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대학을 떠나 지역공동체 활동을 하는 사회학자 조형근씨(왼쪽)와 서울 연신내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노명우 교수가 만났다.

사회학자다. 교수로 대학에 몸담았거나 현재 몸담고 있다. 서점을 기반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노명우·조형근씨의 공통점이자 두 사람에게 만남을 청한 이유였다.

노명우씨가 운영하는 니은서점은 2018년 9월 서울 은평구 연신내 골목길에 문을 열었다.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 전문서점이다. 좋은 책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사람을 북텐더라고 부른다. 그는 ‘마스터 북텐더’다.

조형근씨의 활동 근거지인 쩜오책방은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에 있다. 협동조합 형태로, 동네서점을 표방한다. 각종 모임과 강의가 이뤄지는 곳이다. ‘마을의 거실’ 노릇을 한다. 두 서점은 각각 지속 가능한 적자, 지속 가능한 ‘덕질’을 추구한다.

서점에서 어떤 가능성을 확인했던 두 사회학자가 대학 안에서는 위기를 감지했다. 1년 전 조씨가 〈한겨레〉에 쓴 ‘대학을 떠나며’ 칼럼이 큰 화제가 되었다. 1년 남짓의 정규직 교수 노릇을 그만두며 쓴 글이었다. 공부가 좋고 가르치기를 즐겼으나 자신은 대학·교육부·한국연구재단이 요구하는 실적 경쟁에 부적합했다고 고백했다. 수많은 학술행사와 잡무, 끝없는 회의와 서류작업에 탈진한 그는 황폐해진 대학과 지식생산 체계의 문제를 지적했다. 사치스러운 고민이라며 고까워하는 시선도 있었으나 대학 구성원 대부분이 지지와 공감을 보냈다. 그는 살고 있는 마을로 돌아가 지역연구소 ‘소셜랩 접경지대’를 만들었다. 6년여 전 우연히 시작된 마을살이를 계기로 지역공동체와 관련된 실험을 진행 중이다.

두 사람은 2000년 무렵, 문화연대에서 월간지 편집위원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각자가 경험한 서점과 대학에 관해 물었다. 최근 서점인이자 영세자영업자로서의 2년을 기록한 책 〈이러다 잘될지도 몰라, 니은서점〉을 출간한 노명우씨는 파주의 임대료를 궁금해했다.

각자의 근황을 들려달라.

조형근:백수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 뭔가 제안을 받을 때마다 응하다가 능력치를 벗어났다. 책 쓰는 걸 중심에 놓자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집필을 포기했다. 주 3일, 5개월짜리 강연을 하는 중이다.

노명우:최근 대전, 부산, 대구의 서점 투어를 했다. 니은서점에만 있으면 내가 향수에 젖어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나를 학자로 만들어준 건 대학보다는 서점이다. 당시(1980년대) 대학은 교육을 하는 데가 아니었다. 학생이 수업에 안 들어가고 교수가 휴강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지하철에서 학교까지 두세 군데 서점이 있었고 삐삐나 핸드폰이 없던 시절엔 서점이 서로 연락하고 만나는 창구 역할을 했다. 평생 가장 많은 책을 읽은 때가 20대였다. 현재까지도 지적 자산이 되고 있다. 독립서점들을 다니면 오히려 ‘여기에 미래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너지를 받고 온다.

독립서점에서 미래를 보는 이유는?

노명우:책 모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투어에서 책방들을 순회했는데 그중 두 군데는 내가 방문했을 때 독서모임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모여 진지하게 서로 이야기 나누는 기회와 장소가 어디일까. 카페에선 시험공부를 하고 인터넷은 공론장이기보다 치고받고 싸우는 감정의 쓰레기통이다. SNS를 하긴 하지만 내가 얼마나 잘 사는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만족스럽지는 않다. 서점에 가니 인터넷 댓글창, 카페에서 볼 수 없던 사회의 단면을 보게 되었고 그게 희망적이었다.

두 분이 참여하는 두 서점의 특징은?

ⓒ시사IN 이명익경기도 파주시 문발동에 있는 쩜오책방은 협동조합 형태로, 동네서점을 표방한다.

조형근:쩜오책방은 마을의 문화 중심지 정도라고 할 수 있는 동네 카페에 숍앤숍 형태로 작게 시작했다. 시작한 사람들의 슬로건은 ‘지속 가능한 덕질’이었다. 애초 이걸로 돈 벌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 다섯 분이 200만원씩 내서 2년 해봤는데 놀랍게도 20만원 흑자였다. 인건비가 안 들어가서다. 더 많은 사람들과 협동조합을 해보자 해서 2018년 두 번째 출발을 했다. 니은서점도 마찬가지겠지만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서점이 모델이 될 수 없다.

