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김용익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하나로 진료를 해도 운영이 가능한 체제를 만드는 것이 문재인 케어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2020년은 공공의료를 둘러싼 논의가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동시에 가장 급속히 식어간 해다. 2월 대구 위기, 8월 수도권 확산, 연말의 겨울 유행을 겪으면서 환자 수 그래프가 오름세를 그릴 때마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공공의료 인력(의료인)과 공간(병상)이 부족하다는 경보가 울렸다. 경보음이 반복될수록 실제 위험은 누적되는데 위기의식은 둔감해졌다. 공공의료 확충이 필요하다는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지만 올 초와 올 연말을 비교하면 달라진 게 없다. 앞으로의 계획도 세운 것이 없다.

공공의료 논의가 제대로 된 성과 없이 식어가는 와중에, 지난 11월19일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은 보고서 하나를 발표했다. ‘공공의료 확충의 필요성과 전략.’ 고속도로 4~7㎞ 정도를 만드는 비용이면 설립이 가능한 공공병원 하나를 짓는 게 왜 그토록 어려운지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보건의료 담론을 분석했다. 그 담론을 뛰어넘을 보건의료체계 개혁안도 제시했다. 보고서는 김용익 건보공단 이사장과 연구진의 토론을 통해 작성됐다.

김용익 이사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보건의료 정책 전문가다. 예방의학 박사 출신으로 대학과 시민사회에서 의료와 복지 분야의 국가 공공성을 강화하는 연구와 활동을 해왔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의료보험 통합일원화와 의약분업을 이끌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장과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을 지냈다. 19대 국회의원을 거쳐 이번 문재인 정부에서도 ‘문재인 케어’ 등 보건의료정책 설계와 집행을 맡아오고 있다. 그런 그가 왜 지금 다시 공공의료 확충을 이야기할까. 12월2일 서울 여의도 건보공단 서울스마트워크센터에서 김용익 이사장을 만났다.

ⓒ시사IN 윤무영11월19일 건보공단이 발표한 보고서 ‘공공의료 확충의 필요성과 전략’.

건보공단에서 공공의료 확충 보고서를 낸 까닭은 무엇인가?

건강보험과 공공의료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은 국민에게 의료를 보장해주는 조직이지만 의료서비스를 생산해내는 기능은 없다. 의료보건 서비스는 병의원과 약국이 만들어내고, 건강보험은 그 서비스에 필요한 비용을 의료기관에 제공한다. 낭비 요인이 많거나 여러 문제가 있으면 우리 건강보험의 돈이 효율적·효과적으로 쓰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건보공단이 공공의료의 정책적 대안을 만들어내고 여론을 환기시키며 좋은 보건의료체계가 되도록 노력하는 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좋은 보건의료체계의 핵심이 왜 공공의료인가?

우리나라는 민간의료 공급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다. 전체의 6% 정도만 공공병원이다. 세계적으로 최저 수준이다. 민간의료 시장이 가장 발달해 있다고 하는 미국과 일본도 각각 23%, 18%다. 공공의료를 강화하자는 게 대단히 비중을 높이자거나 국영의료 체계로 가자는 게 아니다. 세계 평균 수준으로 정상화하자는 의미다.

좋은 의료란 표준 진료를 하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과잉 진료를 하는 문제, 병원에 돈이 안 되니까 의료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과소 진료의 문제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공공의료는 돈과 수익의 문제에서 벗어나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의료, 과잉도 아니고 과소도 아닌 표준 진료를 제공해줄 수 있다. 이게 되려면, 공공의료 기관의 비중이 30%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전체 의료전달체계에서 역할과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지금의 5~6%로는 보건의료 공급 시장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시장에 영향력을 미쳐야 민간의료기관도 공공의료기관의 표준 진료에 맞춰 따라오고, 결국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된다.

보고서에서 “문재인 케어의 한 축이 공공의료 확충”이라고 했다.

문재인 케어에는 두 가지 핵심이 있다. 하나는 보장성 확대다. 비급여를 급여로 바꾸어서 건강보험의 적용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필요한 모든 보건의료 서비스를 건강보험 혜택 속으로 넣어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건강보험 속으로 들어온 비급여 서비스와 기존 급여 서비스 수가를 조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병원 입장에서) ‘이걸 진료하면 손해, 저걸 진료하면 이익’이 아니라 무엇을 진료하든 이윤율이 일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문재인 케어가 완성된다고 가정하면, 비급여가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게 급여 속으로 들어오고 그 속의 수가가 동일한 이윤을 남긴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하나로 진료를 해도 병원 운영이 가능한 체제를 만드는 게 바로 문재인 케어의 완성이다.

