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근처에는 고레(Goree)라는 작은 섬이 있다. 이곳은 16세기 이래 아프리카 연안 최대의 노예무역 중심지였어. 1782년 네덜란드인이 세운 노예 창고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문에는 ‘돌아오지 않는 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흑인 수천만 명이 그 문을 나선 뒤 노예선에 실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기 때문이야. 수백 년간 노예로 팔려간 흑인들의 수는 수천만 명에 이른다. 특히 북미 대륙에 끌려온 흑인 대부분은 이 서아프리카 출신이었어. 1619년 “적어도 세 명의 여자를 포함한 20명의 흑인을 실은 한 척의 범선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우연히 상륙(벤저민 콸스 지음 〈미국 흑인사〉)”한 이후 흑인들은 대량으로 ‘수입’되어 온갖 학대를 겪으며 피비린내 나는 미국사의 일부를 구성하게 돼.

ⓒEPA세네갈 다카르 인근의 고레섬은 16세기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노예 ‘수입’만 해서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던 백인들은 노예들의 ‘재생산’에도 관심을 쏟았지. 수전 브라운밀러는 저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에서 그 끔찍한 시절에 대해 이렇게 썼어. “노예제의 어휘에서는 ‘번식용 여자(breeder woman)’ ‘애 밸 수 있는 여자’ ‘새끼 치기엔 너무 늙은’ ‘번식용 여자가 아닌’ 등의 표현이 평범한 서술어였다. 1807년에 아프리카인 노예 거래가 금지됨에 따라 대농장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내 번식을 통해 노예를 얻는 일이 중요해졌다.” 오늘은 흑인 여성 ‘범죄자’ 두 명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1850년 미국 미주리주에 사는 농장주 로버트 뉴섬은 셀리아라는 이름의 열네 살 흑인 소녀를 노예로 사들인다. 이미 환갑을 넘긴 홀아비 뉴섬은 집안일 시킬 하녀로 셀리아를 샀다고 둘러댔지만 흑심은 따로 있었지. 그는 셀리아를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셀리아는 아이를 두 명이나 낳았고, 셋째를 임신하게 돼. 그즈음 셀리아는 몸이 좋지 않았지만 뉴섬은 전혀 개의치 않고 셀리아를 괴롭혔지. 견디다 못한 셀리아는 뉴섬의 딸들에게 도움을 청해보지만 거절당했다. 아픈 몸 이외에도 셀리아에게는 뉴섬을 완강히 거부해야 할 이유가 있었어. 흑인 노예 조지와 사귀고 있었고 조지는 뉴섬과 셀리아와의 관계를 당연히 꺼려했거든. 셀리아는 뉴섬에게 경고한다. “이제 그만해요. 또 이러면 주인님을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5년 6월23일 뉴섬은 또다시 셀리아의 오두막을 찾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셀리아는 몽둥이를 들어 뉴섬을 때려죽이고 시신을 불태워버렸다. 범죄 사실이 밝혀졌고 셀리아는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돼. 당시 변호인들은 셀리아를 변호하기 위해 미주리주의 법령을 인용했다. “어떤 여성이든 그녀의 의지에 반하여 불법적인 협박과 속박을 통해 그녀를 더럽히는 것은 범죄다.” 그러나 판사는 막무가내였고 백인 농부이자 노예 소유주였던 배심원들은 유죄를 선고한다. 법령에 나오는 ‘어느 여성이든(any woman)’에 흑인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거야. “미주리 법정은 한 인간으로서 셀리아의 기본적인 권리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셀리아에게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백인 남성이 여자 노예를 성폭행했다 하더라도 범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공표한 것이다(김인선 ‘미국 노예제 시기 흑인 여성 노예에 대한 성적 착취’).”

흑인 여성들은 노예 노동과 주인의 성 착취로 고통받았고 때로는 흑인 남자로부터도 괴로움을 당해야 했던 사회적 최약자였어. 뉴섬을 거부하라고 셀리아를 압박했던 남자 노예 조지는 셀리아를 배신하고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한 뒤 종적을 감춰버렸지. 셀리아는 ‘세 번째 아이를 낳은 뒤에야’ 교수대에서 처형당한다. 이유는 그 아이가 ‘뉴섬가의 재산’이었기 때문이야.

