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첫째를 임신하고 얼마 안 되어 직장을 그만두었다. 일은 재미있었고, 상사는 ‘여성들은 한번 일터를 떠나면 돌아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 다시 생각해보라’며 간곡한 조언을 건넸으나,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물론 퇴사 자체를 다소 가볍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나는 젊었고, 능력이 있었으며, 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이 좀 키워놓고 다시 취직하면 되지 뭐.

물론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출산 후에는 신생아의 5분 대기조 노릇을 하느라 취직은 생각할 틈도 없었다. 구인공고를 뒤져 면접을 보러 다니기는커녕 수면 시간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 100일 된 아기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 직장 선배나 동료들이 썼던 3개월의 출산휴가가 얼마나 짧은 기간이었는지를 그때 깨달았다.

아이가 좀 큰 다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믿고 맡길 별도의 보호자가 없는 환경에서 아이와 관련한 일은 대개 엄마의 책임으로 귀결되곤 했다. 남편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결국 아이를 돌보며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었던 내게 열린 문은 거의 없었다. 잠투정으로 칭얼대는 아이를 토닥일 때마다 상사가 건넸던 조언이 떠오르곤 했다.

그럼에도 사실 크게 절망하지는 않았는데, 회사가 그립긴 했지만 남편과 아이가 함께하는 생활 또한 나름대로 행복했기 때문이다. 본래 완벽하게 만족스럽기만 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재취업이 안 된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직업으로 전직했다고 여기면 그만이었다. 아이를 돌볼 때는 보육교사로, 집안일을 할 때는 가사도우미로. 실제로 육아와 가사노동만으로도 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나간 모임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집에 있어서 좋으시겠다. 우리 남편은 내가 노는 꼴을 못 본다니까요.” 당시 얼마나 황당했던지, 하루 종일 씩씩대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논다니! 마음 편히 잠깐 앉아 있지도 못하는 내게, 밤새 자주 깨는 아이 탓에 하루에 고작 네다섯 시간밖에 못 자는 내게, 아이가 딸려 있어서 은행이며 병원이며 시장조차 다니기 어려워하는 내게 집에서 논다고?

내가 이토록 고생하니 좀 알아달라는 투정이 아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일이란 그런 것이다. 다만 나는 궁금했다. 수많은 직업 중에 유달리 ‘주부’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부부 동반 모임에서 남편의 동료는 나에게 “그럼 지금은 집에서 쉬시는 거네요?” 물었고, 지인 하나는 “남편 돈으로 놀고먹으니까 얼마나 좋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왜 주부는 직업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놀고먹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일까.

정아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은 이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회사를 다니다 퇴직 후 전업주부를 거쳐 현재 소설가로도 활동 중인 저자 역시 오랫동안 왜 전업주부는 직업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지, 왜 종일 일하고도 사람들로부터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게 되는지 의문을 품어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관련 도서 15권을 통해 가사노동을 둘러싼 사회·역사·경제적 맥락을 짚어내며, 주부를 향한 불공정한 시선, 그러니까 ‘집에서 논다’는 표현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현상임을 이야기한다.

먼저 ‘일’을 ‘일’로 명명해야 한다

책을 읽고서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런 온갖 문제의 핵심에는 다름 아닌 ‘돈’이 있었다. 주부는 매일 가사와 육아에 시달리는데도 별도의 월급을 받지 않는다. 남편이 건네는 ‘생활비’는 주부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아닌, 가족을 위한 가장의 피땀 어린 결과물이기에 주부는 이 돈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는 셈이 된다. 결국 밖에서 벌어오는 돈이 없으므로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하든 주부는 직업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주부가 자신의 아이를 키우면 ‘집에서 노는’ 여성이 되지만, 다른 아이를 키워주고 그에 대한 금전적 대가를 받으면 ‘일하는’ 여성이 되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를 키워주는 동안 누군가에게 자기 아이를 맡기는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리하여 총수입은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로 ‘노는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말이다. 평생을 온갖 가사노동에 시달렸을 나이 든 여성들이 종종 제사 등의 행사에 젊은 층보다 오히려 더 매달리곤 했던 이유는, 그나마 그것이 유일하게 그들의 ‘일’로 인정받는 항목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주부를 ‘잉여 인력’ 취급하는 이러한 풍토를 해결하는 것의 핵심은, 주부라는 그 이름을 그림자로 머물게 하지 않고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육아와 살림 등의 각종 노동에 대해 ‘배려’ ‘헌신’ ‘봉사’ 따위의 ‘말’로 대충 때우고 넘어가는 대신, 금전적 보상과 경제적 가치를 부여해야만 비로소 주부라는 직업은 ‘집에서 노는 것’이 아닌 정식 ‘일’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일간지에 연재 중인 내 칼럼에는 직함이 ‘주부’로 되어 있는데, 누군가 그것을 보고 왜 ‘작가’가 아닌 ‘주부’라는 직함을 사용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에 실린 다음의 문장이 답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여성의 무보수 노동을 경제모델에 포함하는 것이다. ‘일’을 ‘일’이라고 명명해야 다음 순서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어야 다음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98쪽).”

기자명 한승혜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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