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

 

나이 듦, 질병, 돌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누구도 없다. ‘존엄한 죽음’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시사IN〉은 의사·의료인류학자·환자·보호자·간병인 등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의식과 목소리에서 출발해 ‘죽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현장까지 두루 살펴봤다. 기사는 총 5회 연재된다.

당신은 어디에서 죽고 싶습니까
② ‘아픈 몸’을 거부하는 사회에게
  - ‘아픈 몸’도 아픈 대로의 삶이 있음을
③ 의학은 돌봄을 가르치지 않았다
 - “환자 집에 가면 질병이 작아 보여요”
④ 존엄한 죽음은 존엄한 돌봄으로부터
⑤ 죽음의 미래를 찾아서

흔히 만성질환을 가진 환자를 ‘병마와 싸운다’고 표현한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사회문제들을 가리켜 ‘기저질환’이라 부르기도 하고, 단발병·연예인병 등과 같은 ‘○○병’ 시리즈도 재생산된다. 아픈 몸은 낙인찍히거나 타자화된다. 산업화한 의료체계 안에서 개개인이 겪어온 질병의 경험과 죽음에 대한 고민은 납작해진다.

아픈 몸을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질병 당사자 6명을 만나 아픈 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민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연출 허혜경, 기획 조한진희)에 출연한 배우들이기도 하다. 비영리단체 ‘다른몸들’이 주최한 이 연극은 질병을 둘러싼 차별과 낙인 속에서 질병 당사자들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고령 환자 중심의 질병 담론 속에서 젊고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줄곧 안타까운 불행으로만 조명되어왔다. 이들은 ‘질병은 삶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만 필요한 것은 아픈 몸을 ‘극복’하지 않고도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질병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죽음의 미래’를 논의하기에 앞서 마주해야 하는 이야기다.

ⓒ시사IN 신선영홍수영씨는 아픈 몸 때문에 제대로 건네지 못한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낼 계획이다.

근육병/ 홍수영
한 걸음과 다음 걸음 사이가 너무 멀다

보이지 않는 병증에는 늘 오해가 뒤따랐다. 생각보다 ‘건강해 보여서’, 훨씬 ‘나빠 보여서’였다. 퇴행성 근육병을 앓는 홍수영씨(28)는 자주 오해를 받고 살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근육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경련이 반복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얼굴에 경련이 나면 입꼬리와 눈 주위 근육을 통제할 수 없는데 사람들이 보기에는 웃는 것 같았다. 그를 본 지인들은 “뭐가 그렇게 좋냐”라고 물을 때가 많았다. 경련 후에는 안면홍조가 나타났는데 어떤 이는 자신을 좋아해서 그런지 물었다. “저는 보이는 표정과 기분이 다를 때가 많거든요.” 인터뷰를 하던 홍씨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말을 하다 보면 떨림이 심해진다고 했다. 양해를 구하는 데 익숙한 모습이었다.

홍씨는 중학교 1학년 때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 근육병은 갑작스러운 경련뿐 아니라 음식물을 삼키기 힘든 연하장애, 기억력 감퇴를 몰고 왔다. 숨 쉬고 잠드는 일상부터 미래에 대한 계획까지 모두 균열이 났다.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이 결국에는 완전히 지속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삶이거든요. 뭔가를 하고 싶어도 한 걸음과 다음 걸음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거예요.”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해 신학, 철학, 상담학을 공부했지만 지속하는 게 어려웠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질병이라 사람들은 ‘네가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다’라는 말을 건넸다. 홍씨에게는 괴로운 말이었다. “저에겐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거든요.”

늘 얼굴 위에 작은 돌멩이들이 얹어진 느낌. 하지만 선생님과 함께 숨 쉬는 방법을 배울수록 돌멩이들의 개수가 줄어드는 것 같다. 횡격막이 열린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빨아들이듯 숨을 쉬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아가는 일이 즐겁다. 내 몸은 언제 이런 느낌을 잃어버린 것일까(2020년 7월8일).

