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추리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중에 〈10만 분의 1의 우연〉이라는 책이 있다. 제목 그대로 한 사진작가가 특종 사진 한 장을 우연히 촬영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이 그 내용이다. 그런데 과연 그 정도의 우연, 10만이 아니라 100만 분의 1이라고 불러도 좋을 사건이 우리 책방에서도 벌어졌다.

계기는 내가 몇 해 전 쓴 책 〈탐서의 즐거움〉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책은 주로 우리나라에서 펴낸 1960~80년대 출판물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한 꼭지로 베스트셀러 작가 최인호가 쓴 〈맨발의 세계일주〉를 다뤘다.

〈별들의 고향〉이 100만 부 넘게 팔리자 출판사에서는 최인호에게 세계여행을 제안했다. 기간은 4개월로 다소 촉박한 일정이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후 펴낸 책 소식은 신문에 나올 정도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하얀색 코트 입은 사람이 접니다”

어느 날 한 여성 손님이 내게 이 책 원본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1975년에 단 한 번 나온 책이다. 손님은 내가 쓴 책을 보고 〈맨발의 세계일주〉를 알았다고 한다. 그 책 속엔 최인호가 세계를 여행하면서 겪은 재미난 일들이 특유의 재치 있는 문체로 가득 실려 있다. 손님은 그중에서 최인호가 스위스 취리히에 있을 때 우연히 전차 정류장에서 마주친 작가 ‘솔제니친’에 관한 일화가 책을 찾는 이유라고 했다.

〈수용소군도〉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솔제니친이라니! 최인호는 소련에서 추방당해 스위스에 머무르는 이 대작가를 한눈에 알아보고 멀리서 사진기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다가가 악수라도 하려 했으나 솔제니친은 갑자기 나타난 깡마른 동양인을 몹시 경계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렇게 작은 소동이 일어났고 최인호는 그 이야기를 당시에 찍은 사진과 함께 책에 공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님은 그 사진에 자신이 함께 찍혔다는 게 아닌가! “호텔 앞에 있는 정류장이고 그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어요. 저는 음악 공부를 하러 갔다가 머리를 식히려고 잠시 취리히에 여행을 갔죠. 거기서 솔제니친을 봤어요. 그런데 잠시 후 어떤 동양인 때문에 약간 해프닝이 일어났어요. 저는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과연 사진 속에는 솔제니친이 선 뒤로 다른 시민 몇 명이 같이 나왔다. 손님은 그중에서 하얀색 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게 바로 자기라는 거다. 하지만 사진 속 인물은 다른 물체에 가려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맨발의 세계일주〉최인호, 예문관, 1975년 초판

키가 나보다 더 큰 여성 손님은 담담하게 당시의 상황을 마치 지난주에 일어난 일처럼 술술 풀어냈다. 젊은 시절, 자신은 삶에서 특별한 일이라곤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알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회색이었다. 여행을 와서도 거의 호텔에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 앞 정류장에서 겪은 이 사소한 일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온종일 거리를 다니며 속으로 키득거렸다는 얘기다.

말 그대로 사소한 일이라 이 사건은 금방 잊혔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도 수십 년이 지나도록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쓴 책을 통해 다시금 그때의 추억이 되살아났고,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이 우연히 담긴 그 책을 찾고 싶어졌다. 손님은 말을 마친 뒤 일어나 책방을 나서며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사진이라 색이 많이 바랬군요. 하얀색처럼 보이지만 이 코트는 옅은 살구색이랍니다. 여태 한 번도 그리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십 대의 저는 꽤 멋쟁이였군요. 여기 사진 배경도 전부 회색처럼 보이는데 실은 참 아름다웠어요. 사진 속의 저를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네요. 곧 비가 그치고 오후엔 햇살이 좋을 거라고.”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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