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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당신의 손에 이 기사가 들어갔을 때면 미국 대선 결과가 나왔을 것이고 아마도 승자는 조 바이든이겠지만, 우리는 최종 결과를 보기 전에 이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11월5일 현재 시점에서, 가능한 미래는 셋입니다. 첫째, 민주당 후보 바이든의 승리와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승복. 둘째, 바이든의 승리, 그리고 트럼프가 상상 가능한 모든 이유와 상상도 못할 몇몇 이유를 내세워 불복하고 법원으로. 셋째, 아주 희박한 가능성으로, 트럼프의 뒤집기.

어떻게 될지 모를 때는 보통 세 이야기를 모두 준비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이야기, ‘도널드 트럼프’만 준비했습니다. 2020년 미국 대선의 화두는 “트럼프냐 아니냐”였습니다. 출구조사에서 “지지하는 후보를 당선시키러 나왔다”라고 답한 응답자만 보면 트럼프 지지가 52%, 바이든 지지가 47%입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후보를 떨어뜨리려 나왔다”라는 응답층에서는 트럼프 30%, 바이든 67%로, 바이든 지지가 압도적입니다. 트럼프를 떨어뜨리는 게 목적인 유권자가 선거 결과를 바꾼 셈입니다.

“트럼프냐 아니냐”에 답하려고 사상 최대 인원이 투표에 나섰습니다. 투표율은 67%로 추정되는데, 120년 만에 가장 높습니다. 트럼프를 막으려는 힘이 아주 약간 더 셌지만, 지키려는 힘도 투표 전 예측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추세대로라면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선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표를 받게 될 겁니다. 미국의 저명한 데이터분석가 네이트 실버는 바이든 8180만 표, 트럼프 7490만 표로 최종 득표를 예측했습니다. 둘 다 2008년 버락 오바마의 6950만 표를 뛰어넘는 역대 기록입니다.  

이 거대한 물결은, 도널드 트럼프의 4년이 곧 잊힐 해프닝이 아니라 어떤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쩌면 ‘트럼프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시대는 트럼프라는 자연인이 퇴장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또 누가 알겠습니까. 미국 정치의 모든 규범을 무시하는 트럼프라면 4년 후 재도전을 선언할 수도 있겠지요. ‘임기를 건너뛴 재선 대통령’은 19세기에 딱 한 번 나왔습니다. 4년 후 트럼프는 지금 바이든과 나이가 같습니다. 이것은 공화당 계열 선거전략가이자 반(反)트럼프 활동가인 팀 밀러가 10월16일 〈롤링스톤〉지 칼럼에서 제기한 가능성입니다. 밀러는 이걸로 독자들을 집중시킨 후(“이 대목에서 식은땀을 흘려도 좋다”) 이렇게 덧붙입니다. “트럼프식 정치는 앞으로 수십 년간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이제 공화당 유권자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최근 30년간,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비주류는 늘 공화당 내부 경쟁의 만만찮은 도전자였습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던 1992년, 공화당 경선에서 팻 뷰캐넌이 도전자로 떠오릅니다. 뷰캐넌의 노선은 공화당 주류 노선과는 꽤 달랐으니, ‘이민 반대’와 ‘자유무역 제한’을 내세웠습니다. 트럼프가 외친 바로 그 노선입니다. 반면 공화당 주류는 작은 정부, 자유무역, 국제 개입주의를 중시했습니다. 공화당 주류가 이질적 비주류에 도전받는 구도는 적어도 한 세대에 걸친 장구한 역사가 있고, 트럼프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종이 아니라 그 역사의 계승자입니다.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설명해선 안 된다  

