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10월8일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4월11일 역사적인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내려졌다. 기존 형법에 의하면 낙태한 여성에게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이를 도운 의사에게는 2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할 수 있다. 물벼룩이나 진딧물과 달리 인간 여성은 단성생식을 통해 자녀를 출산할 수 없다. 그럼에도 왜 여성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지, 엄연한 불법인데 국가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방조해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뒤늦게라도 법이 개정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지난주까지 말이다.

10월6일, 정부는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깜짝 발표했다. 그동안 정부 개정안이 임신 14주 혹은 24주 이후의 임신중지를 여전히 처벌 대상으로 삼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는데 그 소문이 현실로 나타났다. 낙태죄는 그대로 유지하되 낙태의 ‘허용 요건’을 ‘신설’한 것이다. 법무부의 형법 개정안에 따르면 임신 14주 이내, 의사에 의해 의학적으로 인정된 방법으로 이루어진 임신중지는 처벌하지 않는다.

만일 여성이 인터넷으로 유산 유도 의약품을 구입하여 스스로 임신중지를 시도한다면? 사극 드라마 장면처럼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유산을 시도한다면? 의사가 시술하지 않았으니 불법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 자살을 하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불법이 아니지만, 낙태를 위해 뛰어내린다면 불법이 될 수 있는 기묘한 상황이다.

한편 강간 등의 범죄행위에 의한 임신, 근친 간의 임신, 임신을 지속하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임신이 여성 건강에 위협이 되는 경우에는 임신 24주까지 합법적으로 (역시 의사에 의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인 경우, 모자보건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상담을 받고 24시간이 경과해야 한다. 만일 24주 이후의 임신중지라면, 그 이전이라도 모자보건법이 정한 상담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면 여전히 불법인 셈이다.

사실 임신 24주면 현대 의학기술로 태아를 살려낼 수 있고, 이 시기의 임신중지는 산모의 건강에도 상당한 부담이 된다. 굳이 법적으로 금지하고 처벌하지 않더라도 임신 24주 이후에 임신중지 결정을 내리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문제적 상황이다. 이토록 뒤늦은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여성에게는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사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의학적 보호, 사회적 보호다. 왜 임신 24주가 지나서야 이런 힘든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 묻고, 임신을 중지하든 유지하든 이후의 건강과 삶을 지원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 아닐까. 사실 정부는 14주냐 24주냐 처벌의 기준 시점을 정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당장 내년부터 합법화되는 임신중지 서비스를 어떻게 안전하게 제공할 것인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 두 달 뒤면 위기 임신에 직면한 여성들이 가까운 병의원에서, 프라이버시 침해나 사회적 낙인에 대한 걱정 없이, 충분한 상담과 함께, 부담 가능한 가격으로 양질의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일까?

국내에서 임신중지는 꾸준히 ‘불법’이었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 아래 국가가 주도해서 산아제한을 하던 1960~1970년대 이야기가 아니다. 태아 초음파검사가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선별적 여아 낙태가 만연하면서, 1981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 사회의 출생성비는 자연성비인 106을 줄곧 넘겨왔다. 심지어 백말띠 해라는 1990년에는 여아 낙태가 극에 달해서 전국 출생성비가 116.5에 달했고, 당시 경상북도와 대구는 130.6과 129.3이라는 기록적 숫자를 보여주었다. 엄연한 불법이었음에도 국가가 눈감아주거나 직접 나서기까지 했던 임신중지가 최근 몇 년 동안 천하의 비도덕적 행위로 여겨지게 된 데에는 교회와 성당 문밖까지 목소리를 높인 종교계의 역할이 컸다. 때마침 국가적 저출산 문제가 겹치자 사문화된 것이나 다름없던 낙태죄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게 되며 임신중지는 은밀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연합뉴스2018년 8월 ‘인공임신중절수술 거부 선언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성명서를 낭독했다.

불법인데 허용하고, 불법이니 처벌하고

그러나 결코 사라질 수는 없었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 같은 극단적 금지 사례를 제외한다면, 세계적으로 임신중지가 불법이든 합법이든 낙태 건수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관된 연구 결과다. 절박한 여성들은 때로는 국경을 넘어, 건강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임신중지 서비스를 찾는다. 그렇기에 ‘안전한 임신중지’는 분만 서비스나 예방접종과 마찬가지로 ‘필수 보건의료 서비스’로 분류된다. 세계보건기구와 앰네스티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각국이 유지해야 할 필수 보건의료 서비스에 임신중지를 포함했다.

