은 문장을 경제학 책에서 만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경제학 책을 읽다가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해준 책이다. 다음 문장은 평생의 지침으로 삼고 싶다.

“나쁜 사상의 영향을 막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신중하게 살피고, ‘자명’해 보이는 것의 유혹에 저항하고, 기적의 약속을 의심하고, 실증 근거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복잡성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솔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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