트럼프의 승리 이후 공화당은 빠르게 ‘트럼프화’했습니다. 아버지 부시와 달리, 재선 경선 과정에서 트럼프는 공화당 옛 주류의 도전을 사실상 받지 않았습니다. 공화당 경선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은 ‘트럼프에 대한 충성심’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분석도 제기됐습니다. ‘반(反)이민·반(反)자유무역·반(反)국제주의’로 뭉친 트럼프 지지 블록은 이제 공화당 신주류로 올라섰습니다. 이 신주류의 위력은 트럼프를 ‘역대 2위 득표자’로 만들 만큼 강력하고, 수명은 자연인 트럼프의 정치적 수명보다 틀림없이 길 것입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2012년 오바마 지지자 중 대략 10%를 자기 지지층으로 가져왔습니다. 주로 대학을 다니지 않은 백인 남성 노동자 계층이었습니다. 미국 유권자들을 백인과 비(非)백인, 대졸자와 비(非)대졸자를 기준으로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 1〉은 2020년 대선 출구조사에서 각 그룹의 트럼프 지지율을 보여줍니다. 백인·비(非)대졸자 그룹이 64%로 압도적입니다. 백인은 트럼프 지지의 인종적 기반이지만, 대졸자들이 민주당 지지로 기울기 때문에 백인·대졸자 그룹에서는 효과가 상쇄됩니다. 여기서는 두 후보 지지가 49%로 같습니다.

그 결과로, ‘러스트 벨트(녹슨 지대)’라고 불리는, 미국 북부의 쇠퇴하는 제조업 지대에 정치적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미시간·위스콘신·펜실베이니아 세 곳은 1992년 이후 민주당이 진 적 없는 텃밭인데, 트럼프는 2016년에 셋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이번에도 셋 모두 1~2%포인트 차이 격전을 펼치면서 미시간과 위스콘신이 아슬아슬하게 바이든으로 넘어갔습니다(펜실베이니아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세 곳이 이번에도 트럼프로 기울었다면, 그가 재선 대통령이 됐을 겁니다. 이것도 충분히 가능한 미래였습니다. 넉넉하게 민주당을 찍던 제조업 지대가 ‘스윙 스테이트(양당 격전지)’로 변해가는 추세가 뚜렷합니다. 대학을 다니지 않은 백인 남성 노동자들은 자유무역과 이민이 자기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느끼고, 미국의 국제주의가 자국민 대신 외국인에게 내 세금을 쓰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시간과 위스콘신에서 바이든의 승리는 이 추세를 반전시킨 결과가 아니라, 이 추세에도 불구하고 ‘반(反)트럼프’가 결집해 얻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트럼프 시대의 요체는 이렇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뒤처지고, 소외된, 인종과 젠더 말고는 비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우파에 투표합니다. 그 결과 ‘고소득자(이들은 원래 우파에 투표합니다)와 백인 소외계층 연합’이라는 아주 독특한 우파 투표블록이 탄생합니다. 트럼프는 이걸 두 번 만들어냈습니다. 소득별 지지율을 보면, 연소득 5만 달러 이하, 5만~10만 달러, 10만 달러 이상 세 그룹의 트럼프 지지율은 각각 42%, 43%, 54%입니다.

‘고소득자와 백인 소외계층 연합’은 대중 민주주의 시대가 열린 후로 가장 수수께끼 같은 구조변동일지 모릅니다. ‘뒤처진 사람들을 대변하는 좌파 정당’은 대중 민주주의 시대의 기본 문법인데, 이게 흔들리는 겁니다.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한 방법으로 등장하는 키워드가 바로 ‘포퓰리즘’입니다. 대중의 비합리적 열정이라는 뉘앙스를 깔고 있는데, 이것으로 수수께끼는 풀렸다기보다는 그냥 사라집니다. 비합리적이라 그렇다, 끝.

