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후 방영되는 KBS 〈동물의 왕국〉은 약 50년 전 처음 방영되었다. 시청률 3~4%대를 유지하고 있다. BBC 등 외국 방송사의 동물 다큐멘터리를 우리말로 더빙해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은 약육강식의 생태계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주 시청층은 50·60 세대 이상이다.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의 박경옥 작가 남편도 〈동물의 왕국〉 30년 애청자다. 그는 남편뿐 아니라 한국의 베이비부머 남성 상당수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동물이 먹이를 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야 하는 모습이 본인이 사는 모습과 비슷해 공감이 간다’는 이유였다.

사냥의 시간, 전속력으로 뛰는 사자처럼 50·60 세대도 인생 전반을 질주하듯 보냈다. 산업화 시대를 이끌었고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으며 외환위기의 굴곡을 정면으로 겪었다. 그 중심에 베이비부머가 있다. 1차 베이비부머(1955~1964년생)가 올해 법정 노인 기준 연령인 65세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2차 베이비부머(1968~ 1974년생)까지 합치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다. 한 해 평균 85만명이 ‘고령인구(65세 이상)’로 편입된다. 상당수가 고졸 이상의 고학력 도시생활자이고 소득과 소비 수준이 높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다르다. 자녀와 부모 부양의 부담을 동시에 안고 있지만 연금 수령 시점보다 빨리 주된 일자리에서 퇴장한다(평균 49.5세). 퇴직과 동시에 재취업을 준비한다. 아직 사회적으로도, 스스로도 노인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이른바 ‘젊은 노인’이다. 이 모순되는 단어의 조합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을 앞두고 정부가 노인의 법정 기준 연령 상향을 시사했다.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의 주체로 더 오래 일하라는 메시지다. 수명이 늘어난 만큼 중년과 노년 사이 또 다른 생애 구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퇴직 이후 ‘노후의 재구성’을 고심하는 50·60 세대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61년생 강찬영, 64년생 박경옥
퇴직 후 의식주를 줄이다

ⓒ시사IN 조남진박경옥(오른쪽)·강찬영 부부. 박경옥씨는 퇴직 이후의 삶을 유목 생활에 비유했다.

박경옥·강찬영 부부가 오전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다. 남편 강씨가 오후부터 택배 상하차 일을 한다. 낮에는 온라인으로 대학 수업을 듣는다. ‘주독야경’이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일터인 구로구 오류동까지 지하철로 편도 1시간30분이 걸린다. 물량에 따라 오후 3시30분 혹은 4시30분부터 일을 시작해 밤 10시30분이나 11시30분에 끝낸다. 쉴 틈 없이 밀려드는 물량 때문에 택배 상하차는 ‘극한 직업’으로 알려져 있다. 하루 만에 일을 그만두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강씨는 3년째 하고 있다. 드물지만 현장엔 60대 후반도 있다.

강씨가 일하는 곳은 대기업의 하청업체다. 그는 한때 같은 대기업의 계열사에서 임원으로 일했다. 20대에 입사해 50세 무렵 임원이 되었고 2년 뒤 퇴직했다. 27년을 일했다. 퇴사 당시 지점장이고 실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았다. 그가 퇴직한 지 2년 되던 해, 그 회사도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대기업의 운명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강씨는 5개월 만에 중소기업에 재취업했다.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계약 성사 단계에서 어그러졌다. 1년6개월여 만에 권고사직을 당했다. 퇴직 당시 아들 둘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졸업까지 마무리하는 데 비용이 들었다. 둘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주변을 봐도 50·60 세대의 퇴직 이후 살림에서 교육비가 차지하는 부분이 꽤 크다. 강씨는 어느 정도까지 자녀를 지원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20대 초반까지야 어쩔 수 없지만 20대 중후반에도 계속 자금이 들어가면 부부의 노후 자금이 바닥난다. 판단을 잘 해야 한다.”