이런 체제 속에서는 국민들과 정책 결정자의 공공병원에 대한 우려, 즉 ‘지어놓으면 계속 적자가 날 텐데 어떻게 감당하지?’ 같은 걱정도 사라지게 된다. 문재인 케어가 완성되면 공공병원도 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재인 케어가 완성됐는데 적자 보는 곳이 있으면 운영을 잘못한 것이다. 문재인 케어가 공공의료를 정상화시키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고, 또 공공병원이 문재인 케어의 성과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양자 간 주고받는 역할이다.

ⓒ연합뉴스11월30일 부산 코로나19 확진자가 병상 부족으로 대구 중구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지금 한국의 공공의료 현실은 어떤가. 특히 코로나19가 닥친 올해는 보건의료계 안에서도 공공의료 공급 부족을 절감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많이 나왔다.

코로나19 환자의 대부분을 전국에 몇 개 안 되는 지방의료원이 맡아주고 있다. 이렇게 공공의료가 취약하니 민간병원들도 다 위협을 받게 됐다. 공공병원이 지금보다 2배 정도만 더 많았더라면 코로나19 환자를 공공병원이 조금 더 여유 있게 수용해줬을 거다. 그러면 오히려 민간병원은 코로나19에 시달리지 않고 일반 진료인 고혈압·당뇨·암 등의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흡기질환 환자도 공공병원이 더 수용해줬으면 민간병원이 훨씬 원활하게 돌아가고 환자들도 안심하고 병원을 갈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잘 안 됐다. 한편에선 방역을 하고 다른 한편에선 일반 진료를 정상적으로 유지해야 전염병 대유행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 우리나라가 코로나19 방역을 성공적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공공병원 비중이 5%, 6%가 아니라 10%, 20% 정도라도 되었으면 훨씬 효율적으로 더 잘했을 것이다.

민간의료기관의 공공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공공의료를 확충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정부가 설립한 병원만 공공성이 있는가? 정부가 설립한 병원은 다 공공적인가? 민간이 설립한 병원은 다 영리 추구일까? 민간 설립이라고 모두 공공성을 가질 수 없는 걸까? 당연히 아니다. 민간이 설립한 병원도 공공성을 지닐 수 있다. 예전엔 공공성을 띤 훌륭한 민간병원이 굉장히 많았다. 민간에서 세운 결핵병원, 공공성을 띤 종교계 병원들도 많았다.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영리 추구적으로 변했다.

정부 설립 병원이 최소 30%, 어쩌면 절반 정도의 일정한 양을 확보하는 게 우선 필요하다. 민간도 공공의료 역할을 할 수 있으니 정부 소유의 공공병원을 늘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정부 설립 공공병원이 의료체계 내에서 일정한 비중을 확보하고, 거기 더해 민간병원도 공공성 있는 사업을 수행하면 된다. 공공사업을 하는 민간병원에는 건강보험에서 주는 돈 외에도 건강증진·질병관리 명목으로 별도의 비용을 치러줘야 한다. 그래야 민간도 따라온다.

공공병원을 지으려고 할 때마다 ‘예타(예비타당성 조사)’의 문턱에 걸린다.

예타는 토목공사를 생각하고 만든 절차다. 고속도로나 교량, 항만을 지을 때 경제성이 있는지 타당한지를 검토하는 것이고,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사회정책 사업으로 가면 그 계산 방식이 맞지 않게 된다. 예타는 코스트(cost)와 베너핏(benefit), 즉 비용과 효용을 비교한다. 비용과 효용 항목을 각각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결과값이 달라진다. 토목공사용 비용-효용 틀로 공공병원이나 학교, 보육시설 같은 걸 지으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토목공사들에서는 효용이 과대 책정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예타’를 통과하지만) 앞에도 차가 없고 뒤에도 차가 없는 고속도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예타에서 공공병원은 오히려 효용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게 계산되는 경향이 있다. (공공병원이 예타를) 통과할 수가 없다. 예타가 공공병원 확충의 최대 장애 요인이 돼버렸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예타 면제를 해주든지, 아니면 사회 분야 사업에 맞게 비용-효용 계산 항목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 국회에 공공병원 예타 면제법이 상정돼 있다. 덧붙여, 공공병원 설립에 관한 지방재정 분담비율을 조정해서 공공병원 설립에 대한 지자체의 부담도 낮춰줘야 한다.

ⓒ연합뉴스11월24일 국회 앞에서 열린 ‘코로나19 위기에 공공병원 확충예산 0원, 국회와 정부 규탄 기자회견’.