노명우:우리는 ‘지속 가능한 적자’가 목표다(웃음). 독립서점은 정신을 표현하는 용어이고, 동네서점이라고 하기엔 약간 부족하다. 일단 내가 그 동네(연신내)에 살지 않는다. 가장 적절한 표현은 전문서점이다. 안 팔리면 내가 사야 하기 때문에 ‘내가 살 의사가 있느냐’가 책 선정의 중요한 기준이다. 모든 책을 다룰 수 없고 내 관심과 취향이라는 좁은 범위 안에서 아래로 깊이 내려가는 게 취할 수 있는 방향이다.

조형근:우리같이 시골에 있는 서점은 전문서점을 표방했다가는 바로 망할 것 같다(웃음). 농담 삼아 ‘신 시골’이라고 한다. 인문사회과학 쪽이 많지만 조합원들의 취향과 안목이 골고루 범벅되어 있다. 동네 서점을 표방한다. 최근의 반성이라면, 매출이 늘었는데(두 서점 모두 1차 재난지원금이 풀린 뒤, 매출이 두 배 이상 늘었다.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게 동네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란 점이다. 독서모임,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방송장비 덕분에 줌(zoom)과 유튜브 동시 생방송으로 그럴듯하게 진행하고 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인근 지역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같은 동네 이웃이 적다. 옆집에 있는 분들은 여전히 서점이 뭐 하는 곳인지 모르기도 한다. 작게 운영할 때는 ‘월간 이웃’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이 출연자로 나와 자기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였다. 캣맘이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삶에 대해, 〈스타워즈〉 덕후가 〈스타워즈〉에 대해 말하는 식이다. 지난해 독립공간으로 옮기고 규모가 커지면서 동네서점으로서 드는 고민이 깊어졌다.

왜 서점인가? 지역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는 것 같다.

조형근: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전제부터 말하자면 지역이 현 시대 문제를 해결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인 건 맞지만 지역은 지역 자체의 문제가 있다. 여기 살면서도 늘 좋은 게 아니고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념이라기보다 생활로서의 민주주의가 뭔지 생각하고 배울 기회가 생긴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합창단만 해도 어떤 사람은 좀 더 잘했으면 좋겠고 누구는 그저 즐기는 게 목표다. 알게 모르게 신경전이 있다. 선곡도 운동권 가요를 하려고 하면 누구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오만 가지 이슈가 지역에 있을 수 있다. 동네가 공단 근처라 중국 동포가 늘고 있다. 같은 주민인데 활동 시야에 없다가 얘기를 듣고야 알게 됐다. 접점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활에서 그런 걸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지역이고 서점인 것 같다.

ⓒ출판사 클 제공인문·사회과학· 예술 전문서점인 니은서점. ‘지속 가능한 적자’가 목표다.

니은서점은 의사결정이 수월할 것 같은데.

노명우:내 마음이다(웃음). 서점을 구상할 때 ‘뜻 맞는 사람끼리 모여 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의사결정이 오래 걸리면 에너지 손실이 너무 심하다. 현안 대응에 빨라야 하는 면도 있다. 책이 나오고 주목받고 사라지는 주기가 짧아져서 긴밀히 대응해야 하는데 의사결정이 늘어지면 쉽지 않다. 왜 서점이었냐면 사회학자로서 현장에 대한 감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교수가 되기 전 시간강사를 할 때는 무지하게 쏘다니며 사회의 여러 모습을 봤다. 대학에 임용되면서 그 감각을 상실한 느낌이었다. 대학이 가진 편안함이 사회학자에게 자극을 주지 못하니까 위기라고 생각했다. 현장이 필요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라는 추상적인 범주가 내게는 현장이었다. 학교는 사회라는 현장과 거리가 있었다. 서점이 나로선 가장 (현장으로 들어가는) 진입장벽이 낮았다. 처음 서점을 열고 사람들을 보는 게 행복했다. 배달하는 오토바이, 생선 파는 아저씨, 싸우는 이웃 등의 풍경이 새로웠다.

조형근의 ‘대학을 떠나며’ 칼럼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교수에게 독서와 사색이 사치라고 했다.