박씨는 30여 년간 전업주부로 살았다. ‘사모님’ 소리를 듣기도 했다. 안정적인 생활이 지속될 줄 알았다. 준비 없이 남편의 퇴직을 맞이했다. ‘은퇴 남편 증후군’을 겪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답답했다. 남편이 50대 초반이었고 그간의 경력을 바탕으로 재취업이 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순진했다. 안 되는 일에 에너지를 쏟았다는 생각이 든다. 퇴직 후 다른 직장 잡는 건 로또 당첨보다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퇴직금을 헐어 썼더니 2년 지나자 바닥이 보였다. 국민연금 받을 나이는 10년 이상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의식주와 소비를 줄였다. 결혼 24년 만에 마련한 37평짜리 아파트에서 16평 빌라로 이사하고 남은 돈으로 오피스텔을 구입했다. 고정 수입이 필요해서다. 이사한 빌라는 철공소, 고물상 인근이라 소음과 공해가 있었지만 지하철역과 가까웠다. 이삿짐을 처분하며 박씨는 중고 거래의 달인이 되었다. 흠집 난 과일을 고르고 음식을 적게 먹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공과금은 100원 할인이라도 자동이체를 신청했다. 그래도 생활비는 부족했다. 박씨도 일자리를 찾아봤다. 장애인 시설 보조나 아이돌봄 서비스에 지원했지만 경험이 없어 합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남편이 퇴직한 지 1년 반 되었을 때 박씨에게 우울감이 왔다. 박씨는 ‘생애설계 상담’을 무료로 받았다. 남편에 대해 이야기하자 상담사가 말했다. “누구를 바꿀 수는 없다. 대신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라.” 전부터 〈동의보감〉, 한의학 등을 공부했던 박씨는 강의를 해보고 싶었다. 처음엔 재능기부(무료 강의)였는데 점차 수입이 생겼다. 창의적인 활동을 통한 경제활동이 만족스러웠다. 남편 퇴직 이후의 경험을 글로 썼다.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냈고 책 출간으로 이어졌다. 주부로 살던 그에게 ‘퇴직 쓰나미’는 남편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지식 농부’라고 부른다. 강씨는 회사원에서 육체노동자가 되었고, 박씨는 주부에서 지식 농부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경남 사천(삼천포) 출신이다. 맞선을 본 뒤 세 번을 더 만났고 결혼했다. 박씨는 남편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 유머에 끌렸다. 말도 잘 통했다. 강씨는 입사 후 한눈팔지 않고 한 직장을 다녔다. 네덜란드, 스페인에서 주재원으로도 근무했다. 체류 당시 아내 박씨가 그린 유화 여러 점이 집안 곳곳에 걸려 있다. 가족사진과 함께, 지난 삶의 흔적이다. 두 사람은 지금 생활이 만족스럽다. 박씨는 퇴직 이후를 유목 생활에 비유했는데 ‘새로운 서식지로 가기 위해서는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새 서식지에 적응했다.

박경옥씨는 물질과 정신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집 사고 빚도 갚아야 하니까 40대까지는 열심히 달려간다. 50세 이후에도 그렇게 가면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게 된다. 이렇게 무너진 균형을 다시 잡는 기회가 은퇴라고 볼 수도 있다.” 동양학을 공부 중인 남편 강씨는 BTS의 팬덤인 ‘아미’에게 관심이 많다. BTS 노래 가사에 나오는 우주의 의미와 동양사상을 해외 팬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해주고 싶다. 박씨는 “퇴직 후 회색일 줄 알았는데 무지개 색깔이었다”라고 말했다. 비극일 줄 알았는데 희극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고, 퇴직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생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사IN 신선영고현종씨는 55세 이상 조합원이 가입하는 ‘노년유니온’ 사무처장이다.

66년생 고현종
노인 차별의 현장을 목격하다

고현종씨의 몸엔 문신이 여럿 있다. 팔에 새겨진 문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물었다. 메멘토모리(Memento mori)와 케세라세라(Que sera sera)라고 했다. 각각 ‘죽음을 기억하라’ ‘이루어질 일은 언제든 이루어진다’라는 의미다.

고씨는 ‘노년유니온’ 사무처장이다. 전국 단위 설립을 인가받은 노조다. 55세 이상 조합원이 300여 명이다. 2012년 처음 만들어질 때만 해도 70대 미만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동안 70대가 많아졌다. 50대 중반인 그가 만나는 노인 상당수는 생계를 위해 일한다. 지난 8월 기준, 한국의 60세 이상 고용률은 43.9%다. 노인 빈곤율도 2018년 기준 45.7%로 OECD 평균의 3배다. “어르신들이 일자리를 찾을 때 운동, 보람, 사회적 기여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더 들어가 보면 아무래도 경제적인 부분이 크다.”

