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정치와 경제 분야의 여러 제도는 물론이고 교육, 의료 심지어 문화나 종교 같은 영역 또한 근본적으로 개조해서 “시장 의 지배가 전 지구의 인간 생활,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질지어다”라는 것이 시장경제라는 주술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시장경제라는 목표는 과연 달성될 수 있는 것인가? 그 이상대로 실현되었던 적이 있었나? 혹시 카프카의 ‘성(城)’처럼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모두 한번 들어가보려고 주변만 서성이다 늙어 죽고 마는 그런 곳은 아닐까.
30년간 지구를 지배해온 ‘과학적 진리’에 이렇게 허술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시장의 완전한 유연성’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시장경제 작동을 위한 필수 요소는 완벽하게 탄력적인 노동시장이다. 하이에크의 스승 미제스는 “실업이 발생하는 것은 노동자가 노동시장에 나온 일자리와 임금 수준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감히 일의 성격과 임금을 놓고 가리고 흥정하려 들기 때문이다”라고 쏘아붙인다. 그런데 미제스 말대로 하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예컨대,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던 ㄱ씨는 수강생이 줄어들거나 더 적은 임금으로 교수 일을 하려는 자가 나타나면 그 즉시 문자로 해고를 통고받는다. 그러면 ㄱ씨는 수입이 거의 10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 그 다음 날, 마침 일자리가 난 광주의 어느 아파트 수위직으로 가족을 버리고 옮겨간다. 서툰 재주에 그나마 다음 달 또 잘리자, 이번에는 강원도 어딘가로 광부 일자리를 찾아간다….
시장 사회는 ‘골룸과 스미골’의 자작 2인극
이런 세상이 정말로 있을 수 있을까? 필자는 경제학과 교수들을 단박에 불쾌하게 만드는 법을 안다. ‘노동시장 유연성’을 주장하는 경제학과 교수들부터 자신의 이론을 실천하려면 종신고용을 포기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다. 제아무리 선량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경제학과 교수도 이렇게 막돼먹은 주장 앞에 서면 즉시 낯을 붉히며 짜증을 내곤 한다.
그렇다면 이 ‘시장경제’라는 이상은 본래부터 달성 불가능한 유토피아가 아닐까. 이런 유토피아를 앞세운 신자유주의란, 사실 생산력 발전으로 인류 진화의 새 장을 열겠다고 했던 공산주의 사상 이상으로 허망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것을 현실에 실현시키겠다고 우격다짐을 하게 되면 그 반대 방향의 우격다짐이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결국 아름답고 조화로운 시장의 자기 조정은커녕 사회 전체가 두 방향의 우격다짐 사이에 휘말려, 등이 터지고 가랑이가 찢어지게 되는 대혼란만 빚어지는 게 아닐까.
시장 사회는 한편으로 완벽한 시장 기율을 확립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잔혹한 매질을 가한다. 그런데 채 몇 대 맞기도 전에 너무 가혹하다고 온갖 변칙을 만들어내 요리조리 몸을 뺀다. 그러다가 다시 스스로에게 너무 기율이 빠졌다고 시장 원칙을 강요하다가 다시 몸을 빼낸다. 전체 사회가 이렇게 어이없는 ‘골룸’과 ‘스미골’의 자작 2인극에 휘말려 들게 되면, 역사 전체는 엄청난 폭과 깊이의 변동을 겪는다. 폴라니는 산업혁명 이래 ‘자유무역-제국주의-파시즘과 사회주의-세계대전’으로 얼룩진 19세기와 20세기 미증유의 역사적 격동을,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다가 벌어진 ‘거대한 전환’의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폴라니가 스스로 인정하듯,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역사를 이렇게 간단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해 보일 것이다. 그래서 폴라니는 인간 역사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장이 인간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특징이 되었는지, 시장경제를 건설하는 것만이 인류가 번영과 문명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유토피아의 신화는 왜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신화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단이 벌어지게 되었는지를 역사·인류학·정치학·국제정치학·경제학·사회학·철학과 사회사상 등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철저하게 논증한다.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는 순간에 서다
1944년에 출판된 〈거대한 전환〉은 처음에는 거의 무시되었다가, 20세기가 끝날 무렵에야 사회과학의 고전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을 꼼꼼히 읽고 침잠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이에 근거한 사회적 운동과 담론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더욱 적었다. 이 점에서 폴라니의 대극에 서 있다 할 하이에크의 〈노예로의 길〉(이 책도 1944년에 출판되었다)과 크게 대조된다. 후자가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운동의 지적·정신적 원천으로 작동했음에 반해, 폴라니의 시장 비판과 그가 대안으로 제시했던 ‘살림살이 경제학’(substantive economics)은 사실상 일부 경제인류학자 이외에는 거의 들어본 이조차 없었으니까.
주주 가치 경영의 창시자라 할 잭 웰치는 주주자본주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생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마저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정치적 수사를 사용했다. 지금 누군가 현 사태 앞에서 지난 30년간 그랬던 것처럼 세금 감면과 탈규제만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주장한다면 짜증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폴라니의 시각이 지금처럼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시기를 만나기 힘들다.
물론 상황은 간단하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 지난 30년간 번성해온 금융 체제와 질서를 회생시켜보려는 노력은 이미 진행 중이며, 노무현 정권을 이어 ‘한국형 신자유주의’ 건설에 전념하고 있는 현 정부의 정책도 요지부동이다. 그런데 이렇게 엉거주춤한 현재의 ‘인격 분열적’ 상황이, 1930년대와 같은 ‘거대한 전환’이 막 시작되는 찰나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증을 강하게 만든다.
시장이라는 거대한 유토피아의 환상이 무너지는 날, 우리 사는 세상은 어떻게 될까. 레드 제플린이 불렀던 미국 블루스의 고전 〈둑이 무너지는 날〉(When the Levee Breaks)의 가사가 지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리면 둑이 무너질 거야/둑이 무너지면 어디로 가야 하나//저놈의 낡은 둑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