하지만 불법이기에 정확한 통계가 없고 관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2018년 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 연간 약 5만 건의 낙태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 건강보험통계연보가 보고한 다빈도 수술 목록을 참고해보면, 1위가 백내장 수술로 59만 건이고 5위가 충수절제술(맹장수술)로 8만2000건이다.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편도선절제술이 연간 4만2000건, 갑상선수술이 3만 건인 것을 생각하면, 임신중지 5만 건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2010년 이후 발표된 국내 연구 결과들을 보면, 성인 여성의 16~22%가 원치 않은 임신을 경험했고 이 중 60~70%가 임신중지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신 경험이 있는 여성의 약 20%가 임신중지를 한 적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떻게 임신중지를 했을까? 국내 의료기술과 위생 표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기에 저개발국가에서처럼 임신중지 시술과 관련된 치명적 합병증이나 사망은 극히 드물 것으로 짐작된다. 임신중단을 유도하는 의약품도 국내에서 허가된 것은 없지만, 인터넷으로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안전한, 양질의 서비스를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대학병원이나 이름난 산부인과 전문병원, 공공병원들은 모두 불법 시술을 제공하지 않기에 여성들은 필사적으로 의료기관을 찾아야 했다. 시민건강연구소 젠더건강연구센터의 연구에 참여한 여성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하루에 스무 곳이든 서른 곳이든 될 때까지 찾아본 거고. 어쨌거나 아시겠지만 병원에 전화하면 수술 가능 여부를 알려주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내방하라고 하면 스무 곳, 서른 곳 될 때까지 가는 거죠.” 비용도 현금으로 40만원에서 500만원까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어려운 시술이라서가 아니라, 불법행위에 대한 일종의 위험비용이다.

의약품에 대해서도 불안이 크다. “제가 진짜 약물로 하고 싶어서 엄청 많이 알아봤는데, 그 약이 정품이 아닐 수도 있고 정품이라 해도 부작용이…. 물론 수술도 부작용이 많지만, 약물은 구하는 것도 어렵고 정품 아닐 수 있고. 정품 아닐 거라는 얘기가 엄청 많더라고요.” 이 참여자는 두려움 때문에 그냥 수술을 받았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실태조사에서도 유산 유도 약물 사용자 74명 중 53명(72%)이 임신중지에 실패해 추가로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불법행위를 한다는 점 때문에 불안하고, 양질의 서비스나 환경의 쾌적함을 기대할 수도 없다. “지금은 그 감정들이 자세히 기억 안 나는데 저는 그 수술실 장면만 되게 기억이 나요. 너무 비인간적인 환경?” “그때 선생님이, 그 생각이 많이 나요.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어, 피임하시는 방법을 잘 모르시나 봐요. 왜 아직 못 배우셨을까’라고 하셨던 게 떠올라요.” 이런 경험 때문에 여성들은 시술 이후 의료기관을 다시 방문하거나 상담받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심리적인 이유가 있었고요. 그냥 다시 가기 싫었어요. 무서웠어요, 거기. 트라우마라고까지 얘기하긴 뭣하지만, 네, 갈 수가 없었어요.” 이제 내년 1월부터는 이런 트라우마, 유쾌하지 못한 경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연합뉴스2019년 9월27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아 기자회견이 열렸다.

안전한 임신중지=필수 보건의료 서비스

임신중지가 합법화되어도 여성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에는 여전히 제약이 있다. 서울 강남구처럼 산부인과가 158군데나 되는 지역도 있지만, 경북 영양군이나 전남 영암군에는 산부인과가 한 곳이거나 그마저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는 임신중지 시술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의료진을 위한 진료 표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정식 훈련도 불충분했다. 내과적 임신중지에 필요한 의약품은 아직 국내에 들어와 있지 않고 의사들도 써본 적이 없다. 상담과 사회 서비스로의 연계는 전적으로 개개인 의사들의 선의에 기대고 있으며, 역시 표준화된 임상 지침이 없다.