정부의 노인 일자리 사업은 급여가 낮은 단순노무직 위주다. 쓰레기 수거나 교통 안내 등 월 최대 27만원을 받는 공공형 일자리 사업의 경우, 생계를 해결하기엔 부족해 다른 일자리를 찾기도 한다. 그보다 젊은 50·60 세대에겐 건설 현장 일용직이 인기다. 현장에 노조가 잘 조직되어 있어서 과거와 달리 급여를 떼일 염려가 적고 하루 여덟 시간 노동도 잘 지켜지는 편이다. 도장 등의 작업엔 여성도 많이 유입되고 있다.

한국인 대다수가 50대 초반에 퇴직한다. 연금 수급까지 10년 이상의 공백이 있다. 고씨는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 현상도 그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은퇴 후 경비원, 주차관리원 등의 경험을 담은) 〈임계장 이야기〉의 저자는 60세까지 공기업에서 일했는데도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원래 힘든 일 했던 분들은 더 어렵다. (진입장벽이 낮은) 경비, 청소 등으로 내몰리며 인생 막판의 직종에 종사한다는 낙인이 찍히고 갑질도 당한다.” 나이 든 사람들을 향한 부정적 시선에는, 쓸모없는 집단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고씨 스스로도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 20대에 운전면허를 따고 전자대리점 화물차 운전을 했다. 보험설계사로도 일했다. 6개월간 실적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 서울 왕십리 중앙시장 뒷길에서 스페어타이어를 굴리기 시작했다. 꼬박 6개월 동안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양복을 입고 타이어를 굴리니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상인들이 붙들고 사정을 물었다. 그제야 보험설계사인데 당신들의 스페어타이어가 되고 싶은 심정으로 굴렸다고 말했다.” 갑자기 보험 가입이 늘었고 일하는 지점에서 가장 좋은 실적을 냈다. 회사에서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듣더니 그를 교육 담당으로 발령 냈다. 몇 차례 스페어타이어의 전설을 들려주고 나니 밑천이 떨어졌다.

구청에서 공공근로를 하기도 했다. 진보정당에 몸담으며 지역위원장을 맡았던 당시엔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공공근로 실태를 파악하려고 위장취업을 했느냐’고 물었다. 위원장이 공공근로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택시 운전과 노점상도 경험했다. 동묘역 앞에서 맥반석 오징어를, 건국대 앞에서 분식을 팔았다. 크리스마스 시즌엔 인형과 캐릭터 컵을 불티나게 팔았다. 학습지 교사이자 학원강사인 아내와 아이 둘을 길렀다.

그러다가 노인 일자리 지원기관인 종로시니어클럽과 연이 닿았다. 문화유산 해설, 치매 보조 같은 일자리를 어르신들에게 연결해주는 일을 했다. 보통의 삶을 살아온 노인을 많이 만났다. 자연스럽게 연령에 따른 차별을 많이 목격하게 되었다. 이력서로 합격했는데 등본을 낸 뒤 퇴짜를 맞는 식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다.

고씨는 자신의 노후에 대해서는 불안하지만 낙관하는 편이다. 믿는 구석은 기초연금과 노인 일자리다. 50세 무렵, 임대아파트에 들어가기도 했다. 지난 삶, 그리고 주변에서 목격하는 어려운 살림과 비교해 가진 게 많다고 생각한다.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낙관이다. 의료비로 인한 불안감이 있다. 암 투병 중인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다. 본인의 건강도 자신하기 어렵다.

고씨는 최근 동대문구 신설역 인근에서 ‘데쓰(Death) 카페’를 준비 중이다. 안락사법 제정을 위한 논의의 거점이 될 공간이다. 그는 노인들에게 선택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전 장례식이 안착되는 데에도 관심이 있다. 노인들끼리 서로 돕는 돌봄 시스템에 대한 아이디어도 추진해보고 싶다. 그는 “마지막 순간만은 누구나 ‘잘 지내고 간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메멘토모리와 케세라세라. 몸에 새긴 문구와 연결됐다.

 

63년생 조기훈
돈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시사IN 조남진조기훈씨는 중장년층을 지원하는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컨설턴트로 일한다.