토마 피케티는 불평등 구조를 다룬 〈21세기 자본〉으로 슈퍼스타가 된 프랑스인 경제학자입니다. 그는 ‘포퓰리즘’이 무언가 심대한 현상을 제대로 포착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내가 보기엔 ‘포퓰리즘’이라는 통념은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요? 그의 분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피케티의 사분면’과 실패한 좌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50~1960년대에, 좌파 정당의 지지 기반은 저학력·저소득 노동자였습니다. 1970년대 이후 대졸 유권자가 좌파 정당 지지층으로 떠올라서, 21세기에는 대세가 됩니다. 대학에 가는 사람이 갈수록 늘었는데, 이들은 진보 성향이 강했습니다. 아래 〈그림 2〉는 미국·영국·프랑스의 대졸 유권자들이 좌파 정당에 투표한 비율에서, 고졸 이하 유권자들이 좌파 정당에 투표한 비율을 뺀 값입니다. 즉, 그래프에서 플러스 값이 클수록 고학력 유권자의 영향력이 강하고, 마이너스 값이 클수록 저학력 유권자의 영향력이 강합니다. 세 나라 모두, 좌파 정당은 대졸자의 정당이 되어갔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그 이유입니다. 피케티는 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정치의 기본 갈등축이 두 개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는 ‘소유 문제’, 또 하나는 ‘경계 문제’입니다. 소유 문제란 경제적 자원을 재분배하고 불평등에 맞서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유권자들은 재분배에 대한 견해로 갈라집니다. 피케티는 소유 문제의 양편을 평등주의와 불평등주의로 부릅니다.

경계 문제란 무엇일까요? 재분배든 뭐든 정치적인 행동을 하려면 우선, 우리 정치 공동체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가 ‘우리’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올해 8월에는 경기도가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외국인을 제외했습니다. 앞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에 외국인을 빼면 평등권 침해라고 지적했는데, 그걸 수용하지 않은 겁니다. 경계 문제가 정치의 갈등축이 되는 사례입니다. 경계 문제에서 유권자들은 ‘우리’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놓고 갈라집니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경계선 문제는 인종이었습니다. 21세기 선진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경계선 문제는 이민입니다. 이민은 인종과 종교가 뒤엉켜 있는 경계 문제의 정수입니다. 피케티는 경계 문제의 양편을 국제주의(경계선에 관대한 태도)와 토착주의(경계선에 엄격한 태도)로 부릅니다.

기본 갈등축 두 개를 조합하면 사분면을 그릴 수 있고(아래 〈그림 3〉), 가능한 정치노선은 네 개가 나옵니다. 이민에 개방적인 태도와 강력한 재분배 정책이 조합되면 ‘국제주의·평등주의’가 됩니다.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가 이 노선이었습니다. 이민에 개방적인 태도와 재분배에 소극적인 정책이 조합되면 ‘국제주의·불평등주의’가 됩니다. 미국 민주당 주류가 여기에 가깝고, 공화당 옛 주류는 더 선명하게 여기 있습니다. 이민에 배타적인 태도와 강력한 재분배 정책이 조합될 수도 있습니다. 이 ‘토착주의·평등주의’는 프랑스의 극우파 지도자 마린 르펜이 대표적입니다. 그녀는 강력한 반(反)이민과 사회복지 확대를 조합하여, 한때 사회당을 찍던 중하층 노동자들을 지지기반으로 확보했습니다. 이민에 배타적인 태도와 재분배에 소극적인 정책이 결합하면 ‘토착주의·불평등주의’인데, 도널드 트럼프가 여기 있습니다. 그는 자유무역에는 시큰둥했지만 부자감세에는 열정적이었습니다.

이제 피케티가 ‘포퓰리즘’이란 설명을 거부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피케티의 사분면에서 보면, 버니 샌더스와 마린 르펜과 도널드 트럼프는 모두 노선이 다른 정치인입니다. 특히 샌더스와 트럼프는 아예 정반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들 모두가 ‘포퓰리스트’로 불렸습니다. 국제주의적이면서 재분배에는 소극적인 태도(‘국제주의·불평등주의’)가 서구 정치의 주류였기 때문에, 주류의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른 정치노선들이 모두 ‘포퓰리스트’로 뭉뚱그려 불렸다는 겁니다.

