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가운데 앉은 이)이 4월29일 질병관리본부에서 코로나19 어린이 특집 브리핑을 하고 있다.

신뢰는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고 유능한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신뢰가 낮으면 같은 일을 할 때도 더 많은 계약과 보증서와 변호사와 경찰이 필요하다. 이게 다 비용이다. 그래서 한 사회의 신뢰수준은 그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재산, 즉 사회적 자본이다. 나아가 신뢰의 결과로 사회가 더 잘 작동하면, 그 결과 다시 사회의 신뢰 수준이 높아진다. 선순환이다.

다만 이 선순환에 도달하기가 극히 어려워서 지구상 대부분 나라들은 저신뢰 사회의 덫에 걸려 있다. 한국은 저신뢰 사회의 대표 격으로 거론되는 나라다. 저신뢰 사회는 공동의 프로젝트를 해내는 일에 더 무능한 사회다. 〈시사IN〉은 신뢰가 사회의 핵심 자원이고, 신뢰의 선순환 고리에 도달해야 한국 사회에 미래가 있다는 판단으로 2007년 창간 이후 매년 창간기념호에 ‘대한민국 신뢰도 조사’를 이어오고 있다. 올해로 14년째다.

〈시사IN〉 신뢰도 조사는 크게 공적제도 신뢰도와 언론 신뢰도 두 주제를 다룬다. 2020년 조사에서는 두 영역 모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언론 신뢰에서는 조사 역사상 최초로 ‘가장 신뢰하는 언론매체’ 1위에 유튜브가 꼽혔다. 기성 미디어의 퇴조와 미디어 소비 양식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공적제도 신뢰에서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기류가 감지됐다.

〈그림 1〉은 이번 조사에서 10점 만점으로 신뢰도를 측정한 공적제도 17개를, 점수가 높은 순서로 나열한 것이다. 공적제도는 대통령과 정당 그룹, 국가기관 그룹, 복지제도 그룹으로 나눠 조사했고 결과만 한 그림으로 합쳤다. 21대 총선 특성상 여럿 등장한, 비례대표 당선자만 있는 신생정당은 조사 대상에서 뺐다. 질병관리청이 7.39점으로 신뢰도가 가장 높았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비롯한 코로나19 방역팀이 국민에게 얻은 신뢰가 탄탄하다. 7.39점은 모든 공적제도를 통틀어서 14년 조사 역사상 최고 점수다.

이것은 한국이 방역전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선전한 결과인 동시에, 그 선전을 만들어낸 원인이기도 하다. 방역 최전선 지휘관이 강한 신뢰를 받기 때문에 당국의 메시지가 국민들에게 빠르게 받아들여진다. 2차 유행이 한창이던 8월28일 정례 브리핑에서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질병관리청 출범 전이다)이 “지금 바로 유행을 통제하지 않으면 다음 주 하루 2000명까지 확진자가 증가할 수 있다”라며 방역 지침을 준수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긴장감이 고조되며 방역 참여 분위기가 강하게 조성됐다.

방역 참여 수준이 높아지면 방역도 더 잘된다. 한국은 서구 국가의 마스크 반대 시위와 같은 방역정책 반대 시위를 찾아볼 수 없고, 극우 개신교계의 8·15 반정부 집회도 방역 협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정은경 본부장의 경고 이후 유행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벗어나 하루 확진자 100명 이하로 일단 제어됐다. 이렇게 결과가 좋으면 방역 최전선 사령관의 신뢰도 올라간다. 그러면 다시 말에 힘이 실린다. 선순환이다. 신뢰는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무형의 핵심 자원이라는 사실을, 코로나19 방역전은 극적으로 드러내준다. 〈시사IN〉 신뢰도 조사 14년 역사에서, 2020년 조사는 신뢰의 선순환 구조가 유난히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다.

