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 11월27일, 한양(서울)에 사는 양반 오희문은 충청도 일대의 친척집을 방문하고 전라도와 경상도에 사는 외거노비(원거리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고 주인에게 공물을 바치는 노비)로부터 신공을 거둘 목적으로 성문을 나섰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2년 4월13일, 그가 전북 장수에 머무를 때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때부터 무려 9년3개월 동안 충청도와 강원도를 떠도는 피란 생활을 한다. 그가 한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임진왜란이 종료(1598년 11월)하고 난 몇 해 뒤인 1601년 2월26일이다.

오희문은 한양을 나선 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한양에 다시 안착하고 난 다음 날 일기 쓰기를 종료했다. 그의 일기는 〈쇄미록(瑣尾錄)〉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 문서는 이순신의 〈난중일기〉, 유성룡의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기록물로 꼽힌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가 한글로 옮기고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펴낸 〈쇄미록〉의 완역본은 여섯 권에 달하지만, 최근에 완역본을 축약한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사회평론아카데미, 2020)이 나왔다. 원문의 흐름을 살리면서 반복되는 이야기를 줄인 이 책 덕택에 우리는 16세기 조선의 일상사와 임진왜란 때의 갖가지 비화를 생생하게 듣고 볼 수 있다.

이 기록을 읽으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오희문이 조선시대의 특권층이자 지배계층인 양반이었으면서도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국난을 당하여, 왕을 위해서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어떤 희생이나 봉사를 하겠다는 아무런 낌새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희문이 임진왜란이 벌어진 7년 동안 가장 열심히 근심한 것은 가족의 안위와 봉제사(奉祭祀), 자식들의 혼사(婚事)와 과거(科擧), 그리고 혼란 중에 말할 수 없이 드세지고 고삐가 풀려버린 노비들을 단속하는 일이었다. 한 나라의 지배층이 국난 앞에서 종묘사직보다 자신의 살길만 걱정했던 것은 오희문이 미래에 표나게 등장할 경화사족(京華士族)에 속했기 때문이다.

재미 역사학자 김자현은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너머북스, 2019)에서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을 겪고서야 비로소 “민족이 출현했다”라고 주장한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조선에 민족(Ⅰ)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민족 담론은 없었다. 김자현의 주장도 정확히 이것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에 처음으로 가시적이고 상징적이며 체계적인 민족 담론을 다량으로 유포하게 만들었고, 이전의 민족(Ⅰ)과 격이 다른 새로운 민족(Ⅱ)이 만들어졌다. 이때 민족 담론의 기반이 된 것은 팔도에서 일어난 의병(義兵)이다.

양반의 상호부조 위한 가렴주구

조선은 원래 성리학적 사회질서로 중앙집권화한 나라여서 개인이 사적으로 무장하거나 사병을 조직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의 의병은 모두 토적으로 의심되어 해산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선조가 궁금해했듯이, 관군은 쉽게 패하는데 의병은 싸울 때마다 이겼다. 의병장은 대부분 지방에 기반을 둔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이들은 왕이 파천한 상황에서 왕이 아니라 잔혹한 왜군으로부터 자신의 향촌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이들은 관군보다 승률이 높았다. 의병의 의기는 팔도를 외적으로부터 수호해야 할 신성한 땅으로 재발명했으며, 동시에 신분 차별 없이 외적과 대항해 싸웠던 의병 활동은 지위와 계층을 피상적으로 만들면서 민족이라는 본질적으로 균질한 주체를 만들었다. 한양에 집을 둔 오희문은 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비켜나 있었다. 그는 고달픈 피란 생활을 하며 “좋지 않은 시대에 사는 걸 한탄할 뿐이다”라고 썼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을 먹을 때 “나는 본래 죽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혼자만 밥을 지어 먹었다”라던 사람이다.

그가 쓴 일기에는 왜군에 협력하는 조선인, 남편이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처와 자식, 굶주린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 등 전쟁의 냉혹하고 처참한 풍경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일화는 오희문이 지방의 수령으로부터 각종 식품과 땔나무나 돗자리 등속의 생필품을 얻는 대목이다. 거의 모든 지방의 수령이 그에게 무상으로 선물을 하거나 행정적 편의를 베풀었다. 오희문이 큰 벼슬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새로운 고을에 도착할 때마다 오희문은 자신의 이름을 고을 수령에게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의 전갈을 받은 수령들의 반응은 대체로 한결같았다. “현감 김복억을 만났다. 전에 서로 일면식은 없었지만 명망을 들은 지 오래라며 후하게 대우해주었고, 노자로 백미 1말, 중미 1말, 콩 1말, 조기 1뭇, 절인 게 10마리, 감장 3되, 간장 반 되, 소금 1되를 주었다. 고마움을 금치 못하겠다.” 금구현 현감 김복억은 서울 양반 오희문과 일면식도 없지만, 조선의 양반들은 한 다리만 건너면 학연·지연·혈연 등으로 끈끈히 연결되어 있었다.

양반들은 이런 기회에 선물이라는 방식으로 친교를 맺고 인적 자원을 다졌다. 자신의 고을을 방문한 오희문을 잘 대접하면, 김복억은 훗날 그 자신이나 그의 친척·친구들이 오희문의 장남이 현감으로 있는 강원도 평강에서 그와 똑같은 편의를 얻게 된다. 〈양반의 사생활〉(푸른역사, 2008)을 쓴 하영휘는 이처럼 관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양반들의 세계를 왕래망(往來網) 사회라고 불렀고, 그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그 시대의 시장과 화폐경제가 낙후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문제는, 고을 수령들이 멀리서 찾아온 친지나 친구는 물론이고 낯모르는 양반을 환대하기 위해 자신의 곳간과 호주머니를 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흔히 조선시대 양반은 공과 사의 구분이 매우 엄격했다고 하는데, 오희문의 일기를 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조선시대 하면 떠오르는 탐관오리며 가렴주구는 그냥 생겨난 게 아니다. 양반들의 상호부조와 친교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나쁜 관리가 되어 백성의 재물을 무리하게 빼앗아야 했으니 그것은 일종의 제도였다. 조선은 패망한 지 오래지만, 2013년에 저질러진 강원랜드 채용비리 사건과 2019년에 터진 ‘조국 사태’는 돈과 지위와 인맥을 가진 대한민국의 상위 계층이 조선시대의 양반과 같은 상호부조로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훤히 드러냈다. 하승우는 〈신분피라미드 사회〉(이상북스, 2020)에서 이렇게 묻는다. “쓸모 있는 관계를 가진 사람들과 그런 관계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이런데도 한국이 과연 하나의 나라일까?”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