이 사분면에서 진정으로 흥미로운 대목은, 서구 정치의 좌파와 우파가 모두 ‘국제주의·불평등주의’ 블록에 모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파는 여기가 원래 자리여서 그렇다지만, 좌파는 왜 이 자리에 와 있을까요? 피케티는 좌파 정치가 원래 자리인 ‘국제주의·평등주의’에서 ‘국제주의·불평등주의’로 서서히 미끄러졌으며, 이것이 1970년대 이후 정치가 고장 난 근본 이유라고 주장합니다. 정치가 재분배를 다루는 데 실패하면서, 즉 소유 문제를 중심축으로 끌고 가지 못하면서, 좌절한 유권자들이 경계 문제로 몰려갔습니다. 21세기 들어 정체성 정치가 분출한 것은 인간 본성 같은 이유가 아니라 정치가 고장 났기 때문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좌파가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970년대 이후 선진국 좌파 정당들은 불평등 문제를 다룰 역량을 갈수록 잃어갔습니다. 거대한 두 조류, 세계화와 고학력화 때문입니다. 세계화는 국가 차원에서 재분배 정책을 펼 공간을 좁혔습니다. 이제 기업이나 부자에게 세율을 높이려 하면 이들은 더 연결된 세계를 타고 조세를 회피합니다. 역으로 정부가 세율 덤핑 경쟁을 펼치는 처지로 몰렸습니다. 이러면 재분배의 도구가 사라집니다. 좌파 정당이 세계화 시대에도 작동하는 자원 재분배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자 저학력·저소득 노동계층이 좌파 정당에서 이탈했습니다.

사람들이 갈수록 많이 대학에 가는 고학력화 문제도 좌파 정당에는 큰 도전입니다. 초중고 교육은 국가가 투자해서 국민 모두에게 제공하면 몇 배의 이득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대학 교육은 기본적으로 이런 전략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국민 모두가 대학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 교육을 받을 지적 역량을 모두가 균질하게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초중고 교육을 확대하면 매우 뚜렷하게 평등화 효과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는 고학력화는 아직까지는 불평등의 동력입니다. 좌파 정당이 대졸자의 당이 되는 경향은 ‘먹고살 만한 사람들’의 관심사로 좌파 정당을 끌어당겼습니다. 저학력 유권자는 이탈하고 고학력 유권자가 유입되는 두 힘이 맞물린 결과가 〈그림 2〉입니다. 출구조사에서 대졸자의 바이든 지지율은 55%, 비(非)대졸자는 49%입니다.

ⓒEPA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 바이든이 10월27일 애틀랜타의 드라이브인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러니까, 20세기 후반부터 좌파 정당은 세계화와 고학력화로 대표되는 새 시대의 도전에 답을 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세계화에 맞서 국제적인 재분배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려면 초국가적인 정치 역량이 필요한데, 그런 건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초국가 정치단위인 유럽연합은 재분배 질서를 만들기보다는, 재정지출 자율성을 옥죄는 등 각국의 재분배 역량을 제약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소유 문제는 시장의 ‘자연법칙’이라 정치가 건드릴 수 없다는 합의가 정치의 공간을 대체했습니다. 사분면의 좁은 한구석에 좌우 주류 정치가 모여든 결과는 주류 정치 자체의 위기로 나타납니다. 샌더스 현상, 트럼프의 승리, 북서유럽의 극우파 약진을 한데 묶을 말이 있다면 ‘포퓰리즘’이 아니라 ‘주류 정치의 실패’일 것입니다.