“아빠 쉰, 아빠 갱.”
조기훈씨가 50세가 되었을 때 딸들이 자주 하던 말이다. 아빠의 나이가 쉰이고, 갱년기라는 의미다. 그즈음 그는 드라마를 보다가 우는 일이 잦아졌다. 세 아이에게 간섭하는 일도 늘었다. 이유 없이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세일즈맨으로 일은 열심히 하는데 성과가 좋지 않았다. 후배들보다 경험도 경력도 많은데 성과가 안 났다. 자신의 30대가 떠올랐다. 무능한 상사들을 보며 왜 퇴직을 안 하냐고 수군대던 기억이 났다. 자신이 그때 그 상사의 모습인 것 같았다. 나이가 들며 보수적으로 변하고 위축됐다. 전환이 필요했다. 어릴 때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의 모자에 쓰인 글자가 생각났다. ‘준비.’ 준비가 필요했다. 노후라는 위기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상담 공부를 시작했다.

조기훈씨를 만난 건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에서였다. 그는 50플러스 컨설턴트로 일한다. 서울시는 2016년 50~64세 중장년층을 지원하기 위해 50플러스재단을 만들고 교육, 일자리 등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100세 시대를 살게 되는 첫 번째 세대로 50·60을 규정하고 생애주기의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봤다. 정책적으로 지원할 대상인 동시에 사회적 기여가 가능한 그룹으로 본 것이다.

조씨는 여기서 50·60 세대를 대상으로 생애설계 상담을 한다. 서울시의 공공일자리이기도 하다. 은퇴설계 같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생애 전체를 계획한다. 재무관리뿐 아니라 가족관계, 사회적 관계, 건강, 여가, 취미 등 비재무 영역까지 포괄한다. 인생 후반 설계가 필요하거나 동년배와 고민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문을 두드린다. 그는 2017년 설립된 꿈세생애설계협동조합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조합원이 14명이다. 지자체의 퇴직자 지원센터에서 생애설계 상담사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상담, 강연 등을 맡기도 한다.

조씨는 전북 순창에서 6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87년 12월에 자동차 회사에 입사했다가 1999년 1월 퇴직했다. 면접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일본이 세계경제를 주름잡는 이유’에 대해, 그는 경영학 전공자로서 자신에 차 답변했다. ‘촌 출신’이라 튀어야겠다는 생각에 연수원에 가서도 앞줄에 앉았다. 반장을 뽑을 때 손을 번쩍 들었다. 11년 넘게 일했다. 사장 비서로 일하는 동안 특히 몸과 마음이 지쳤다. 사람 취급을 못 받을 때도 있었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직을 결심했고 몇 차례 회사를 옮기는 동안 보험설계와 중소기업 재무지원 등의 일을 했다.

직장 생활과 상담 공부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 차례 휴학하기도 했다. 직장 다니는 딸들의 도움으로 상담대학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큰딸이 ‘브라질 채권에 투자해서 돈을 좀 벌었다’며 등록금을 건네주었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견뎌야 다른 삶이 가능했다. 또래 퇴직자들 중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 많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순간이다. 3년 전 자진 퇴직한 그는 지난해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했다. 수익이 직장 생활 당시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아이들 결혼식 식대를 책임지기 위해 통장을 만들었다.

동년배를 상담할 때는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공감이 잘 된다. 머리로만 아는 것과 다르다. 중동에서 18년 일하고 퇴직한 남성이 기억에 남는다. 경기가 좋지 않아 희망퇴직을 하고 집에만 있으니 아내와 트러블이 생겼다. 어느 날 냉장고에서 빵을 꺼내 먹는데 아내가 말했다. “사다놓고나 처먹어.” 그는 죽고 싶다고 했다. “다시 돈을 벌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더라. 상담해보니 가족과 오래 떨어져 살아서 정서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회복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열 번의 상담을 제안했다. 두 번 오고 안 와서 연락하니 취업했다고 했다. 그 또래 남성들은 힘이 돈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근본적인 문제는 가족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재취업과 부모 및 자식 부양의 부담이 조씨가 만난 50·60 세대의 주요 고민거리다. ‘아빠, 갱’이던 그는 50세에 삶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지금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또래들 삶에서 필요한 ‘준비’가 무엇인지 궁리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시사IN 이명익이학영씨는 노인 소비자의 피해를 예방하는 ‘은빛소비자지킴이’로 일한다.

