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정의당 김종철 대표(왼쪽)는 10월13일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노동시장 문제에 관해 대화했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깨겠다는 ‘진보의 금기’는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길게는 20년째 한국 사회에서 ‘도돌이표 논쟁’이 되고 있는 주제들이다.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변혁을 요구하는 게 진보다. 그동안 진보정당은 내부의 이해관계자, 특히 ‘조직된 중간계층’이 얽혀 있는 이슈에서는 거의 어김없이 성역에 부딪혀왔다. 연금 문제가 대표적이다. 예전엔 공무원 임금이 낮아서 후불임금 형태로 후하게 연금을 설계했다. 이젠 노동시장이 바뀌었다. 공무원은 고용안정과 임금 측면에서 노동시장의 중심부인데, 은퇴 뒤 일반 시민보다 후한 연금까지 누린다. 진보라면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공무원과 일반 시민을 하나의 제도 안에 둠으로써 ‘하후상박 연대’를 도모하자고 진보정당 대표가 말한 것을 환영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의 말이다.

세금에 대한 김종철 대표의 주장도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진보에게 세금은 연대의 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잠재력 있는 의제 중 하나인데, 그동안은 부자들을 ‘징벌’하는 수단 정도로 협소하게 받아들였다. 김종철 대표의 발언은, 세금을 다수 시민이 감당하고 책임지며 논의할 의제로 끌어들였다는 의미가 있다(오건호).”

김종철 대표는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을 결합한 ‘유연안정성(flexicurity)’ 모델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덴마크가 대표적이다. 해고 규제가 약해 이직이 잦은 대신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고, 재교육과 재취업을 지원하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강한 나라다.

한국은 고용이 유연하다는 덴마크보다도 평균 근속기간이 짧다.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노동사회학)는 “개별 기업 내 고용안정은 이미 일부에게만 가능한 시대다. 고용안정이라는 과제를 기업의 틀을 넘어 사회적으로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가 필요하다. 한 기업에서 고용이 조정되더라도 사회안전망을 통해 다른 기업으로 갈 수 있게 하고, 고용이 안정된 사람은 고용보험료를 더 많이 부담함으로써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연안정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는데, 진보정당의 대표가 이런 이야길 해주니 반갑다”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유연안정성 논의의 전제조건 중 하나로 ‘산별교섭(산업별 교섭) 제도화’를 들었다. 지금은 개별 기업의 사용자 측과 노동조합이 임금협상을 벌여 노동조건을 결정한다. 회사마다 임금이 천차만별이다. 이걸 특정 산업의 고용주 단체와 노동조합이 논의하게 되면, 해당 산업 내 임금격차를 줄일 수 있다. 한국도 2003년부터 금속노조, 2004년부터 보건의료노조가 산별교섭을 시행해오고 있다. 그러나 현대차 등 완성차 기업이 테이블에 나오지 않아 ‘무늬만 산별교섭’이란 비판을 받는다. 주요 기업이나 병원들의 임금은 여전히 개별 업체 수준에서 결정된다. 노동운동은 산별교섭을 촉진하는 일련의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연합뉴스2003년 5월6일 금속노조 96개 사업장을 대표하는 노사 대표가 첫 산별교섭을 갖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진보가 내놓지 못했던 노동시장 모델

설령 이런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정이환 교수는 “현재 일부 산별 협약에 있는 산업별 최저임금도 법정 최저임금보다 조금 높은 정도다. 기업별로 지불능력 격차가 큰 조건에서, 기존 대기업 노동자와 유사한 노동조건을 요구하면 당장 한계기업이 무너진다. 이런 문제에 대응하려면 (도산 기업과 실업자 대책을 포함해) 한국 노동시장이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지 그림이 있어야 한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을 말하려면 임금체계도 (오래 일할수록 많이 받는 연공임금이 아닌 직무급 등 형태로) 바꿔야 한다. 노동운동 또는 진보진영은 상향평준화를 주장했을 뿐, 어떤 모델이 진정으로 한국 노동시장 모델로서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별로 하지 않았다. 진보가 집권하려면 대안적 모델을 내놓고 시민을 설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진보가 대안적 노동시장 모델을 내놓고 시민을 설득해 장기 집권한 사례가 있다. 스웨덴 노총(LO)의 경제학자인 렌과 마이드너가 발전시킨 ‘렌-마이드너 모델’이 그것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사회민주당 정부가 부분 수용한 이 모델의 특징은 중앙집중화한 임금협상 시스템이다. 각 산업이나 기업의 수익성에 상관없이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는 비슷한 임금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고도로 생산적이고 경쟁력 있는 회사는 임금을 낮게 주는 셈이기 때문에 이윤이 오히려 증가한다. 경쟁력 없고 비효율적인 업체는 능력보다 많은 임금을 줘야 하기 때문에 운영을 개선하거나 문을 닫아야 한다. 이때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를 위해 국가는 재교육과 재배치를 책임진다. “기업의 효율성과 생산성 증가를 촉진하는 한편, 좀 더 평등한 임금구조를 만들어내면서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셰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1980년대를 풍미한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기업의 효율성과 생산성’은 고려할 주제가 되지 못한다. 그들의 목표는 완전히 다른 세상, 즉 ‘혁명’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를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을 지지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전체 사회·경제의 선순환과 모든 시민을 위한, 실질적으로 작동 가능한 국가 모델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정의당은 현재 공식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내걸진 않지만, 한국의 진보 역시 사실상 이 노선에 서 있다. 한 정의당 관계자는 “(1980년대의 진보운동을 주도한) 소위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 모두 ‘R(혁명)’을 추구해왔고, 그런 정서의 연장선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당이 전면에 내걸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 이래 진보정당이 해온 것은 내용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였다”라고 회고했다. 신정완 경북대 교수(경제통상학부)는 “지금은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아니며, 고령화와 세계화 속에서 존립 가능한 복지국가를 만드는 게 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경제의 효율성을 별로 훼손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비교적 높은 수준의 평등을 달성했다는 면에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념은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라고 말했다. 신임 진보정당 대표가 한국적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장을 열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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