이 사분면은 특정 정치세력의 궤적 변화를 역사적으로 볼 때도 유용합니다. 19세기에 미국 민주당은 노예제와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보수정당이었습니다. 소유 문제에서는 불평등주의, 경계 문제에서는 토착주의(경계선에 엄격한 태도)였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가동한 ‘뉴딜’ 프로젝트는, 민주당을 인종주의적 남부와 노동계급이 연합하는 정당으로 바꿔놓습니다. 경계 문제에서는 토착주의를 유지하면서, 소유 문제에서 평등주의로 이동한 겁니다.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 집권기에 민주당은 민권법을 들고 인종차별에 맞서며 또 한번 변신합니다. 이 시기 민주당은 경계선에 관대한 국제주의와 평등주의로 옮겨갑니다.

21세기의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이후 세계화와 고학력화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민주당은 시나브로 국제주의·불평등주의로 미끄러집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집권기(1993~2001년)에 이런 변화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 민주당은 세 세기에 걸쳐 피케티의 사분면을 일주합니다. 그리고 민주당을 다시 국제주의·평등주의로 옮겨가려는 힘이 간판 인물을 바꿔가며 분출합니다. 그게 4년 전의 샌더스 현상이었고, 한때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대선주자로 밀어올린 힘이고, ‘AOC’라 불리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 새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이유입니다. 물론 아직은 힐러리 클린턴에서 조 바이든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주류가 이 흐름을 제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뷰캐넌식 토착주의가 아버지 부시로 대표되던 주류에 제어되던 1992년 공화당 경선 상황과 닮았습니다.

ⓒEPA미국 대선 조기투표 첫날인 10월26일 메릴랜드주의 한 투표소에서 아침부터 유권자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피케티의 렌즈를 적용하면, 우리가 ‘트럼프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트럼프 시대는 정치가 소유의 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한 후 분출하는 온갖 반작용 중 가장 굵직한 줄기입니다. 토착주의가 더 나은 답을 내주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지만(세계화에 대한 초국가적 대응은 논리상 국제주의를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경계의 문제는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갈등축입니다. 트럼프와 북서유럽 극우파는 강력한 토착주의 덕분에 정권을 잡거나 유력한 대안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소유의 문제가 실패한 자리에 경계의 문제를 끌고 들어오는 전략은 집권에 다가갈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반면에, 소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21세기판 국제주의·평등주의 노선은 아직 성공 사례가 없습니다. 경계의 문제가 누군가 경계선 밖의 적을 비난하는 것으로 간편하게 작동하는 반면, 소유의 문제는 대안 프로그램을 요구합니다. 20세기에는 복지국가 프로그램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21세기에는 세계화와 고학력화 등 새 시대의 도전을 뛰어넘는 프로그램이 무엇일지 아직 불투명합니다. 샌더스도 워런도 “현실을 모른다” “경제를 망가뜨릴 것이다”라는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 결국 실패했습니다. 토착주의 노선은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를 국제주의·평등주의 노선은 감당해야 하므로 전망은 늘 뿌옇습니다. 트럼프가 퇴장한 후에도 우리 시대를 ‘트럼프 시대’로 부를 수 있다면, 이런 구조적 비대칭도 한몫을 합니다.

우리는 아직 트럼프 시대의 또 다른 중대한 특성을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시대는 민주주의 제도와 규범이 총체적으로 흔들리고,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너지는 일련의 규칙 붕괴를 또 다른 축으로 합니다. 트럼프라는 강력한 개성을 매개로, 둘은 이어져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원리는 지극히 민주적입니다. 트럼프는 그걸 민주주의 제도와 규범을 해킹하는 방식으로 작동시킵니다. 트럼프 집권기의 여러 역설 중에서도 첫손에 꼽을 역설이 이것입니다.

11월5일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에 지더라도 승복 선언을 할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수차례 공언한 대로 선거 결과를 법원으로 끌고 간다면, 미국 민주주의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민주주의 최대의 장점은 ‘권력 승계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입니다. 권력 승계 절차를 뒤흔드는 공격은 그러므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해킹인 셈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후속으로 쓰게 될지도 앞으로 며칠 안에 나올 트럼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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