53년생 이학영
노인 일자리는 젊은 세대가 개발해야

이학영씨는 대전의 한 여고 출신이다. 1960년대엔 딸을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가 적지 않았다. 동창 30여 명이 아직도 한 달에 한 번 모인다. 당시 졸업 후 대기업 비서실에 취직한 친구도 있었다. 교사 월급이 13만원이었다면 그 친구는 40만원을 받았다. 몇몇 친구들은 이씨가 왜 교사를 택했는지 의아해했다. 비서가 된 친구들은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교사라고 편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셋째가 배 속에 있을 때 교장이 말했다. “사표 쓰는 게 낫지 않아요?” 그런 시대였다. 인권유린인지도 몰랐다. 학교는 어쨌든 쫓아내지 않았다. 그는 자식이 아니라 연금이 나를 보장해준다고 말했다.

친구들을 보면, 변변한 수입원이 없어서 곤란한 경우가 많다. 65세는 옛날로 치면 50~55세의 건강상태다. 몸이 건강한데 일할 곳이 없다. 눈높이를 낮추고 노인 일자리를 찾아다니지만 모두 일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식들도 살기 바쁘다. “어디서부터 사정이 힘들어지는지 보면, 아들 장가 들이는 게 기점이다. 하나 있는 집을 팔아 전세 주고 본인도 전셋집으로 가는 거다. 자식이 서울에 살면 대전 집을 팔아도 전세자금을 마련하지 못한다.” 결국 부양의 책임이 노후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다양한 노인 일자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교직 생활을 30여 년 했다. 고등학교에서 일반사회를 가르쳤다. 정년이 62세인데 59세에 퇴직했다. 퇴직 후 4~5년은 손자 손녀를 돌봤다. 초등학생인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수영이나 태권도 학원 차량에 태워 보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어느새 더 이상 손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은빛소비자지킴이’ 모집 공고를 봤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발굴하고 보급한 사회서비스형 일자리로, 하루 3시간씩 10개월간 월 활동비 59만4000원을 받는다. 수당을 합하면 더 올라간다. 고연령 소비자들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공공시설이나 노인이 많은 복지시설에서 노인들의 소비자 상담을 받는다. 선발 당시 청소년 상담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

지난 3월부터였지만 코로나19 때문에 5월로 미뤄졌다. 세종시청 1층 로비에 책상이 마련됐다. 노인들이 가장 많이 제기하는 민원은 ‘핸드폰’과 관련되어 있다. 매장에서 설명을 들을 때 ‘기기 값은 무료’라고 했는데 청구서를 받아보면 기기 값이 포함되어 있는 식이다. 이런 민원이 한 달에 다섯 건 정도다. “노인들이 매장에 전화 걸어 따지면 제대로 답변도 안 한다. 어느 날 다리가 불편한 89세 할아버지가 민원 때문에 찾아오셨다. 원래는 창구 역할이라 상담 내역을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데 직접 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매장에선 ‘윗분과 상의해서 말씀드리겠다’며 끊더라. 이후 할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는데 ‘소비자 고발을 취소해주면 기기 값을 돌려주겠다’고 했단다.” 하루 서너 시간의 대면 상담은 그에게 꼭 맞는 일이었다. 만족도가 높았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이어지자 얼마 전부터 재택근무로 전환되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한국소비자원이 지정한 유해 소비품목을 점검한다. 회수·판매중지 판정을 받은 식품이 온라인 쇼핑몰에서 팔리고 있으면 신고하는 작업이다. 재택근무로 전환되면서 같은 조의 조원 5명 중 2명이 그만두었다. 컴퓨터 조작이 익숙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씨를 아주머니라 부르는 아이들이 없었다. 모두 할머니라고 했다. 나이 든 걸 그때 실감했다. 아이들 처지에선 당연하지만 65세 무렵엔 그걸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식당의 ‘키오스크(무인 단말기)’도 낯설었다. “나이 먹은 티를 안 내려고 하는데 기계 앞에 서는 게 싫다. 마음먹고 해보면 안 어려운데 그냥 쳐다보기가 싫다. 기차표도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다지만 지갑에 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다.” 몸이 좀 불편해도 마음이 편한 대로 실행하고 만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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