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니콜라스 루빈 샤텔 시장이 12월1일 스위스 국기로 장식된 타운홀 건물 안에서 스키장 폐쇄에 항의하고 있다.

프랑스 동쪽 끝 알프스 산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 샤텔. 인구 1200명쯤 되는, 스키장 사업이 주 소득원인 동네다. 이곳 시청이 지난 11월28일부터 이틀 동안 스위스 국기로 덮였다. 어쩌다가 프랑스에 스위스 국기가 휘날렸을까.

그것은 샤텔 시장 니콜라스 루빈의 결정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코로나19 때문에 스키장 영업을 금지하자 ‘이웃 나라 스위스는 스키장을 여는데 우리는 왜 못 열게 하느냐’는 항의로 스위스 국기를 내건 것이다. 샤텔은 스위스와 프랑스의 접경지대에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스키장 중 하나인 ‘포트 뒤 솔레이’를 끼고 있다. 이 스키장의 절반은 프랑스에, 다른 절반은 스위스에 속한다. 스키 패스 하나로 650m에 이르는 활주로를 통해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갈 수 있다는 뜻이다. 평소엔 두 나라에 걸쳐 있다는 점이 이 스키장의 매력이었지만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같은 바이러스, 같은 지역이지만 두 정부가 상이한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이 스키장의 반은 열려 있고 반은 닫혀 있다.

‘스키 휴가 전쟁(Skiferien-Krieg).’ 얼마 전 스위스 지역 일간지 〈루체르너 차이퉁〉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에선 성수기인 연말연시 스키장 오픈을 미루기로 했다. 스위스·오스트리아·스페인에선 스키를 탈 수 있다. 마스크 착용처럼 나라마다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첫째, 전 유럽의 관광객들이 문 열린 스키장으로 몰렸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둘째, 유럽엔 포트 뒤 솔레이처럼 두 나라에 걸친 스키장이 10여 곳 있다. 이웃한 나라들이 국경과 국익을 내세우며 서로의 결정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 상황에 ‘전쟁’이라는 말이 붙은 것도 그럴듯하다. 관련자들의 최근 발언을 보자.

“유럽의 모든 스키장을 폐쇄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유럽연합(EU)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실망스럽다. 스위스가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스키장을 닫을 거라고 기대했다(프랑코 로카텔리, 이탈리아 국립보건원장).”

“(스키 관광객을 통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스위스,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국경에 체크포인트를 세우겠다(장 카스텍스, 프랑스 총리).”

“스키 관광은 국가 정체성의 일부다. EU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

“스위스는 자주 국가다. 스키장을 열지 말지 스스로 결정한다. 무엇이 위험한지 알고 있다. 우리 손을 벗어난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알랭 베르세, 스위스 내무장관).”

“우리 마을의 스키 경제는 너무나 중요해서 그냥 포기할 수 없다(엘루아 로시에, 스위스 스키 마을 바뉴 시장).”

“(스키장을 닫으라는) 바보 같은 짓을 우리가 다 따라할 필요는 없다(한스 비키, 스위스 케이블카협회 회장).”

지금 유럽이 두려워하는 건 제2의 ‘이슈글 사태’다. 이슈글은 오스트리아 알프스산맥 티롤 지역에 있는 스키 명소다. 매년 겨울 50만 관광객이 찾는다. 이슈글은 올해 스키보다 ‘코로나 핫스팟’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다. 유럽에서 코로나19가 크게 유행한 지난 3월에 스키를 타러 이슈글에 갔던 관광객들이 무더기 확진을 받았다. 특히 오스트리아 정부가 상황을 알고도 즉시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큰 비난을 받았다. 이슈글에서 스키를 타고 돌아간 아이슬란드인들이 단체로 확진을 받자 아이슬란드 정부가 3월5일 오스트리아에 이를 알렸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정부는 시간을 끌다가 3월10일에서야 술집을, 3월13일에서야 스키장을 폐쇄했다. 바이러스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다음이었다. 독일·영국 등 유럽 국가는 물론이고 이스라엘·미국·싱가포르에서 온 스키 관광객들이 감염 사실을 모른 채 본국으로 돌아갔다.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이슈글과 연관된 코로나19 감염자가 최소 45개국 6000여 명이다.

ⓒEPA10월30일 스위스 베르비에 스키장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둘로 갈린 스키장, 불안한 유럽의 미래

이슈글은 스위스 스키장 잠나운과 바로 연결된다. 이슈글-잠나운은 유럽에서 가장 이상한 산악 지형 중 하나다. 잠나운이 스위스 영토인데도 오스트리아를 통해서만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물가가 스위스보다 훨씬 낮아서, 스위스에서 이곳으로 스키를 타러 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에서 쇼핑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스키어들의 배낭 속에 오스트리아에서 구입한 담배나 술이 있으면 그나마 귀여운 편이다. 오스트리아 티롤 출신인 내 이웃 제바스티안은 “스위스에서 온 관광객이 이슈글에서 산 손목시계를 차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종종 있지만 다들 쉬쉬한다”라고 밀했다. 이런 사정을 알면 올 초 이슈글 사태의 첫 번째 고리가 오스트리아인이 아닌 스위스인이었다는 점도 납득이 간다. 이슈글의 한 바에서 일하던 이 스위스 여성은 코로나19에 감염된 지 한 달이 넘도록 증상이 없어 감염 사실을 모르고 계속 일했다고 한다.

