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7월22일 전북도의회에서 ‘나쁜 차별금지법 반대 전북추진위원회’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동성애를 정당화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드디어 차별금지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었다. 민주당 의원들이 차별금지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법무부 장관도 전향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황당무계한 가짜뉴스도 위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시민사회, 학계, 종교계에서도 ‘역대급’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환영 의견을 냈고, 각계에서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한 수많은 토론회와 세미나가 열리기도 했다. 이 정도로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이제 정부와 국회가 화답할 차례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보수 개신교계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반대론의 핵심은 차별금지법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반동성애 설교를 하면 감옥 간다’는 식의 가짜뉴스는 이미 충분히 반박된 것 같다. 이제 조금 더 수준을 높여 종교와 사회가 어떻게 접점을 만들어갈지, 그 과정에서 차별금지법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차분히 논의해볼 기회가 왔다.

차별금지법이 세상만사에 관여할 것처럼 오해받기도 하는데, 사실 차별금지법은 세상의 모든 차별을 빠짐없이 금지하는 법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으로 금지하는 영역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다. 차별이 금지되는 영역은 ①고용 ②재화·용역·시설 ③교육 ④행정서비스, 이렇게 네 영역이다. 그러니까 네 가지 영역에서 차별이 금지되는 것이고 이 영역 밖에서의 차별은 금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적으로 교류하는 영역이나 가족, 종교 등은 차별금지법의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 영역에서는 차별이 허용된다는 얘긴가? 개인적으로는 나는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 역시 반대한다. 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법 집행에는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하다. 법은 문제가 심각하거나 중요한 영역 또는 규제가 가능하고 효과를 볼 수 있는 분야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실제로 가톨릭은 여성 사제를 허용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한다.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는 여전히 여성 목사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에 긍정적 시각을 가진 불교계에서도 비구니가 종단 대표자나 교구본사 주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계의 성차별적 관행은 차별금지법이 금지하는 차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종교 영역에 차별금지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계 내부 문제는 차별금지법의 적용 대상이 아님이 은연중에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차별금지법이 종교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종교가 종교 밖으로 나와서 사회와 접속한다면 차별금지법의 규율 대상이 된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도 금지하지만, 국가도 종교의 고유한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어떤 종교의 특정 교리를 사회에 적용하려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종교계가 자신의 교리에 입각하여 회사·교육기관·사회복지시설 등을 운영한다면 더 이상 종교의 자유를 내세울 수만은 없다는 말이다. 세속국가에서는 특정 종교의 교리가 사회에서 그대로 관철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종교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야 할 사회에 나왔을 때는 당연히 공동체의 기본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 성직자나 동성애자 성직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의 교리는 법으로 금지되지 않지만, 종립 학교나 종립 사회복지시설에서 여성이나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네 가지 차별금지 영역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경계를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영역에서만은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차별’할 수 없으며 차별금지라는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다.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은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자신들의 입장이 차별금지법에 의해서 규제받는다며 ‘역차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은 교리 자체를 규제하지 않는다. 다만 그 교리가 회사에서, 학교에서, 사회복지시설에서 관철되는 것을 금지할 뿐이다. 역차별이라는 용어를 끌어들여 문제를 꼬아놓지 말고, 정확히 어떤 자유가 침해되는지, 어떤 자유를 보장받고 싶은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문제가 선명해진다. 사실상, 회사에서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해고할 자유, 대학에서 동성애자 학생을 차별할 자유, 사회복지시설에서 성소수자를 괴롭힐 자유를 달라는 것 아닌가? 하지만 특정 종교의 교리를 보호하기 위해 회사에서, 대학에서, 사회복지시설에서 이러한 자유가 인정될 수는 없다. 차별금지법은 딱 이 지점에서부터 선을 긋는다. 종교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종교가 사회와 접촉면을 만들었을 때는 공동체의 모든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뉴스9월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회 민심전달 캠페인’에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공존의 조건을 마련하는 법

