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제공

지금 문화센터에서 꽃꽂이 강사로 활동 중인 S씨는 예순이 넘은 나이였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있었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특히 눈빛을 가만히 보면 그의 인생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S씨는 한눈에 보기에도 안정된 삶을 살아온 사람처럼 화사한 기분이 전해졌다. 하지만 손님이 찾아달라고 의뢰한 것은 안정이라는 말과 정반대편에 있는 소설이었다. 그 책은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쓴 〈여자의 일생〉이다.

“중요한 건, 반드시 문예출판사에서 1977년에 펴낸 문고본이어야 해요. 표지에 귀족 여인 그림이 있는 거예요.”

사연이 있는 책이라고는 하지만 출판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작은 문고본이다. 보통 독자라면 출판연도까지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출판사는 물론 표지그림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이유가 우선 궁금했다.

“그해 제가 대학입학시험에서 떨어졌거든요.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리되니까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샀죠. 유명한 책인데 공부를 핑계로 미뤄두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기분을 좀 바꿔보려고 소설을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우울해서 화가 났어요. 결정적인 건 마지막 문장이었어요. 끝까지 참고 읽었는데, 그 문장을 읽은 다음 책을 반으로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어요.”

S씨 역시 소설의 주인공 잔느처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 S씨에게 처음으로 닥친 시련이 바로 대학입시 낙방이었다. 그러나 한 번이 아니었다. 실패는 재수, 삼수까지 이어졌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치른 네 번째 시험에서 간신히 통과해 대학에 진학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인생의 어려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직했으나 얼마 있지 못하고 도망치듯 퇴사했다. 다음, 그다음도 직장 생활은 어려웠다. 한곳에서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했다. 그사이에 부모님의 사업까지 기울어져 집안 살림은 몰라보게 궁색해졌다.

“방황의 나날을 보내다가 새벽에 열리는 반포 꽃시장에서 처음으로 허드렛일을 시작했어요.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꽃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마치 제 못난 모습 같아서 애정이 느껴졌어요.”

S씨는 자신이 입시에 실패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 모든 게 어릴 때 읽었던 〈여자의 일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동안 다시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나이 오십을 넘긴 나이에 꽃꽂이 강사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서점에 가서 그 책을 샀다.

피고 또 지는 꽃잎처럼

놀랍게도 모파상이 들려준 이야기는 고등학생 때 봤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때는 화가 나서 “바보 같은 잔느, 멍청이 잔느!”라고 했는데, 지금은 이 아름다운 여인을 진심으로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생은 보다시피 그렇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가 봅니다.” S씨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외우고 있었다. 이 문장 때문에 화가 나서 책을 쓰레기통에 버린 일을 반성하는 의미로 똑같은 책을 찾아 이번엔 소중하게 간직하겠노라 다짐했다. S씨는 꽃과 우리 인생이 비슷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피고, 지고, 열매 맺고, 향기를 전하고…. 이 전부가 삶이 아니겠냐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다.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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