스키가 현재 큰 이슈이지만, 사실 스키 자체가 감염 위험이 높은 스포츠는 아니다. 달리면서 자연히 서로 거리를 두게 되고 장갑과 고글, 마스크는 기본 장비다. 그럼에도 스키장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하는 건 스키 리프트나 케이블카에서 거리두기가 안 될 때, 또 스키를 다 타고 나서 즐기는 ‘아프레스키(Après-Ski)’ 모임 때문이다. 아프레스키는 한국에서 등산을 마친 사람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과 비슷하다. 알프스에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3~4시쯤부터 스키장 앞 식당과 바는 신나는 음악으로 시끌벅적하고, 선 채로 글뤼바인(Glühwein·과일과 계피 등을 넣어 따뜻하게 데운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보통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스키를 타기 때문에 호텔 등 숙박시설에서의 접촉도 문제가 된다.

팬데믹 와중에 스키 정도는 좀 자제하면 안 되겠느냐는 지적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유럽에서 스키는 단순 스포츠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닌다. 오스트리아에서 겨울 스포츠 산업은 GDP의 4%를 차지한다. 스키 시즌에 발생하는 고용은 전체 일자리의 8%에 이른다. 프랑스 스키 리조트에서는 겨울에 한시적으로 직업이 12만 개 이상 생긴다. 이탈리아 스키 산업에선 매년 약 110억 유로(약 14조5000억원)에 이르는 수익이 발생한다. 스위스에서는 스키장을 열기로 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올겨울 호텔 숙박이 30% 줄어들고 관광 수입은 100억 스위스프랑(약 12조원) 감소하리라 예상한다(스위스 경제연구소 KOF). 이런 수치를 떠나, 알프스나 피레네산맥 인근엔 겨울 한 철 스포츠 관광으로 한 해 먹고사는 마을이 많다. 이미 올해 초 코로나19 1차 유행으로 큰 타격을 받았는데, 1년이 지나도록 바이러스 기세가 꺾이지 않으니 막막한 상황이다.

유럽의 ‘스키 휴가 전쟁’은 경제와 방역 간 갈등 외에도 또 하나 중요한 이슈를 담고 있다. 유럽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솅겐 협정’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1995년 효력이 발생한 이 협정 가입국에선 최대 90일 무비자 여행이 가능하다. 스키를 탄 채 국경을 건널 수 있는 것도 그 덕택이다.

‘경계 없는 하나의 유럽’이라는 이상을 뒷받침하는 이 제도가, 팬데믹을 맞아 흔들리고 있다. 올해 3월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가 감당 못하게 퍼지자 솅겐 회원국들이 국경을 닫아버렸다. 상황이 나아지던 초여름에 국경이 다시 열리고 각국이 대안으로 ‘코비드(COVID) 앱’을 개발했지만, 이 앱은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순간 사실상 작동이 안 된다. 나라마다 쓰는 앱의 종류와 기술이 다르고, 의료 정보를 초국적으로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공항이나 국경에서 검문검색을 하는 것만이 외국발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방법이다.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갔던 알프스 스키장에 전에 없던 경계가 생기는 것은, ‘하나의 유럽’이라는 환상이 깨질 때가 온 게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솅겐 협정 이후 회원국들이 국경을 닫은 게 이번 팬데믹이 처음은 아니다. 2015년 유럽 난민 사태 당시 회원국 6개국이 내부 국경을 통제했다. 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다. 당시 시리아에서 난민이 쏟아져 들어왔고 이들의 주요 목적지는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이었다. 예상 밖의 엄청난 숫자를 감당하지 못한 회원국들이 주요 육로·다리·해상 경로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난민들이 첫발을 들이는 그리스 레스보스섬에 2015년 말 최초의 ‘유럽통제센터’가 만들어졌다. 난민들을 수용·등록·분류하기 위한 이 시설의 별칭은 ‘핫스팟(hot spot)’이다. 난민들의 최초 집결지와 코로나19 집단 발병지가 모두 핫스팟으로 불리는 건 어떤 의미일까. 2015년엔 난민 핫스팟으로부터, 2020년엔 코로나19 핫스팟으로부터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 국경을 닫아건 것은 예외적 사건일까, 아니면 새로운 흐름일까.

‘솅겐’이라는 명칭은 이 협약이 맺어진 룩셈부르크의 마을 이름에서 왔다. 룩셈부르크는 공식 언어로 프랑스어·독일어·룩셈부르크어를 쓰는 나라다. 10년쯤 전만 해도 지역 언어인 룩셈부르크어는 독일어의 방언 정도로 여겨졌고, 정부와 기업 등 주요 부문에선 프랑스어와 독일어만 하면 충분했다고 한다. 그런데 새로운 변화가 생기고 있다. 30대 이하 인구에서 룩셈부르크어 사용자가 늘고, 특히 소셜미디어에서 룩셈부르크어 사용 빈도가 높다. 최근 룩셈부르크 언어센터가 설립됐고 이 언어로 발간되는 아동 도서도 늘고 있다. 룩셈부르크어가 독립된 언어로 인식되고 사용자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한때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의 장벽 없는 소통을 위해 에스페란토어 같은 인공 언어가 등장한 적도 있다. 지역 방언의 위세가 강해지는 건 그것과 반대되는 흐름이다. 팬데믹이 종식된다고 다시 ‘하나의 유럽’이 가능할까. 둘로 갈린 포트 뒤 솔레이 스키장이 보여주는 건 불안한 솅겐 협정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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