오전에 스케일링을 받고 온 뒤로 탈진한 사람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다. 어떻게든 목이 돌아가는 걸 제어하려고 애쓰다 보면 몸 전체로 삽시간에 긴장이 퍼진다. 고개를 숙이기만 해도 이석증이 온 것처럼 어지럽고 메스껍다. 수저를 들기도 힘들다. 국을 뜨면 절반은 흘리고 만다. 뒷목과 등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류처럼 흐르고 있다(2020년 8월1일).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아프면서부터다. 근육병 때문인지 약 부작용인지 점차 기억력이 희미해졌다. 친구와의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고 싶은 사소한 순간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메모장에 하루의 일과를 눌러 적은 것이 시작이었다. 언젠가부터 그가 쓰는 일기들은 편지가 되었다. 몸의 경련으로 인해 끝마치지 못한 대화, 몸 상태 때문에 빚어진 오해와 그로 인해 건네지 못한 한마디들을 꾹꾹 써내려갔다. 지난여름, 오랜 기록들을 꺼내 원고 형태로 만들었다. 홍씨는 〈몸과 말〉(가제)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준비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박목우씨는 삶을 통해‘회복의 가능성은 다양하다’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현병/ 박목우
괜찮아, 그거 망상이야

“하루 종일 내가 내 정신이랑 엄청 싸우는 거야.” 백 아무개씨(47)의 말에 박목우씨(44)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철 이동 상인인 백씨는 20년째 신경정신과 약을 복용 중이라고 했다. “의사가 그러더라고.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한다고.” 9월16일 서울시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정신장애인 동료 상담. 정신장애인으로서 받았던 낙인과 편견에 대해 박목우씨가 묻자 맞은편에 앉은 방 아무개씨(54)와 신 아무개씨(62)도 한마디씩 보탰다. ‘또라이’ ‘마구잡이’ ‘정신병자’와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박목우씨가 “약은 도움을 줄 뿐, 동료나 친구로부터 주된 지지를 받는다면 다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라고 말하자 백씨가 웃으며 답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기분 좋네.” 동료 상담가로 일하는 박목우씨는 조현병 당사자다.

고용노동부가 추진하는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 지원사업’으로 박목우씨는 올해 7월부터 백씨와 방씨, 신씨를 만나왔다. ‘취업 의욕을 고취’하여 ‘경제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사업이지만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다수가 집에서 나오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의료시스템에서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관점은 질병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가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도록 ‘회복’에 중점을 두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다.

‘회복의 가능성은 다양하다’라는 말은 박씨가 삶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기도 했다. 2007년 입학한 대학에서 학교폭력을 겪은 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환청과 망상이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누군가 ‘모든 게 네 탓이야’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는 약만 잘 먹으면 비장애인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울하다고 하면 항우울제를 처방해주고, 환청과 망상이 심해지면 약을 늘리는 식이었다. 그러나 “삶이 막막하고 힘들다”는 말에는 별다른 해결책이 주어지지 않았다.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심리 상담은 시간당 비용이 높은 편이라 기초생활수급자인 박씨가 접근하기 어려웠고, 지역의 재활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거의 10년간 박씨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박씨는 2017년 장애인 등록을 하며 정신장애인임을 주변에 밝혔다. 오랜 경력단절로 인해 더 이상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탓도 있지만, 정신장애인으로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다. 정신장애인 문학회 ‘천둥과 번개’, 정신장애인 당사자 창작문화예술단 ‘안티카’에서 동료들을 만난 것이 큰 동력이 되었다. ‘엄마 아빠가 날 팔아넘길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해질 때마다 동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목우야, 괜찮아 그거 망상이야”라고 이야기해주었다. 환청과 망상은 다른 정신장애인 동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그때 처음 깨달았어요.”

하지만 사회에서 고립되어 살아오던 정신장애인들은 ‘뉴스’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 올해 초 경북 청도대남병원에서 코로나19에 집단감염되어 사망한 정신장애인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박씨는 누구보다 착잡했다. 그 역시 20대 초반, 부모의 요청으로 한 달간 정신병동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당시 목우씨는 35평 공간에서 열댓 명과 다닥다닥 붙어서 생활했다. “약을 거부하면 온몸이 결박된 채 격리되거나 코끼리 주사를 맞았다”라고 말했다. 코끼리도 잠들게 한다는 수면 주사였다. 강제입원과 비인간적인 처우는 퇴원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삶에 상처를 남겼다. “우리가 무능하고 게으른 존재가 아니라, 사회가 우리를 노동하게 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정신장애인에 대한 낙인과 편견이 심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정신장애인을 ‘이웃’으로 맞이한 경험이 쌓이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박목우씨가 동료 상담을 위해 직접 준비한 자료에는 ‘당신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박씨가 아직 고립되어 스스로를 탓하고 있을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시사IN 조남진정지혜씨는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픈 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때문에 슬펐다.

