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media이탈리아계 범죄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탈리아계 뉴욕 경찰 페트로시노(맨 왼쪽).

‘지난 100년 동안 산더미처럼 쌓인 영화들 가운데 최고의 작품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글자 그대로 우문(愚問)일 거야. 사람마다 취향에 따라 답이 다를 테니까.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1999년 송년호에서 이런 답을 내놓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단 한 편의 영화”로 영화 〈대부〉를 꼽은 것이지. ‘옛날 영화’라면 고개를 흔들겠지만 〈대부〉는 꼭 너와 함께 보고 싶은 영화 중 하나다. “영화는 지루한 부분이 커트된 인생”이라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말을 좀 비틀어 말하면 “지리한 부분이 커트된 역사”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야.

오늘날 마피아라는 말은 마약부터 도박, 매춘까지 온갖 더러운 사업 속에 이권을 챙기는 범죄 조직의 대명사가 돼 있지만 이 말은 시칠리아, 좀 넓게는 이탈리아계 범죄 조직을 일컫는 단어였어. 영화 〈대부〉의 모델이 된 이들이지. 그런데 사실 미국의 갱단 역사를 보면 이탈리아계는 후발 주자다. “미국 근대 조직범죄 역사를 보면 1세대는 아일랜드 갱, 2세대는 유대인 갱, 3세대는 이탈리아 갱, 4세대는 중국 갱이라고 할 수 있다(〈신동아〉 2013년 3월호 ‘범죄의 재구성’).” 이 순서는 곧 이민의 역사이기도 해.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범죄 조직은 최하층을 형성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하기 마련이야.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 못할 일이 없고, 제대로 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니 비빌 언덕을 찾아야 했으며, 폭력과 범죄는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에 속했으니까. 영국인들로부터 ‘피부만 하얀 흑인’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살다가 무시무시한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탈출했던 아일랜드인이나 유럽에서 천대받았던 유대인 중 일부가 범죄 조직을 꾸렸던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19세기 후반, 또 하나의 거대한 이민자 집단이 대서양을 건너오게 된다. 그게 이탈리아계였어.

1870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섰지만 산업이 발전한 북부와 농업 위주인 남부의 격차는 엄청나게 컸고 문화적 차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극심한 빈곤 속에 조국에 대한 희망을 잃은 나폴리와 시칠리아 등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탈(脫)이탈리아’에 나섰고 연인원 수백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이민선에 올라 미국으로 향했다. 그중에는 이탈리아에서부터 악명을 날린 범죄자들도 끼어 있었지. 이 독버섯들은 가족끼리, 친족끼리 뭉치는 문화가 강했고 단결력이 좋았던 이탈리아 이민 커뮤니티에 성공적으로 기생하여 뻗어나가기 시작했어.

“기회의 땅 미국에서 예전에 가난했던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비교적 부유해졌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갈취는 부유한 자들로부터 돈을 받아낼 수 있는 쉬운 방법이었다(콜린 윌슨, 〈인류의 범죄사〉).” 1903년 뉴욕 브루클린의 이탈리아계 건축 하청업자는 ‘검은손(mano nera)’이라는 조직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다며 신고했어. 돈을 전해줬더니 더 큰 액수를 요구하는 악당들에게 질려버렸기 때문이야. 이 검은손의 사업 방식은 미국 곳곳에 퍼져 나가고 있었지. 비슷한 시기 뉴욕 맨해튼에서는 목이 거의 잘려나간 이탈리아인의 시체가 통 속에서 발견됐어. 신원이 밝혀지고 용의자가 체포됐는데 위조화폐 유통 과정에서 욕심을 부리다가 조직의 참혹한 응징(?)을 받은 것이었지. 하지만 체포된 용의자는 처벌받지 않았단다. “증인들이 갑자기 건망증에 걸렸고, 죽은 사람의 부인과 아들마저 증언을 거부(〈인류의 범죄사〉)”했기 때문이야. 검은손이 장난을 친 결과였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입술을 깨문 또 하나의 이탈리아인이 있었어. 뉴욕 경찰 주세페 페트로시노, 영어식으로 하면 조지프 페트로시노(1860~1909)였다.

