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노사관계에 ‘패턴 세터(pattern setter)’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유형 설정자’라고 한다. 한 기업 또는 산업의 노사관계가 다른 기업이나 산업의 기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한때 일본의 도요타 노조와 사용자 측의 관계가 일본 노사관계의 유형 설정자 역할을 했고, 미국의 자동차산업 노조들이나 독일의 산별노조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노사관계의 ‘패턴 세터’는 재벌 대기업인 현대와 삼성이었다. 현대차 등은 노동조합과 ‘전투적인 노사관계’를 형성했고, 삼성은 아예 ‘무노조 경영’을 기조로 삼았다. 한국 경제를 대표했던 두 기업에서 만들어진 이러한 노사관계는 수십 년간 한국 노사관계의 ‘패턴 세터’ 노릇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 현대와 삼성 두 재벌 대기업이 만들어왔던 그 방식은 더 이상 한국 노사관계의 ‘패턴’이 되지 못한다. 한때는 노동운동판 ‘낙수효과’라 할 수 있는, 타 부문으로의 노동조건 개선 효과로 유명했던 현대자동차 임금·단체교섭은 이제 대기업 정규직과 독점기업의 담합이라는 ‘그들만의 성’으로 전락했다. 막대한 이익을 방패로 노동조합을 불법으로 탄압했던 삼성의 행태는 ‘결사의 권리’라는 시민 기본권에 대한 도전이자 ‘경제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었다. 이제는 삼성도 무노조 경영이라는 반민주적 패턴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 노사관계의 새로운 ‘패턴 세터’는?

삼성과 현대로 대표되던 과거 패턴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잃어버린 것과는 별개로, 지금 한국 노사관계의 새로운 패턴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꽤 오랜 침묵이 흐를 수밖에 없다. 혹자는 2000년대 이후 급성장한 IT 분야의 새로운 대기업들에 주목할지도 모르겠다. 네이버와 카카오, 넥슨 등 IT 대기업들은 이미 기업가치 등에서 재벌그룹에 필적한다. 이들은 세습 경영으로 운영되는 재벌 대기업과는 달리 1960년대생이 자수성가해 이뤄낸 기업이다. 경영이나 조직문화에서도 기존의 고압적인 ‘회장님 조직’과는 다르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해당 기업들에서는 이미 젊은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그러나 이른바 ‘경제판 586’이라 할 수 있는 IT 대기업들의 경영진이 생각하는 노사관계 역시 아직까지는 재벌 대기업들이 해왔던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네이버는 노동조합이 자회사, 손자회사 직원까지 단일 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 받아들이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집단교섭을 요구했지만 사용자 측이 거부하고 있다. 카카오의 경우 카카오모빌리티에 대리기사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그들이 교섭을 요구했지만 사용자 측이 응하지 않고 있다. 마치 정치에서 학생운동 출신 586 그룹이 기존과 다른 새로운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IT 대기업들의 586 세대 경영진은 재벌 대기업들이 지난 50년간 못 해온 ‘좋은 노사관계’를 만드는 것이 사회에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이런 IT 대기업들이 몰려 있는 ‘판교 밸리’가 자리 잡은 경기 성남시가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기존 노동법상 노동자만이 아닌 ‘일하는 시민’ 모두에게 노동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일하는 시민을 위한 조례’가 추진 중이다. 이 시도는 흥미롭게도 노동운동가 출신의 586 세대 정치인인 은수미 시장이 주도한다. 네이버, 카카오, 넥슨 등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대부분 밀레니얼 세대이며 임금인상을 넘어 노동이사제 도입, 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 확립 등 종전의 노동조합과 다른 새로운 요구를 하고 있다. 이런 노력이 조금씩 성과를 내고 축적될 수 있다면 적어도 향후 한국 노사관계 패턴 세터의 한 축은 현대자동차의 울산이 아니라 IT 밸리 판교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기자명 조성주 (정치발전소 상임이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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