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오스 인터내셔널 홈페이지세계 최대 정자은행인 덴마크의 크리오스 인터내셔널.

친구 D에게서 보자고 연락이 왔다. 반년 만이었다. D는 자리에 앉자마자 최근의 연애 얘길 꺼냈다. 멕시코 남자와 석 달 동안 만났다가 막 헤어진 참이라고 했다. 그가 이혼을 했고 열 살짜리 아들이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좋아했다고 한다. 이번엔 진짜인가 싶었는데 남자가 바람을 피웠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초췌한 얼굴의 D가 그다음에 진지하게 꺼낸 말이 뜻밖이었다. “결심했어. 마흔까지 괜찮은 사람을 못 만나면 아이를 입양할 거야. 북한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싶어. 내가 과연 혼자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넌 둘이나 키우고 있으니 솔직하게 의견을 말해줘.”

D를 설명할 수 있는 말엔 이런 것들이 있다. 이탈리아인, 38세, IT 전문직 종사, 엄격한 건강식 고집, 고양이 집사, 취미는 춤추기와 로드 사이클링. D를 8년째 알고 지내온 입장에서 하나 더 덧붙이면, D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책임감이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다. 나는 D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도 잘 안다. 함께 아이를 낳아 키울 남자가 선뜻 나타나지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난자도 냉동해두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애 키우는 거 쉽지 않지. 둘이 해도 힘든데 혼자면 더할 테고. 그치만 네가 굳이 하겠다면 지지하고 도울게.” D는 고맙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꺼냈을 때 걱정을 많이 했는데 긍정적으로 얘기해줘서 기운이 났단다. 정말로 비혼모가 되면 부모님이 사는 곳 근처로 이사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방송인 사유리 씨가 일본에서 기증된 정자를 이용해 임신과 출산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D를 떠올렸다. 하지만 사유리 씨와 달리 D가 혼자 아이를 가지려면 입양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곳 스위스에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기증된 정자로 하는 임신이 불법이다. 2001년 1월1일 발효된 ‘보조생식술에 관한 연방법’에 따르면 기증된 정자를 이용한 보조생식술은 오직 결혼한 부부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그것도 부부가 다른 모든 난임 시술에 실패했을 때와 태어날 아기가 심각한 유전적 질병을 피할 방법이 없을 때만 가능하다. 사유리 씨처럼 아이를 갖고 싶은 비혼 여성이나, 스위스에서 법적 혼인 관계가 인정되지 않는 동성 커플이 다른 사람의 정자를 이용해 아이를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를 어기면 10만 프랑(약 1억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러나 법과 현실 사이엔 간극이 있다. 한국에서는 싱글 여성이 정자를 기증받는 게 불법이 아닌데도 병원이 내규를 정해 결혼한 부부 외에는 시술을 하지 않아서 사유리 씨는 일본의 정자은행을 이용했다. 스위스 여성들도 스위스 밖에서 답을 찾는다. 가장 흔한 방법은 세계 최대 정자은행인 덴마크의 ‘크리오스 인터내셔널’을 통하는 것이다. 이 업체는 영하 196℃에서 보관하고 있는 정자를 오스트리아·스페인 등 시술이 가능한 주변 나라의 클리닉으로 배송하기도 하고, 집으로 배송해 고객이 스스로 주입하기도 한다. 2014년에 스위스 당국이 정자를 배송 과정에서 발견하고 압수한 뒤 크리오스에 스위스로 배송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2016년 한 해에만 스위스 여성 180명이 크리오스에서 정자를 주문했다. 스위스 내에서 난임 부부가 타인의 정자를 이용할 땐 제공자의 건강상태 외에는 알기 어렵지만, 크리오스에선 몇백 유로만 내면 머리카락과 눈 색깔, 키와 몸무게, 어린 시절의 사진과 필체까지 확인한 뒤 주문할 수 있다.

ⓒKBS 화면 갈무리방송인 사유리 씨는 국내 병원이 싱글 여성에게 시술을 하지 않아 일본의 정자은행을 이용해 임신과 출산을 했다.

