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의 전설〉장용학, 사상계, 1962년 초판

운명이라는 게 존재할까? 나는 인간의 삶이 결국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간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책과 사람 사이에는 운명이라고 부를 만한 보이지 않는 끈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 그 끈은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사람의 인생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으며 빙빙 돌고 돌아 알 수 없는 곳에 닿아 있기도 하다.

한 손님이 찾고 있던 〈원형의 전설〉이라는 책 내용도 딱 그렇다. 이 책은 소설가 장용학의 대표작으로 한국전쟁이라는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중심에 두고 펼쳐지는 한 인간의 속절없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관념적인 내용과 더불어 작가 특유의 어려운 문체 때문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새 책을 파는 서점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왜 헌책방을 찾은 것일까? 손님은 1962년에 사상계사에서 펴낸 초판을 찾고 있었다.

“1960년대에 저는 대학생이었고 열혈청년이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사회운동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지요. 활동하면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는데 저보다 몇 살 아래인 한 후배를 저는 특히 아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서로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고 문학을 좋아한다는 것도 비슷해서 함께 책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아끼던 〈원형의 전설〉을 그 친구에게 빌려줬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이는 경찰에 붙들려갔습니다. 아니,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갑자기 행방불명이 됐고 우리는 경찰에 끌려간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손님은,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 후배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책뿐이다. 이상이 〈원형의 전설〉 초판을 찾는 사연이다.

출판사마저 없어진 책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수소문을 해봤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로부터 거의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우연한 기회에 책을 발견했다. 우리 책방 근처에 오래된 주택가가 있는데 그곳이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집들이 헐리고 있었다. 그곳에 사는 한 분에게 연락이 와서 우리 책방이 서재를 통째로 인수하게 됐는데 그중에 〈원형의 전설〉 초판이 들어 있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그분은 집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우리 책방에 넘겼다. 자신은 집을 처분한 다음 여생을 나그네처럼 살고 싶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가지고 있는 책을 다 넘기는 게 흔치 않은 일이라 존함이라도 알고 싶다고 했더니 역시 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야. 여태 이름 없이 살았으니 알려줄 것도 없지.”

우스개려니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원형의 전설〉을 찾고 있던 손님에게는 거의 1년 만에 연락했고 책방을 다시 찾은 손님은 답례라면서 1만원짜리 몇 장이 들어 있는 봉투를 내게 주고 돌아갔다.

50년 전 책을 주고받았던 청년들

이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정도 흘렀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때 나에게 책을 팔았던 그분이 〈원형의 전설〉을 찾던 손님의 후배가 아닐까? 연배도 손님과 비슷해 보였고, 지금 와서 기억을 떠올려보니 마당까지 배웅했던 그분은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런 상태로 지내온 것처럼 기우뚱한 몸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쩌면 그때 갑자기 사라져버린 후배가 바로….

그곳엔 이제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거기가 전에는 허름한 주택가였다는 사실조차 기억에서 흐려졌다. 하지만 50년 전 책을 주고받았던 청년들의 운명은 여전히 이 땅 어딘가에 살아 있다. 두 사람과 한 권의 책. 이들은 운명이라는 끈으로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기자명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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