노명우:‘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내가 예민하고 까탈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대학 구성원 대부분이 21세기 대한민국 대학에 불만족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 너무 불행한데 왜 공론화는 되지 않을까. 내 경우 힘든 게 호흡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려운 책을 못 읽는다. 사회학이나 인문학의 경우 인생 경험이 중요하다. 나도 기억력과 체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스무 살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책을 지금 읽으며 이해할 때가 있다. 인생 경험이 쌓이면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글을 더 잘 쓸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는데, 대학에서 실적에 쫓기다 보니 점점 호흡이 짧아져 긴 글을 못 읽고 있다. 좌우지간 하루가 바쁜데 왜 바빴는지 기억이 안 난다. 불만족이 심해졌다. 학자는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가슴 깊은 곳에서 오는 자기만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거다. ‘내가 뭘 하고 있나.’ 영혼을 판 느낌이랄까. ‘월급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생각했다. 칼럼을 보고 이 사람(조형근)의 용감함은 어디서 왔나 생각했다.

조형근:그 칼럼에 그렇게까지 반응이 있을 줄 몰랐다. 그 이유에 대해 누군가 명쾌하게 해석을 내렸는데 ‘얘는 정말로 때려치웠네’, 이거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사표를 품고 다니나. 그런데 진짜 던졌다는 거다.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체와 정신 모두 이대로 더 살다가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아내의 첫마디가 “잘 생각했다. 빨리 그만둬라”였다. 다음 한마디가 더 있었다. “내가 먼저 그만두려 했는데 한발 늦었네.”

대학이라는 공간이 도대체 어떻기에?

조형근:대학이 학문을 생산하는 곳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한 좋은 인프라라는 점에 대해선 지금도 이견이 없다. 그렇지만 칼럼 쓴 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다양한 연배의 대학 관계자들에게서 잘 썼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두가 동의하는 건 이 상태론 안 된다는 거다. 대학이 더 경쟁력 있게 가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은 이도저도 아니고 당사자 모두가 불행하다는 데 대부분 공감하는 것 같다. 어쨌든 교수는 지식인이고 배운 걸 가지고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과 기회가 안 생긴다. 논문을 써도 심사자와 쓴 사람만 읽는다는 말이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대학 시스템이 점점 더 긴 글을 쓰거나 읽지 못하게 한다. 논문도 긴 한 편보다 가급적 쪼개서 편수를 늘린다.

오늘날은 대중이 지식 생산의 주체이기도 한데, 그런 한편 손쉽게 음모론에 빠지기도 하고 가짜뉴스에 현혹된다. 기존 지식체계에 대한 깊은 불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 쪽에서는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있다. 전문 식견을 통해 대중의 과학적 지식과 이해를 넓혀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인문사회 쪽도 그런 표현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대중이 자기 경험을 스스로 얘기하며 무언가 생산하면 그걸 다시 아카데미와 소통하게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때마침 내가 참여하고 있기도 했고 서점이 좋은 창구라고 여겼다. 책이라는 지식 매체가 있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도 있다.

노명우:대학의 사회적 기능이 대단히 약화되었다. 1980년대 대학의 사회적 기능은 몇몇 지식인 역할을 하는 교수들의 개인 플레이였다. 독재 시절, 남들이 못하는 공적 발언을 대학이라고 하는 정치적 보호막과 교수라는 지위를 긍정적으로 사용해 수행했다. 반면 대학 교육은 시스템화되어 있지 않았다. 학사운영도 엉망이고 당시 대학이 가진 문제점이 분명히 있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을 갖춰가고 합리화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긍정성이 소진되었다. 대학에서 느끼는 건 교수의 자율성이 없다는 점이다. 평가에서도 상대평가나 절대평가의 권한이 없다. 시스템상 A 평점이 5명으로 정해져 있는 경우, A를 주고 싶은 학생이 많아도 5명이 넘으면 입력이 안 된다. 연구자가 가진 전문가로서의 판단, 자율성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 시스템이 판단하고 교수 각자는 그 시스템의 오퍼레이터일 뿐이다. 과거와 비교해, 교수는 그냥 월급쟁이가 되어 시스템 차원에서나 개별적으로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학이 사회에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혹은 대학에 공적 자금이 사용되는 게 정당한가? 라는 물음에 답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모든 대학들의 주된 고민은 랭킹과 순위다. 어떤 이념을 지향하고 어떤 인재를 길러내는가 고민하는 게 교육기관의 기본인데, 어느새 대학본부는 평가지표 관리 기관이 되었다.