빨리 결정하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의료인력과 관련한 문제가 그렇다. 노르웨이에서는 외과적 임신중지는 반드시 의사가,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는 의사의 감독하에 간호사가 수행한다. 캐나다에서는 산부인과 의사뿐 아니라 한국의 가정의학 전문의에 해당하는 일차진료 의사들도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도의 기술과 전문설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수적 ‘일차의료’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법률개정안 공개 이후 산부인과학회, 산부인과의사회, 모체태아의학회 등이 발표한 공동성명에는 내과적 임신중지를 포함한 모든 임신중지 서비스 제공을 산부인과 의사로 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내용은 이미 올해 1월 산부인과 의사들이 〈모자보건학회지〉에 발표한 입장문에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산부인과 의사를 구하기 힘든 지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방 의료원, 보건소 같은 공공보건의료기관에 클리닉을 개설하든, 산부인과 전문의가 아닌 일차진료 의사에게 진료를 허용하든 어떤 형태로든 서비스 제공자를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표준화된 진료 지침과 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의료인의 ‘진료 거부’와 그에 따른 ‘의뢰 체계’ 문제도 진지하게 대비해야 한다. 정부의 모자보건법 개정안에는 의사의 개인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를 인정하고, 그로 인한 불합리한 처우를 금지하고 있다. 의료인이 종교나 양심에 따라 임신중지를 거부하는 사례는 임신중지가 합법화된 국가들에서 드물지 않다. 대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의료기관으로 환자를 의뢰해야 하고, 응급상황이거나 의뢰가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반드시 시술을 제공하도록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국내 산부인과 의사들은 낙태 관련 의료 행위뿐 아니라 다른 시술기관으로의 안내에 대해서도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을 권리와, 심지어 다른 의료기관으로 의뢰조차 하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 거부를 금지한 의료법과도 상충하는데, 왜 임신중지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진료 거부를 인정해주어야 할까?

또 다른 시급한 사안은 내과적 임신중지에 필요한 의약품을 확보하는 것이다.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과 미소프로스톨(Misoprostol)은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필수의약품 목록에 들어 있고, 효과성과 안전성도 입증된 약물이다. 국제적 임상 표준지침은 안전성과 편의성 측면에서 외과적 시술보다 내과적 임신중지를 우선으로 권고하고 있으며, 여러 국가에서 임상 표준지침에 이를 포함했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국가들은 현재 내과적 임신중지가 전체 사례의 90%에 이른다. 특히 의료 전문가에 대한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 내과적 임신중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미페프리스톤은 아직 수입허가조차 되지 않았고, 미소프로스톨은 정식 유통되고 있지만 소화성 궤양 치료에 한정적으로 쓰인다. 이들의 수입허가와 추가적인 임상시험, 적응증을 확대하는 절차에는 당연히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국내 산부인과 의사들은 미페프리스톤 도입에 대해 ‘국내 임상시험 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를 의약분업 예외약품으로 지정하여 산부인과 병원에서 직접 투약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두 달 뒤 임신중지가 합법화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의약품 접근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의약품과 시술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하여 임신중지 여부, 방법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정보 제공과 상담은 임신중지 서비스의 필수적 부분이다. 임신인 줄 모르고 감기약을 복용했는데 혹시라도 태아에게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되어 임신중지를 고려하고 있다면, 사회경제적 여건상 도저히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잦은 피임 실패로 이미 여러 번의 임신중지를 경험하고도 또다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찾아온 여성이라면, 성착취 상황에 놓인 것이 강력하게 의심되는 미성년 임신부라면…. 임신중지를 하러 찾아온 여성의 수만큼 사연은 다양할 것이고, 그중에는 뚝딱 시술만 해주고 끝낼 것이 아니라 사회 서비스나 다른 분야 전문가에게 연결이 필요한 사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다시 임신중지를 하지 않도록 피임 방법을 교육하고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의료 제공 체계에서 이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국내 산부인과 의사들은 “비의학적 사유의 낙태 결정 과정에 시술 의사는 참여하지 않고 시술 과정만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의사에게 피임과 계획임신 등에 대한 설명 의무를 부과하고, 임신으로 인한 위기갈등 상황에 대한 상담은 별도의 종합 상담기관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보건소나 민간 비영리법인이 여기에 해당한다. 위기 상담 같은 민감한 필수 서비스를 민간에 외주 준다는 발상은 황당하지만 익숙하다. 또한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보건소도 비정규직 상담 인력을 채용하고 매년 반복되는 고용불안과 전문성 부족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임상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 말고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그동안 불법 상황이어서 제대로 된 통계가 없었지만, 이제는 안전한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기관 혹은 의료인의 분포, 정보제공 수준, 임상지침에 부합하는 양질의 서비스, 합병증, 임신중지 건수 등 국제표준에 부합하는 모니터링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특히 합법화 이후 몇 년 동안은 제도 안착을 위해 모니터링과 평가가 매우 중요하다.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1979년부터 별도의 익명 등록체계를 만들어 임신중지의 시점·방법·사유 등을 의료기관이 중앙 시스템에 보고하고, 이를 통해 임신중지 현황과 의료자원의 분포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합법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프라이버시를 우려한 비보험 진료나 불법적 약물 유통은 여전할 것이다. 의사의 진료 거부,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이나 의료인 혹은 여성에 대한 위협도 예상된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대비책을 마련하기에 남은 두 달은 턱없이 부족하다.