유방암/ 정지혜
암 환자가 일하는 이유

자고 일어나면 흰색 베개 커버 위로 머리카락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정지혜씨(33)가 유방암 4기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막 시작한 후였다. ‘이참에 여성성을 벗어보는 실험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암환자의 민머리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시선에 의문이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소셜미디어를 통해 ‘삭발식’ 생중계를 했다. 영상 속에는 윙 하고 울리는 바리캉 소리 사이로 ‘시원하다’ ‘두상이 예쁘다’ 하는 말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담겼다. 질병과 함께하는 삶이 늘 슬픔과 좌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씨는 서울 중구 을지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 기획자다. 기록적인 폭염이 한창이던 2018년 여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터질 게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가 아픈지 검사받기도 부담이 되는 재정 상태라 계속 미뤄왔거든요.” 프리랜서 기획자로서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투잡’이 필수인 삶을 살았다. 늘 피곤하고 무기력했지만 과로 때문이겠거니, 혹은 더운 날씨 때문이겠거니 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쓰러지고 나서야 몸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혹은 눈에 보일 정도로 커져 있었다. 주변 장기까지 암이 전이되어 있는 탓에 검사와 수술, 집중치료가 지난하게 반복되었다. 붙잡고 있던 일들을 한꺼번에 놓아야 했다. 정씨는 “아프니까 잠시 쉴 수 있더라”라며 웃었다.

1년간 항암치료를 여덟 번 받았다. 그사이 ‘유방암 4기 생존자’라는 수식어가 생겼다. 어떤 날은 손끝 하나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어떤 날은 항암 끝나고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을지 생각하느라 설레기도 했다. 매 순간 격렬히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아프면 아픈 대로의 삶이 있을 것”이라고 정씨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울상이 된 지인들의 걱정과 위로를 받으며 ‘괜찮다’ 안심시키느라 매번 진을 뺐다. 사회가 질병에 대해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픈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쉽게 대상화되었다.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픈 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때문에 슬펐다.

정씨는 질병과 함께 사는 소소한 일상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한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암 환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싶었다. 마지막 항암치료를 끝내고 머리가 다시 자라기 전에 ‘빡빡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친구들이 우러러보고 있는 ‘여자 부처’가 된 유쾌한 환자의 모습이었다. “아픈 사람이 질병에 대해 자꾸 얘기해야 덜 불편해질 것 같았어요. 이게 일상인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요.”

올해 초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구직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처방받은 유방암 치료제 ‘입랜스’가 건강보험 급여가 인정되지 않아 약값으로만 한 달에 300만원을 쓴 뒤였다(지난 6월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12만원으로 인하했다). 아픈 몸으로 일을 하는 것은 매번 의심에 부딪히는 일이기도 했다. 이력서에 생긴 2년간의 공백은 정씨가 해명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아파서 쉬었다’고 말하면 면접관들은 “왜 암 환자가 일을 하려고 하는지” “이제는 안 아픈지” 되물었다. “일을 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씨는 늘 거짓말하는 것 같았다. 고용복지센터에서 청년 일자리를 소개받기도 했지만 ‘지병, 건강쇠약 등으로 근로가 불가하다고 판단하는 자’는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다는 조항 앞에서 지원을 망설이게 된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제도마저 다 건강을 기본값으로 상정하는 것 같아요. 아픈 몸도 노동을 원해요. 아픈 몸은 돈이 많이 드니까요.”

ⓒ시사IN 조남진김수희씨는 몸이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턱관절 질환 및 근육경련/ 김수희
다섯 번도 했는데 여섯 번쯤이야

하고 싶은 일들을 미루면서 살았다. 김수희씨(43)는 ‘이 병이 나으면’ ‘치료가 끝나면’ ‘다시 건강해지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2002년 다니던 대학원에 휴학계를 제출할 때만 해도 그랬다. 이미 두 차례나 수술한 턱관절 질환이 재발하면서 재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고로 턱을 다친 이후 턱관절이 심하게 손상되어 통증이 반복되고 있었다. “수술만 마치면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못 돌아갔네요.” 수술 이후 김씨는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증상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근육경련과 만성통증이 김씨의 일상이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대학 동기들이 취업하는 동안 김씨는 집과 병원, 재활시설을 오갔다. 깨어 있는 시간은 대부분 근육을 풀고 이완하는 데 쓰였다. 재활치료를 하루이틀 쉬면 금세 몸이 굳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근육경련 때문에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 머리맡에 마사지볼·폼롤러·젠링 등 마사지 도구들을 비치해뒀다. “저는 한 번도 쉬지 않았는데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안 한 게 되어버리니까요.” 예전보다 통증은 덜하지만 아팠던 이야기에는 반사적으로 눈물이 난다. 수술 이후 바뀐 얼굴 때문에 거울과 사진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김씨의 목소리가 잠겼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게 ‘건강’이었다.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라던 의사의 말대로 손상된 턱관절은 몇 년마다 한 번씩 김씨를 통증으로 괴롭혔다. 대학병원에서 만난 한 의사는 ‘예민한 성격을 고쳐야 한다’ ‘집에서 쉬지만 말고 움직여야 나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럴수록 김씨는 운동에 골몰했다. 재활치료를 3시간씩 받는 것으로 모자라 헬스장이 문 닫을 때까지 몸을 움직였다. 매번 수술대에 누워 ‘이 수술만 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주문을 걸었지만, 턱관절 염증과 근육경직 증상이 회복될 무렵 자궁과 난소에서도 혹이 발견되었다. 14㎝ 크기의 자궁근종이었다. 2017년과 2018년 난소와 자궁 수술까지 받으며 김수희씨는 총 다섯 차례 수술을 거쳤다.

