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미국의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아동 노동자. 하루 16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사진가 루이스 하인 작품.

요즘 택배는 새벽에도 오고 한밤중에도 온다. 해 뜨면 기다리고 해 지면 포기하던 전과는 다르다. 택배는 24시간 분주히 오간다. 노동강도 역시 엄청나다. 심한 경우 하루 20시간 노동에 처리 물량도 200건을 넘긴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택배 왔다”라고 이야기할 시간도, “고생했다”라고 감사할 틈도 없다. 며칠 전에 ‘손석희 시계’로 유명한 카시오 전자시계를 택배로 주문했다. 2만원짜리 시계를 2500원에 택배로 받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방에 들어와 요즘 말로 ‘언박싱’을 한 후 초등학교 때 가져본 바로 그 시계를 손목에 찼다. 아날로그시계와 달리 이 전자시계는 오직 현재만 표시한다. 그래도 초 단위가 바뀌며 변화를 느낀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우리를 지겹게 괴롭히는 환상일 뿐이다. 흐르는 시간은 없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쩌나? 우리는 여전히 지나간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를 주시하며 미래를 기대한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과거의 ‘빛’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삼고 있다. 흐르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리학자들의 말과 우리의 직관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

시계를 유심히 쳐다보면 카메라와 닮았다. 시계는 시간을 쪼갠 후 상징(시침·초침·숫자 등)을 통해 현재를 보여준다. 카메라 셔터도 시간을 쪼개 사물의 빛으로 ‘지금’을 보여준다. 심지어 중대형 카메라에 많이 쓰이는 리프셔터(셔터 날이 나뭇잎처럼 생겨 붙은 이름)는 스프링과 톱니만으로 500분의 1초까지 시간을 쪼개준다. 그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통해 우리는 ‘지금의 빛’이 어떤 속도로 잘려 나가는지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 대형 카메라에 사용되는 리프셔터는 영롱한 렌즈 알과 어울리면서 보석과 금속 기계의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시계업체인 세이코가 시계와 함께 셔터를 제조한 것이 이해될 정도다.

그러나 이 500분의 1초도, 최근 광학기술이 레이저를 통해 분자의 상태를 펨토초(1000조 분의 1초) 단위로 포착하는 것에 비하면 ‘영원의 시간’에 가깝다. 현대 과학에서는 심지어 ‘플랑크 시간(10의 43제곱 분의 1초)’까지 논의되는데,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순간’을 떠올리면 시간의 흐름이란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시작된 가공할 노동시간

인간의 노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점점 더 분초 단위로 쪼개지고 있다. 1908년 사진가 루이스 하인은 리프셔터가 달린 대형 카메라를 들고 하루 16시간씩 노동에 시달리는 아동 노동자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순간이 자본가와 시장에는 아이들 노동의 가치를 계산하는 시간이었을 터이다. 그래도 인류는 꾸준히 노동의 시간을 줄여왔으며, ‘하루 8시간 노동제’는 그 집단적 노력의 성과였다. 하지만 디지털플랫폼이 등장한 첨단 시대에 살고 있는 ‘불안정 노동자’들은 다시 가공할 노동시간에 시달린다. 내게 시계를 전해주고 간 청년 택배 노동자는 자기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황급히 다음 배달지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에서 쪼개지는 시간을 느낀다.

기자명 이상엽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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