조형근:대학교수는 피고용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간 계급이나 전문가 계급으로 따로 취급되는 이유는 교수가 자신의 노동 과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자율성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 높다. 수련 기간이 오래 걸리고 거기서 오는 보상이 크지 않아도 직업이 주는 최대의 만족감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수의 노동 과정 내부는 통제하기 힘들다. 외부에서 수업 내용, 논문 주제까지 직접 간섭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시스템 통제를 강화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용을 침해한다. 빨리 심사에 통과될 만한 주제를 정해서 논문을 내느라 문제의식이 좁아지는 식이다.

교수 사회의 신분제를 말하기도 했다. ‘인문한국(HK)’ 교수였는데.

조형근:전임교수는 맞지만 학과가 아니라 연구소로 임용된 사례다. 일정 기간의 재원이 정부에서 나온다. 학과로 채용된 교수들이 보기엔 뭔가 ‘사짜’로 들어온 느낌인 거다. 인문한국 사업이 인문학 분야에서는 가장 덩치가 큰 사업이었다. 그쪽 분야 인력을 고등실업자가 아니라 대학의 정규직 교수로 만들어준다는 게 이 사업의 최대 업적이다. 그나마 정년이 보장되는 정년 트랙이면 나은 편이다. 애초 비정년 트랙으로 뽑는 교수도 있다.

노명우:기업에서 사람을 뽑을 때처럼 고용 형태와 형식이 복잡해졌다. 교육부 지표 중 중요한 게 교수 대 학생 비율이기 때문이다. 정년 트랙인지, 비정년 트랙인지 상관없이 교수의 숫자를 늘릴 수 있는 거다. 몇 년 전 기준이지만 객원교수, 특임교수같이 이름만 바꾼 시간강사 3명을 교수 1명으로 세기도 했다.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지표를 좋게 만들 수 있어 다양한 형태의 교수를 채용하는 거다.

교수와 학생들 간의 만남은 어떤가?

노명우:대한민국 교수는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해야 한다. 연구자, 교육자에 더해 행정가 역할이 추가됐다. 연구자와 교육자의 역할이 일치하지 않아 때로는 충돌하기도 하고 모순되기도 한다. 지금 상황에서 교육자로서의 평가 항목은 비중이 작다. 그러면 교수가 학생들을 귀찮아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학생 면담에 할애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 생활의 만족도에서는, ‘어떤 교육을 받는가’도 중요하지만 대학에서만 맺을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인간관계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중 하나가 교수-학생 관계다. 이 부분의 만족도가 떨어지니 역시 시스템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면담의 의무화다. 학생 누구와 어떤 내용으로 면담했는지 그 내용을 기록하는 방식이다.

조형근:연구중심 대학과 교육중심 대학이 명백히 다른데 소위 명문대부터 지역사회와 밀착한 지방대학까지 교수에게 요구하는 걸 보면 근본적으로 모두 연구중심 대학을 추구한다. 그러나 연구중심에 맞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

노명우:대학이 위기이기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마음이 공무원 시험과 토익에 가 있는 학생들 앞에서 플라톤을 말하는 게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그걸 솔직하게 말 안 하고 대학 교육의 질 개선, 지도 강화 얘기하기는 어렵다. 대학 안에서도 이야기를 보급할 통로와 기회가 없다. 처음 대학에 임용되었을 때는 점심시간에 다른 교수들과 농담도 주고받고 대학이 어떻게 가야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새로 온 교수들은 실적에 쫓기며 밥을 안 먹으려고 한다. 이해된다. 샌드위치 먹으며 일 처리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한담을 나눌 마음의 여유가 없다. 대학 1학년이 점점 여유가 없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지속 가능한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버티는 이유가 있다면? 앞으로의 관심사도 들려달라.

노명우:사람을 잘 안 만난다. 술도 안 마시고 외로움을 덜 타는 성격이다. 서점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회학자로서 활동의 연장선이다. 연구실이 캠퍼스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사회로도 나와 있는 거다. 연구와 관련된 모티브를 얻으면 좋겠다. 니은서점이 책을 매개로 상거래로만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길 바란다. 그게 미래의 서점이기도 하다.

조형근:불평등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단지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사이의 적대가 아니라 약자와 약자가 서로를 혐오하면서 말하기 어려운 전선이 그려지고 있다. 동네에도 그런 문제가 다 들어 있다. 견해와 태도가 다르다고 해서 피켓 들고 시위하거나 칼럼 쓰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는 없다. 계속 얼굴 마주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타인의 삶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되뇌지만 실수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영화 보고 취미생활만 하자면 잘 안 된다. 사람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 위태로운 경계를 실험 중이다. 서로의 독립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의 목표를 만들고 교류하려는 이중적 과제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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