제도도 그렇지만 국가의 인식과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공병원을 지어서 운영하고, 보건의료와 복지를 맡아 이끄는 일을 국가의 임무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제일 큰 문제다. 서양에서 생각하는 국가의 역할과 한국에서 생각하는 국가의 역할에 극단적인 차이가 있다. 서구에서는 국민의 건강이나 복지를 위한 시설, 인력, 프로그램 등은 국가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그러니 국영의료 체계를 갖춘 곳도 있고, 국영이 아니더라도 독일은 40%, 프랑스는 60%의 국공립 병상을 갖고 운영한다. 그런 나라들에서는 기초지자체의 제일 중요한 업무가 1차 의료, 교육, 노인과 장애인 복지 같은 것들이다. 우리나라는 기초지자체는 물론이고 국가도 보건의료와 국민건강을 보살피는 일을 자기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극단적인 수준이다.

그 인식의 부족이 결국 지금의 코로나19 공공병상 부족을 만들었을까?

그래서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사람들이 다 공공병원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진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정부에서도 필요하다 하고, 국회에서도, 언론에서도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누구도 나서서 주인의식을 갖고 공공병원을 늘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공공병원 논의가 허공에 떴다. 말만 무성했지 누구도 이걸 잡고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이래서는 전기(轉機)가 오질 않는다. 코로나19는 어떤 형태로든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또 잊어버릴 거다. 이것과 비슷한, 어쩌면 더 강한 감염병이 조만간 또 올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때 가서 ‘공공병원 지을 걸 잘못했네’ 하면서 또 허공에 떠 있을 것 같다. 그게 굉장히 두렵다. 공공병원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때 국회와 정부가 획기적 단안(斷案)을 내리지 않으면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지금처럼 국가가 보건의료와 국민건강 문제를 확실히 자신의 일로 잡고, ‘체제를 만들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다람쥐 쳇바퀴를 돌고 있을 것이다.

특히 누가 공공의료 확충에 책임감을 지녀야 할까?

일단은 보건복지부이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그를 뒷받침해줘야 할 기획재정부, 이런 곳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통해 일관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공공의료 확충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두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우려하는 사람들이다. ‘공공병원을 진짜 늘릴 수 있을까?’ ‘늘리면 관료주의적이고 질이 안 좋은 의료만 양산되는 게 아닐까?’ 정부 실패론이 바닥에 깔려 있는 생각들이다. 둘째는 무관심이다. ‘공공병원 없어도 민간병원이 충분히 있는데, 방역도 한국이 잘했다고 하는데, 굳이 공공병원 늘려야 할까?’ ‘지금의 시스템으로도 잘했는데’ 하는 무관심 내지는 착각. 세 번째는 적극적인 반대다. 현재 민간 병상이 공급과잉 상태이니 민간 쪽에서는 공공병원을 짓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다.

공공병원을 어디에 어떻게 더 지어야 할까?

공공 병상 공급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곳, 취약지역에 먼저 지어야 한다. 서울과 부산 같은 도시에도 빈 곳들이 있다. 공급이 과잉돼 있고 경영이 어려운 민간병원을 인수해서 공공병원으로 만드는 것도 좋은 방식이라 생각한다.

민간이든 공공이든 전환을 해도 병상수는 마찬가지 아닌가?

단순 대체가 아니다. 공공병원의 임무는 진료만이 아니다. 장애인 진료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진료이면서 공공사업이기도 하다. 뇌성마비 환자가 이를 하나 뽑으려면, 혹은 임신을 해서 내진을 하려고 하면 보통 일이 아니다. 민간병원에 맡겨놓으면 수가를 아무리 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런 건 공공병원이 아니면 못한다. 시각장애인을 안내하고 청각장애인에게는 수화 서비스를 제공해줘야 한다. 이걸 수익을 남겨야 하는 민간병원에서 어떻게 다 하겠는가.

또 한 가지, 공공병원 네트워크가 곳곳에 있어야 국가 보건정책에 속도가 날 수 있다. 고혈압 관리, 암의 체계적 관리 이런 것들은 민간에 맡겨서 다 하기가 어렵다. 설득하고 지정하고 수가 주고 이런 식으로 시간이 걸리니 성과가 잘 안 난다. 공공병원이 사방에 기둥 역할을 해줘야 다양한 보건사업도 하고 응급의료 시스템도 갖출 수 있다. 정부에서 어떤 사업을 하겠다면 보건복지부의 손발이 되는 병원들이 있어야 정책 집행이 빨라지는데 지금 그 집행이 엄청 느리다. 보건복지부는 지금 손발이 없는 정부 부처다.  