ⓒAP Photo아일랜드 시민들이 2018년 5월26일 국민투표를 통해 낙태죄 폐지가 결정되자 손을 들며 환호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앞장서야

국제인권규범에 따르면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의무 유형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국가는 직간접으로 건강권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필수 의료서비스인 임신중지의 불법화는 이러한 ‘존중의 의무’를 해치는 것이다. 둘째, 국가는 제3자가 건강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한다. 예컨대 의료인들이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인권 표준을 준수하도록 수단을 마련함으로써 ‘보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건강권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적절한 법·행정·예산 등의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건강권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를 통해 ‘충족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임신중지라는 필수 보건의료 서비스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보건복지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된 일인지 존재감이 없다. 2017년 2월 낙태죄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 소원이 이루어진 이후, 보건복지부는 줄곧 말이 없었다. 같은 해 11월,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불과 한 달 만에 23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고 청와대 민정수석이 실태조사 계획을 발표한 시점에서도 침묵을 지켰다. 2018년 8월에는 뜬금없이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규정하고, 낙태 수술한 의사의 자격을 1개월 정지하는 행정처분 규칙을 공표해서 반발만 샀다. 그해 12월, 경찰이 병원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를

ⓒEPA사이먼 해리스 아일랜드 보건장관은 낙태죄 폐지를 지지했다.

이용하여 임신중지 시술 여성들을 수사하는 상황에서도 복지부는 말이 없었다. 지난 9월22일, 법률 개정 시한을 앞두고 복지부의 입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복지부 출산정책과장은 “현재로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심지어 이 주제를 가지고 9월28일에 열린 보건복지부 ‘성평등자문위원회’에서조차 아무런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 10월6일 발표한 입법 방안 보도자료에는 ‘성평등자문위원회의 안전한 임신중지 의료서비스 방안 의견 수렴’이라고 적어놓았다. 필자는 당시 외부 전문가로 참여하여 이 글의 논지를 발제했다. 여기서 말하는 ‘의견 수렴’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떤 의견들이 있는지 한번 들어주기는 했다’는 뜻일까?

2018년 여름, 국민 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에서 국민투표에 의해 낙태죄가 폐지되었다. 그동안 아일랜드 여성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국경을 넘어 시술을 받아야 했다. 낙태죄 폐지 투표에 참가하기 위해 해외에서 귀국하는 아일랜드 여성들의 행렬은 세계의 뉴스를 장식했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던 날, 낙태죄 폐지에 환호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상기된 표정의 남성이 인터뷰하는 뉴스 장면을 보았다. “수정헌법 제8조 아래서 위기 임신에 처한 여성들은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라(Take the plane or take the boat)’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들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우리 손을 잡아라(Take our hand)!’” 그는 아일랜드 보건장관이었다. 임신중지는 젠더 이슈이면서 동시에 필수 보건의료, 건강권의 이슈이기에 보건장관이 나선 것이다. 당연하지만, 일찍이 국내에서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성평등자문회의가 열린 9월28일은 우연하게도 ‘세계 안전한 임신중지의 날’이었다. ‘임신중지는 보건의료서비스’라는 것이 이날의 핵심 슬로건이었다. 필수 보건의료 서비스 제공에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 여성의 건강권을 보호하며, 안전하고 양질의 임신중지 서비스가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보건복지부 본연의 업무다. 복지부는 한가위 보름달 사진에서 보여주었던 자신만만함을 여기에서도 제발 보여달라.

기자명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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