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팝의 두 불꽃, 블러와 오아시스의 활동을 추적한 책 〈블러, 오아시스〉(이경준 지음, 산디 펴냄).

블러(Blur), 오아시스(Oasis).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이 든다. 1990년대에 음악 좀 듣는다고 하는 사람은 무조건 두 밴드 중 하나의 팬이었다. 아니면 둘 다 팬이었거나. 나의 경우, 블러를 선호했지만 오아시스의 1집과 2집도 무척 좋아했다. 비단 이 두 밴드만은 아니었다. 버브(The Verve), 스웨이드(Suede), 펄프(Pulp), 엘라스티카(Elastica) 등등. 밴드 이름만으로 지면의 반은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1990년대는 곧 브릿팝(BritPop)의 시대였다. 그중 블러와 오아시스의 존재감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미국 그런지(Grunge)에 너바나(Nirvana)와 펄잼(Pearl Jam)이 있었다면 브릿팝의 주축은 단연 블러와 오아시스였다. 이 두 밴드의 음악을 경유하지 않고 브릿팝을 이해한다는 건 글쎄, 〈이기적 유전자〉도 읽지 않고 무신론자가 되겠다고 덤비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브릿팝을 더욱 흥미롭게 즐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두 밴드가 연출했던 브릿팝 남북 전쟁의 포화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무작정 돌격하라고 등 떠미는 건 아니다. 길잡이가 필요하다. 하긴, 두 밴드가 발표한 정규 앨범만 해도 15개다. 방향을 설정해줄 나침반 같은 존재 없이는 거대한 영토 안에서 헤매기 십상이다. 당신에게는 친절하면서도 꼼꼼하고 말솜씨까지 겸비한 가이드가 절실하다. 혹여 미답지로 향하는 여행이라 해도 걱정 마시라. 바로 이 책 〈블러, 오아시스〉가 빼어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마치 논픽션 소설 같다. 철저히 팩트에 기반해 완성한 역사소설쯤이라고 보면 된다. 한데 기록이 미진할 경우 역사소설은 저자의 상상력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기 마련이지만 브릿팝은 사정이 다르다. 자료가 ‘너무 많아서’ 도리어 문제다. 계통을 세워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중구난방이 될 위험성이 크다.

속도감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문장

이 지점에서 〈블러, 오아시스〉의 진가가 빛난다. 이를테면 정보의 가지치기를 잘 해냈다. 그렇다.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뭔지 파악할 줄 아는 것도 재능이다. 대표적으로 1997년 총리에 당선된 토니 블레어가 어떤 이유로 노엘 갤러거를 초대했는지, 더 나아가 화양연화를 누리던 브릿팝이 “왜 사형선고를 받았는지” 자세하면서도 재미있게 알고 싶다면 그냥 이 책을 펼치면 된다. 총 300쪽의 작은 분량이지만 충실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거의 흠잡을 구석이 없다.

이경준 평론가의 글에 대해 마땅히 언급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읽는 맛이 끝내준다. 속도감 있게 읽히면서도 기억에 남을 문장이 수시로 나온다. 언급했듯이 훌륭한 논픽션 소설 한 편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올 정도다. 서문에서부터 그의 글은 빛을 발한다. 읽어보시라.

“이 시점에서 누가 최종 승자인지를 정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아마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남겨진 기록을 따라서 지나간 시대를 잠깐 거슬러 올라가볼 뿐이다. 그들이 찬란하게 꽃피웠던 브릿팝을 복기해볼 뿐이다. 그 작업은 정확할 수 없다. 항상 완전할 수는 없는 사료, 편견, 잘못된 기억, 빗나간 애정 등 여러 변수들과 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비단 서문만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다. 이렇게 호흡이 좋은 글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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