건강했던 시간보다 질병과 같이 산 세월이 길어지면서 김씨가 깨달은 사실은 몸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픈 몸을 ‘잘 데리고 살아갈’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희망과 절망과 포기는 한 끗 차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섯 번 수술해서 멀쩡했는데 여섯 번도 받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버리고 나니 몸의 변화를 좀 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김씨가 아팠던 시간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보는 이유다.

밖에서 보면 아픈 몸의 시간은 쓸모없을지 몰라도, 안에서 보면 몸의 미세한 신호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삶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몸이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통증이 느껴진다는 것은 몸이 살기 위해 보내는 신호였다. “정말 많이 굳은 데는 대침을 찔러도 느낌이 없거든요. 몸이 고통을 주는 신호는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시사IN 조남진안희제씨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크론병/ 안희제
‘피똥눈물’을 아시나요

인터뷰 당일이던 9월14일, 안희제씨(25)는 끝내 잡지 못한 모기 한 마리 때문에 잠을 설쳤다. 그런 날이면 항문 근처에 난 상처가 심해져 화장실을 자주 들락날락하게 된다. 복통, 두통과 함께 나타나는 크론병의 흔한 증상 가운데 하나다. ‘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휴지에는 피가 묻어 나온다. 거의 매일 겪는 통증이지만 아직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아 견디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몸에게 당하는 느낌이다. “제 아픔을 설명하기 위해 ‘피똥눈물’이라고 이름 붙였어요”라며 안씨가 웃었다. 크론병과 함께 산 지 벌써 7년이다.

크론병은 구강에서 항문까지 위장관 전체에 나타날 수 있는 만성 염증성 장질환이다. 주치의는 치료가 아닌 관리가 필요한 난치병이라며 관리를 잘 못하면 암에 걸릴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정형외과부터 소화기내과, 항문외과, 신경정신과까지 종합병원을 이리저리 헤맸다. ‘떠밀렸다’는 표현이 좀 더 적절했다. 어떤 곳에서는 크론병이 아니라고 했고, 어떤 곳에서는 당장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크론병 진단 이후에도 의사는 매번 수치상으로는 문제가 없다며 “스트레스 관리를 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3분 진료는 그렇게 끝났고, 염증과 무기력증은 계속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상위권 성적에 배드민턴부 대표를 할 정도로 체력도 좋았다. 안씨는 마치 흑역사를 말하듯 “아프지 않았다면 자본주의 사회에 걸맞은 성과를 꾸준히 내며 살아갔을 사람”이라고 과거의 자신을 설명했다. 승부욕은 그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단어였다. “내 앞에 누가 걸어가면 그걸 못 견뎌 했어요.” 단순히 발걸음 속도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실력으로 추월하는 것에 익숙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청년’이었지만 몸이 그렇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밤샘 작업과 술자리로 이루어진 캠퍼스 생활은 건강한 신체로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크론병 환자는 카페인, 알코올, 밀가루, 맵고 짠 음식을 입에 댈 수 없다. 안씨는 소주 대신 물을 홀짝이며 술자리를 버텼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복통 때문에 조퇴와 결석, 갑작스러운 불참도 잦았다.

겉으로 보이는 장애가 아니었으므로 의심받기 일쑤였다. “청춘은 ‘건강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까운 이들은 ‘군대 안 가도 되는 병’이라거나 ‘치킨이랑 술 못 먹는 병’ 정도로 크론병을 이해했다. 그러나 정작 그를 힘들게 한 건 자신이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두고 무능하다고 자책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아파도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어요. 그렇게 일을 마구 벌려놓고 수습하지 못하는 내가 다시 원망스럽고.” 경쟁사회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던 그는 아픈 몸을 미워했다.