코로나19 대응에서도 병상 확보 등 공공정책 집행이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공공병원들이 지금보다 적절한 위치에 더 촘촘히 배치돼 있었으면 일을 하기가 훨씬 쉬웠고 피로도도 덜어졌을 것이다. 계속 지쳐가고 있는 이유는 일손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방 보건청이라도 있고, 공공병원이 시군구마다 모두는 아니라도 각 도에 하나씩이라도 배치돼 있었으면 방역 대책이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였을 것이다. 지금 보건복지부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여기저기에 부탁하는 일이다. 이거 맡아달라, 저거 해달라…. 그러니 힘은 힘대로 들고 속도는 안 난다. 그 손발 만드는 일을 왜 그리 망설이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대단히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고속도로 한 개 정도 짓는 비용만 있으면 전국적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데.

ⓒ연합뉴스2013년 4월8일 국회에서 진주의료원 정상화를 촉구하며 5일째 단식 농성 중인 민주통합당 김용익 의원(오른쪽)이 같은 당 문재인 의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공공의료에 대한 국가의 인식이 부족한 것에 역사적 배경이 있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제 식민지의 유산이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때 서양의 제도들을 다 들여왔는데 의료는 독일 것을 수입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공공병원 짓는 계획을 세웠는데, 중간에 내전이 일어나서 전비를 쓰느라 공공병원 예산을 삭감했다. 의사 양성만 국가가 하고 양성이 된 의사가 병원을 차리는 건 알아서 하도록 했다. 그렇게 민간병원 중심 체제가 만들어지고 그 제도가 식민지 조선과 식민지 타이완에 그대로 적용됐다.

해방 이후에는 공공병원, 국영의료체계, 의료 보장에 관한 논의들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미군정을 거치고, 6·25를 겪으면서 그런 생각들이 다 없어졌다. 공공병원이 뭔가 사회주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인식돼버렸다. 박정희 정부도 의료보험을 도입하면서 공공병원을 지으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의료는 민간이 해야 하고 공공은 보조를 해야 한다’ ‘정부가 병원을 직접 세울 필요는 없다’ 같은 의료 담론이 한국에 굳건히 자리 잡았다. 그러니 건강보험을 통해 점점 의료 재원은 공공의 비중이 높아지는데 의료 공급은 공공 비중이 내려가는 모순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공공 재원이 늘어나면 공공 공급을 늘리는 게 당연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인식이 잘 안 생기는 것이다. 그게 담론의 힘이다.

공공병원의 ‘사용자 경험’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필요는 하지만, 내가 가서 진료받고 싶지는 않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현존하는 한국의 많은 공공병원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말하자면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와 같다. 사람들이 영양실조 상태인 아이에게 ‘너는 왜 빨리 못 뛰느냐’고 비난하는 형국이다. 안 먹였으니 못 뛰는 거다. 잘 먹인 공공병원들은 잘 뛴다. 건보공단 일산병원, 국립암센터 같은 곳들은 경험해본 이용자들의 평이 굉장히 좋다.

공공병원 확대는 기존 인식처럼 낙후된 병원이 아니라, 21세기에 맞는 현대식 공공병원이라는 걸 전제로 얘기하는 것이다. 100년 이상, 22세기에도 쓸 수 있는 그런 병원. 그러려면 공공병원 자체를 지을 뿐 아니라 공공병원 운영을 지원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단순히 병원 건물을 신설·증설하는 일을 넘어 공공병원을 업그레이드하는 지원기관이다. 지금은 의사 한 명 구하는 것도 공공병원 각자 따로 하느라 엄청 힘이 든다. 지원 조직을 만들어 거기서 의사와 간호사 인력풀을 만들고, 갈 만한 공공병원에 배치하고, 병원 관리 연수도 하고, 정보화 프로그램을 공동 개발하고, 의사들 해외 연수와 연구 활동을 지원해주고, 이렇게 의사들이 근무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훌륭한 직장이 되어야 공공병원이 제대로 움직인다.

시도지사들이 공공병원을 짓기 두려워하는 중요한 이유도 단순히 적자가 나서라기보다 운영상 어려움 때문이다. 공공병원 설립과 운영은 시도지사가 하지만, 그걸 지원해주는 조직은 보건복지부에 두어서 그런 어려움을 풀어줘야 시도지사들이 겁을 내지 않고 공공병원을 지을 수 있다.

‘한국판 뉴딜’에서 공공의료 확충과 투자 의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아까 말한 대로 말이 허공에서만 돌아다니고 어디 한곳에 뿌리 내려서 커나가는 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걸 해야 된다’ ‘하는 것이 경제와 사회에 이득이 된다’ 같은 생각들이 형성되질 못했다. 병상 한두 개 늘리는 것에서 생각이 멈춘다. 의료체계와 사회체계를 바꾸는 큰 개혁이라는 생각이 부족하다. 공공의료를 확충해나가는 운동이 지금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담론, 정책 방향을 만들고 국민과 언론이 공감하고 정당들도 당론으로 삼게 되는, 그런 여론 형성 과정이 필요하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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