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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썼다. “좋은 사람이 된다! 그 누가 그걸 바라지 않겠는가? 그 누군들 평화와 화목 속에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이 대목을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구로 읽었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은 변혁에 성실할 수 없다.

변혁은 ‘약자’들의 이해가 좀 더 반영되는 새로운 질서를 지향하기 마련이다. 그 질서는 사회 전체를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변혁을 성공시키려면 약자(또는 그들을 대변하는 조직)는 다른 계급·계층을 끌어들인 사회적 다수파로 ‘정치적 힘’을 강화해야 한다. 이 연합이 반드시 약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나는 한국의 진보 성향 정당과 사회단체, 이익집단들의 ‘변혁 지향’에 박한 평가를 내려온 편이다. 스스로를 약자로 여기는 편향이 마뜩잖았기 때문이다. 원래 진보세력의 ‘고전적’인 노동자·민중관(觀)은 모순적 이미지의 결합체였다. ‘밑바닥의 약자’인 동시에 ‘전체 사회의 해방자’였다. 가장 혹독한 환경에 처해 있지만 가장 전능한 자들. 진보세력은 그 노동자·민중관에서 ‘전자(약자)’는 계승하고 ‘후자(해방자)’는 내팽개쳤다.

2000년대 중후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소득의 영점 몇 퍼센트씩을 갹출해서 연금 사각지대의 빈곤층을 지원하자는 제안이 나온 바 있다. 2010년대 초반엔 모든 가입자들이 건강보험료를 조금씩 더 내서 사실상의 무상의료제도를 만들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진보세력이 복지 확대를 주도하자는 적극적·긍정적 전략이었다. 그러나 둘 다 진보적 사회단체나 정당의 의사결정에선 소외되고 만다. ‘약자인 노동자가 왜 다른 집단을 돕거나 전체 사회 시스템의 선순환을 고민해야 하는가? 복지는 국가와 자본의 책임!’

그러나 스스로를 약자로만 규정한다면 자신을 보호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분들이 객관적으로 약자인지도 의문스럽다. 그래서 정의당의 신임 김종철 대표의 최근 목소리가 반갑다. 그는 플랫폼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개혁,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의 통합,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되 임금 조정, 연공급제의 직무급제 전환, 복지 확대를 위한 저소득층 증세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보정당이 약자 의식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 전체 시스템의 선순환을 궁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릇 변혁이라면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남성으로 (중소)기업 간부인 나 같은 사람들을 전율시켜야 하지 않을까. 직무급제로 간다면 나의 보수는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만은 그냥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혁명의 투혼으로 세계를 변혁’하길 바랄 뿐이다.

기자명 이종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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