아이가 자신의 처지를 이어받는다는 현실은 흑인 여성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어. 셀리아가 사형당한 다음 해인 1856년 일어난 마거릿 가너 사건은 그 아픔을 처절하게 드러내주었지. 마거릿 가너는 켄터키주에서 태어난 혼혈 노예였어. 마거릿은 흑인 노예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았지만 장남 이외에 그녀의 아이들은 백인 주인의 자식으로 추정된다고 해. 그녀 역시 주인의 성적 착취 대상이었던 거야. 자식들에게 자신의 삶을 물려주기 싫었던 마거릿은 목숨 걸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 자유 주였던 오하이오에 발을 디딘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는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Laws)’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지. 특정 주에서 다른 주로 도망간 노예는 반환돼야 하고, 노예 탈출을 돕거나 숨겨준 사람까지 처벌할 수 있는 법이었어. 켄터키의 노예 사냥꾼들은 오하이오까지 마거릿의 가족을 추격했고 그녀는 곧 그들에게 덜미를 잡혀. 그때 마거릿은 칼을 들어 아이들을 찔렀어. 다시 노예가 되느니 죽는 게 낫다는 울부짖음이 섞여 나왔겠지. 다른 아이들은 상처만 입었지만 두 살배기 딸은 그만 목숨을 잃었단다.

ⓒThomas Satterwhite Noble의 1867년 회화‘현대판 메데’라 불리는 토머스 새터화이트 노블의 작품(1867). 메데는 남편에 대한 복수로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죽인다. 하지만 흑인 노예 마거릿 가너를 메데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우리 시대 역시 야만으로 상정될 수 있다

변호인들은,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마거릿 가너를 오하이오주에서 살인죄로 기소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어. 노예에 관대했던 오하이오주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었지. 하지만 검사는 도망노예법대로 켄터키에 돌아가 재판받아야 한다고 고집했어. 그 죄명은 살인죄가 아니었단다. “주인의 재산을 손괴한” 혐의였지. 즉 마거릿이 죽인 건 그녀의 딸이기에 앞서 주인의 재산이라는 판단이었던 거야. 마거릿은 켄터키로 송환되지만 사람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은 면했어. 송환되는 도중 마거릿의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어도 그녀는 슬퍼하지 않았다고 해. 왜 슬프지 않았을까. 그렇게라도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슬픔을 상쇄할 뿐이었겠지.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너는 분개할 거야. 또 야만적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길 수 있겠지. 하지만 기억하렴. 그 시대에 비해서는 적잖이 나아졌을지라도 우리 시대 역시 어떤 이들에게는 참기 어려운 야만으로 상정될 수도 있음을. “15세가량의 노예 소녀. 튼튼하고 건강. 성경험 없음(위 김인선의 논문)”이라는 19세기 미국의 광고 문구와 비슷한 글귀를 아빠는 15년쯤 전, 우리나라에서도 목격한 바 있단다. “동남아 ○○○ 여자와 결혼하세요. 숫처녀 보장.” 지금은 확연히 개선됐고 다문화가정은 우리 사회의 일부가 돼 있지만 외국인 신부들과의 국제결혼 초기 저런 문구가 버젓이 통용된 것은 참혹하리만큼 부끄러운 일이었다.

자신을 유린하던 주인을 몽둥이로 내리치던 셀리아 같은 처지의 여성은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아. “이 각박한 세상에 아이들을 두고 갈 수 없어”라며 아이들의 목숨을 거두는 부모의 소식도 끊이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19세기 중반 미국보다 낫다고 부끄러움 없이 자부할 수 있을까? 많은 미국인들은 셀리아와 마거릿 등 노예제 희생자들의 참상을 목도하고 뼈저리게 반성하며 노예해방의 깃발을 들었고 그들의 역사를 바꿨다. 동시에 그만큼 많은 미국인은 노예들의 절규를 외면했고, 자신들의 야만적 편견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인종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150년 후 지금의 미국 모습이 그 결과일 테지. 너희들이 만들어갈 세상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보기 바란다. 너는 어떤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지를 말이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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