건강했던 몸을 마냥 그리워하지 않게 된 건 ‘느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다. 장애인권동아리 활동을 하며 걸음걸이, 말하기, 문자를 치는 속도에는 사람들마다 시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안씨는 아픈 몸을 감추며 ‘괜찮은 척’하지 않았다.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약한 채로 살다가 편하게 죽고 싶어요.”

‘나는 아마 낫지 않을 것이다.’ 이 한 문장을 쓰기까지 5년이 걸렸다. 안씨가 쓴 책 〈난치의 상상력〉(동녘, 2020)에 나오는 문장이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었어요.” ‘완치’라는 헛된 희망에 매일의 삶을 내맡기고 싶지 않았다. 술 진탕 마시기, 피시방에서 밤새워 게임하기, 매운 음식 먹기…. 여전히 건강했던 몸의 기억과 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관해기(병증이 호전된 상태, 완화된 기간)에는 자꾸 욕심을 내게 된다. 금방 무너질 때도 있지만, 그런 시도들 덕분에 청주와 막걸리는 먹을 수 있다는 ‘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프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못 자면 2~3일은 아플 걸 알면서도 밤새워 미뤄둔 원고 작업을 한 까닭이다. 그렇게 아픈 몸과 공존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다.

ⓒ시사IN 조남진다리아씨는 다시 자라난 낭종을 더 이상 삶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소낭종/ 다리아
‘규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리아씨(39·활동명) 집 냉장고에는 손글씨로 빼곡히 적어둔 반찬 레시피들이 붙어 있었다. 고추장장아찌, 멸치볶음 만드는 법부터 남은 재료까지 일일이 체크해뒀다. “주부도 직업이고 노동자더라고요”라며 다리아씨가 웃었다. 3년 전 난소에 낭종이 재발해 일을 그만둘 때는 집이 또 다른 직장이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결혼 5년째, 집안일을 전담하는 그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인천의 한 부품공장에서 일하는 남편은 한겨울에도 내복에 소금이 밸 정도로 중노동을 한다. 몸 곳곳에 화상 상처를 달고 사는 육체노동자라 집안일을 채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리아씨에게는 집도 편히 아플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2013년 난소에 13㎝짜리 혹이 발견되었다. 의사는 낭종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지인들은 ‘예민한 성격’ 때문일 것이라 억측했다. 다리아씨 역시 잘못된 자신의 습관들을 끄집어내 스스로를 나무랐다. 혹이 된 난소를 제거하면서 오른쪽 난소는 70%, 왼쪽 난소는 20%가 남았다. 종양을 제거하는 것으로 병원의 임무는 끝났지만 몸에 남은 후유증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몸의 생태계가 뒤바뀌는 것 같았어요.”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질염에 자주 걸렸고 좋아하던 커피를 끊었다. 바뀐 몸은 ‘새로운 일상’을 요구했다.

언제든 재발할 수 있으니 의사는 ‘규칙적인 식습관, 충분한 수면, 적절한 운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리아씨에게는 닿을 수 없는 처방전이었다. “누가 건강해지는 방법을 모르나요? 못하는 거지.” 그의 경우 긴 통근 시간이 몸을 학대했다. 일평생 인천에 살았지만 일자리 대부분은 서울에 몰려 있었다. 대표 ‘지옥철’로 꼽히는 신도림역을 포함해 두 번을 더 환승해야 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 왕복 네 시간, 사람들 틈바구니에 몸이 구겨진 채 다리아씨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부족한 잠은 커피로 채웠고, 밤 9시가 돼서야 끼니를 허겁지겁 때웠다. ‘규칙’ ‘운동’ 어느 것 하나 그의 삶에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2017년 여름, 난소낭종이 재발했다.

이번에는 가족 모두가 이해관계자처럼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리아씨의 아버지는 의사에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부터 물었고, 시어머니는 자궁에 좋다며 익모초 환 세 봉지를 챙겨주기도 했다. 아픈 여성도 예외 없이 아기 낳을 몸으로 취급됐다. 정작 다리아씨의 고민은 난임보다는 경력 단절에 있다. “아파서 가난해지고, 가난해서 더 아프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단순히 ‘불행’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고도근시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고,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서 일한 뒤로는 어깨에 만성통증이 생겼다. 피곤한 날에는 안구건조증이나 치질로 고생한다. 어디서부터 아픈 몸이고, 어디서부터 건강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소에 다시 자라났다는 낭종은 더 이상 삶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건 마음 편히 아플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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