페트로시노 역시 이탈리아 이민 1세였어. 보호자였던 할아버지가 전차 사고로 죽은 뒤 사촌과 함께 고아원으로 갈 뻔했는데, 판사의 호의로 이탈리아 친척들과 연락이 닿을 때까지 그의 집에서 지낼 수 있었고 이후로도 여느 이탈리아 빈민들과는 달리 교육받을 기회를 얻었지. 마침내 1883년 10월 그는 이탈리아어 사용자로는 최초로 ‘NYPD’ 즉 뉴욕 경찰의 일원이 됐고 자신의 선량한 동포들을 괴롭히는 이탈리아계 범죄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돼.

암흑이 커도 각자의 빛을 찾아야 한다

페트로시노는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대원들을 이끌고 ‘검은손’ 단원들과 전쟁을 벌인다. 시각장애인이나 청소부 등 기상천외한 변장을 감행하며 검은손 조직원들을 농락했고, 증인 보호 프로그램이나 위장 침투 등 후대에도 범죄 조직과 상대하는 데 유용한 방법들을 개발해냈어. 무엇보다 페트로시노는 이탈리아 갱들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본때를 보여준 사람이었지. 유명한 이탈리아 테너 엔리코 카루소에게 검은손의 협박장이 날아들었을 때 페트로시노는 돈을 주겠다며 검은손 조직원을 유인한 후 두 팔을 부러뜨리고 그 자리에서 배에 태워 시칠리아로 돌려보내 버렸단다. 또 나폴리에서 일가족을 살해한 범인이 뉴욕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의 거처를 습격해서 그 일당을 침대 시트와 넥타이로 돌돌 말아 경찰서로 끌고 가는 쾌거를 보여주기도 했지.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이탈리아 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경찰.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시사만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페트로시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어. 그는 미국 내 이탈리아계 범죄 조직과 이탈리아 본토의 범죄 조직 사이의 연계에 주목했고, 이를 조사하기 위해 이탈리아 출장에 나선다. 이탈리아 마피아의 본고장을 뒤지며 수많은 정보를 캐냈지만 페르토시노의 이름은 이탈리아 범죄자들에게 ‘공공의 적’이 된 지 오래였지. 페트로시노는 정보원을 만나러 가는 길에 총알 세례를 받고 쓰러지고 말았어. 뉴욕 경찰 최초의 이탈리아인. 그 어떤 상납도, 뇌물도 거부한 채 악당들과 싸웠고, 죽기 2년 전 나이 마흔일곱에야 결혼을 해서 겨우 생후 5개월 딸을 두었던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자신의 옛 조국에서 목숨을 잃었단다. 뉴욕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시민 20만명이 몰려들었어. 누구보다 슬퍼했던 건 그의 선량한 동포들이었겠지.

페트로시노의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어. 그리고 이탈리아 마피아들은 페트로시노가 활약하던 시절보다 백배 천배는 더 성장해 미국의 암흑가를 지배했고, 다양한 국적의 범죄 조직들이 전 세계를 뒤덮고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빨고 있지. 페트로시노는 과연 패배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거야. 항상 하는 얘기지만 역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지. 오늘 우리의 현실이 비참할 수는 있겠으나 비극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나오는 한 내일은 달라질 수 있고 용감한 사람들의 기억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다른 미래를 창조할 발판이 된다는 뜻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피아의 본거지라 할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에서 “마피아들에 대한 파문”을 선고했고 이탈리아 경찰은 대대적인 마피아 소탕전을 벌였다. 악명 높은 조직 ‘코사 노스트라’의 시칠리아섬 본거지도 경찰의 급습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어. “한 마피아 조직원이 동료에게 자기 친척인 파올로 팔라조토가 1909년 미국 경찰관 조 페트로시노의 살인범이었다고 말한 내용을 도청을 통해 확보(〈조선일보〉 2014년 6월22일)”한 거야. 페트로시노가 쓰러진 지 105년 뒤, 마피아와의 전쟁 과정에서 밝혀진 진실의 조각이었지. 대개 심술궂고 더 자주 비정하기까지 한 역사는 가끔 우리에게 이런 감회 섞인 윙크를 보내며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경구를 되새기게 만들어주는구나. “세상의 암흑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우리 각자의 빛을 찾아야만 한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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