동성애에 반대하는 교리를 고용이나 교육 영역에서 실천할 수 없다고 해서 너무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 두루 적용되는 세속국가의 대원칙이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종교가 실제로 무정부 상태를 만들기 위한 무장에 돌입한다면 당연히 규제 대상이 된다. 성차별적 관행이 남아 있는 종교계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성차별을 하는 것은 금지된다. 강제결혼이나 조혼, 여성할례 등을 정당화하는 종교가 그것을 실행해 옮기려고 하면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 불교계 회사에서 불교도만 채용한다면? 원불교계 택시 회사에서 원불교 신자만 손님으로 받고, 가톨릭계 대학에서 가톨릭 신자만 교직원으로 채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세상에서 시민들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종교를 의식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종교 중립적인 세속국가에서는 모든 시민에게 어떤 종교를 믿건 믿지 않건, 종교를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거라는 신뢰를 줘야 하고 그렇게 믿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것이 종교 간 분쟁을 막고 공동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차별금지법은 바로 그러한 ‘공존의 조건’을 마련하는 법이다.

종교가 사회와 만날 때 사회로부터 수많은 혜택을 받게 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종교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국가가 마련한 교육과정과 시스템 내에서 운용되며 국가가 인정하는 공식 학위를 수여한다. 심지어 직접적인 재정지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혜택을 공유하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에 진출했을 때는 사회의 기본 규칙을 준수할 의무가 도출된다. 사회의 혜택을 안 받아도 좋으니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그건 상관없다. 실제로 차별금지법에서 차별이 금지되는 ‘교육기관’은 “교육부 장관의 평가인정을 받은 학습과정을 운영하는 교육훈련기관” 등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차별금지법의 적용을 피하려면, 국가의 교육시스템과 무관하게 완전히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운영하면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차별금지법은 세상의 모든 차별을 남김없이 규제하는 법이 아니다.

종교계의 변화 이끄는 사회의 변화

그렇다고 차별금지법이 종교와 사회를 절연시키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이념이 세속화된 형태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예컨대, 어떤 대학에서 교직원을 채용할 때 신앙증명서를 요구해서는 안 되지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한 진리와 자유의 정신”이라는 건학이념(연세대)이나 “불교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과 인류사회 및 자연에 이르기까지 지혜와 자비를 충만케 하여 서로 신뢰하고 공경하는 이상세계의 구현”이라는 건학이념(동국대)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 종교 제례의 형식으로 운영되는 채플 수업을 의무화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그 대학 특유의 건학이념을 교육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성’으로서 존중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진리와 자유라는 보편적인 이념으로 승화시키고, 부처의 자비를 상호 신뢰와 공경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재해석하여 대학을 운영하는 것이야말로, 세속국가에서 종교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도 얼마든지 종교는 사회와 교류하며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이제는 특정 종교의 신자들만 채용하고 특정 종교의 신자들만 교육해야 종교의 자유가 지켜질 수 있다는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차별금지법이 종교 영역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노파심에 몇 자 덧붙여본다. 종교는 끊임없이 종교 밖 사회와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사회가 평등해지는 만큼 종교도 평등해질 것이다. 실제로 종교계의 여러 차별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국 개신교만 해도, 1959년 연합감리교회를 시작으로 여성 목사를 인정하는 교단이 계속 늘어났다. 미국에서는 동성애자를, 신자는 물론 성직자로도 인정하는 교단이 이미 상당수다. 사회에서 차별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데, 교회만 나 몰라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을 테다. 어떤 법도 종교계에 이래라저래라 명령한 바 없지만, 사회의 변화가 종교계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종교계의 여러 차별적 관행은 사회가 더 평등해지는 만큼 점차 개선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는 성소수자를 축복했다거나 동성애에 우호적인 책을 냈다는 이유로 성직자를 징계하려 하고 있지만, 피할 수 없는 사회변화에 저항하는 마지막 몸부림일 뿐이다. 차별금지법이 이러한 무도한 시도를 직접 규제할 수는 없겠지만, 차별금지법이 만드는 평등한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반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그렇게 종교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종교계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의미 있는 변화를 조금씩 만들어갈 것이다.

기자명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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