만들고 낳는 것보다 키우는 것이 더 힘들다

현재 크리오스에 등록된 정자 제공자는 650여 명이다. 규정상 45세까지 정자 제공이 가능하지만 상당수는 젊은 학생이다. 한 번에 5만~9만원 정도를 받기 때문에 파트타임 일처럼 여긴다고 한다. 하루 주문량은 50~100건인데 고객 대부분은 ‘30대 후반, 선진국 출신, 고학력, 직장인 여성’이다. 내 친구 D의 프로필과 일치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구상에 신인류가 탄생하는 중인가? 젊고 건강한 남성의 정자와 독립적이고 능력 있는 여성의 몸이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여 탄생하는 아기들. 이들의 탄생은 기승전결이 뻔한 로맨티시즘에 기대지 않은, 문제 있는 구조를 비판하는 대신 아예 구조를 해체해버린 스토리다. 생식 과정의 해체는 권력관계도 바꾼다. 상상을 해보자.

당장 내일 지구상에서 모든 남성이 사라진다면 인류는 존속할 수 있을까? 그렇다. 냉동된 정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일 지구상에서 모든 여성이 사라진다고 가정해보자. 인류는 멸종한다. 냉동 난자는 있지만 인공 자궁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개발 중이긴 해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여기에서 힘의 차이가 발생한다. 전통적으로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사회경제적 활동을 제약해왔다. 그런데 그건 가부장제와 임신, 출산이 맞물렸을 때의 얘기다. 남자를 중심으로 편성된 가족제도 밖에서 임신과 출산을 할 경우, 여성의 자궁은 남성에게 없는 자원이 된다. 기술은 남성을 대체할 수 있지만 아직 여성을 대체할 순 없다. 대체 가능한 것은 힘을 잃는다. 사유리 씨의 선택에 대한 일부의 비난은 이 같은 권력관계의 전복 가능성을 예민하게 감지한 결과일지 모른다.

ⓒ유럽 정자은행 누리집 갈무리덴마크의 한 정자은행 직원이 고객에게 보낼 정액을 저장 장치에 담고 있다.

그렇다고 냉동 정자가 여성해방으로 바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아이를 만들고 낳는 것보다 더 힘든 게 키우는 일이고, 그건 냉동 정자로 해결이 안 된다. 사유리 씨의 소식을 들었을 때 축하하는 마음 다음으로 든 생각이 ‘혼자 얼마나 힘들까’였다. 아기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은 사람을 고용해서 해결할 수 있지만, 함께 놀이동산에서 추억을 만들거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은 좀 더 복잡하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혼자 해도 된다는 말이 그리 쉽게 나와선 안 된다. 인류의 절반인 남성을 소외시키고 활을 잘 쏘기 위해 한쪽 가슴을 도려냈던 전설의 여성 부족 아마조네스의 삶이 여성이 꿈꾸는 이상향은 아닐 테다.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은 파트너도 있지만, 이왕이면 함께 고생할 사람이 있는 게 더 좋다. 그것이 전통적 가부장제의 ‘아버지’일 필요는 없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한 장면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피터는 어린 시절 지구에 온 외계인 도적단에 납치돼 그들과 함께 산다. 도적단의 욘두는 여러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주면서 사실상 양아버지 역할을 한다. 피터의 생물학적 아버지 에고는 신에 가까운 존재로, 전 우주를 자기 유전자로 채우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리려 하는 냉혈한이다. 피터가 반항하자 자식인데도 죽이려 든다. 그때 욘두가 나타나 에고를 쓰러뜨리고 피터를 구해내 우주로 탈출하면서 하나뿐인 우주복을 피터에게 입혀준다. 욘두가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것이다. “그(에고)가 네 아버지(father)였을진 몰라도, 네 아빠(daddy)는 아니었어. 네가 내 아들이어서 난 운이 좋구나.” 아이에게 필요한 건 정자를 제공한 아버지가 아니라 목숨 바쳐 자신을 지켜줄 아빠가 아닐까.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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