방역전이 길어지면서 세계 각국에서 방역이 정쟁 소재로 쓰이는 사례가 늘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방역정책의 핵심 인물로 주목받은 앤서니 파우치 박사를 깎아내리거나 험담을 퍼뜨리거나 정책 결정에서 배제하는 등 신뢰를 흔들었다. 신뢰가 무너지면 악순환이 걸린다. 미국은 9월23일 현재 685만명이 감염되고 20만명이 사망하여, 확진자와 사망자 모두 가장 많은 나라다. 세계 인구 24명 중 한 명이 미국에 사는데, 세계 코로나19 사망자 5명 중 한 명이 미국에서 나왔다. 미국은 마스크를 둘러싸고도 정치적 논란을 벌이는 대혼란기로 접어들었고, 한때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자랑했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위상도 추락했다.

질병관리청의 이례적인 신뢰도 지수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8·15 반정부 집회를 주도한 극우 개신교계에서 나오던 주장이 국민의힘 유력 정치인들을 통해 재생산됐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9월10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밖에서 회의적으로 보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확진자 수가 정치적으로 조절되는 것 아닌가”라는 의혹을 던지며, 국회만이라도 전원 검사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9월14일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필요할 때 검사를 늘려 공포를 조장한다는 의심이, 정부가 방역을 다른 목적에 이용한다는 의심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미국과 달리 이런 공세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방역당국 신뢰도가 진보와 보수를 따라 갈리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한 이념 성향이 진보·중도·보수인지에 따라 나눠보면, 질병관리청의 신뢰도 점수는 진보 8.35점, 중도 7.24점, 보수 6.74점이다. 진보 성향으로 갈수록 신뢰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보수 응답자의 신뢰도도 매우 높다. 10점 만점 기준으로 ‘0점’부터 ‘4점’까지는 불신 쪽에 더 기울어진 응답으로 볼 수 있다. 보수 성향 응답자 중에서도 17%만 ‘불신’ 쪽으로 기울어진다(진보 성향 응답자의 ‘불신’ 비율은 4%다). 9월 현재 상황으로는, 한국에서 방역당국의 신뢰 문제는 정치쟁점이 되기 어렵다. 보수적 시민들만 놓고 봐도 동의를 얻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7.39점은 얼마나 높은 점수일까. 질병관리청은 올해 처음 조사에 포함되어 과거 기록과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간접 비교는 가능하다. 〈시사IN〉의 역대 조사에서 모든 공적제도를 통틀어 가장 높았던 신뢰도는 임기 첫해의 대통령 신뢰도였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신뢰도 6.67점과, 2013년 박근혜 대통령 6.59점이 역대 기록이다. 가장 기대치가 높은 시점인 임기 첫해의, 가장 여론 주목도가 높은 대통령 신뢰도가 6점대 후반이 나온다. 이 외에는 6점대를 기록한 공적제도가 14년 동안 하나도 없고, 5점대도 흔하지 않다. 질병관리청의 신뢰도 점수 7.39점이 얼마나 이례적인지 확인된다.

올해부터 주요 복지제도 신뢰도를 묻는 문항을 새로 도입했다. 복지제도는 신뢰가 생명이다. 내가 내는 국민연금을 나의 노후에 돌려받을 것이라는 신뢰가 없다면 연금제도는 작동하지 않는다. 의료보험과 고용보험도 사정이 괜찮을 때 돈을 내고 위험할 때 도움받는다는 연대의 원리로 작동한다. 역시 신뢰가 핵심 자산이다. 〈시사IN〉은 복지제도 중에서도 적용 범위가 보편적이고 국민 관심이 높은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과 기초노령연금 네 제도의 신뢰도를 측정했다.

복지제도 신뢰도는 국가기관이나 정당과 같은 다른 공적제도보다 일관되게 높았다. 코로나19 국면에서 효용을 널리 알린 건강보험 신뢰도가 6.51점으로 가장 높았다. 6.51점이면 임기 첫해 대통령 신뢰도 수준과 비슷하다. 이념 성향에 따른 차이도 크지 않았다. 보수 성향 응답자의 신뢰도는 6.15점, 중도는 6.44점, 진보는 6.90점이었다.

고용보험 신뢰도는 5.81점, 기초노령연금 신뢰도는 5.80점이었다. 두 복지제도는 당사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일반 여론의 첨예한 관심사에서는 대체로 벗어나 있다. 국세청(5.03점)이나 감사원(4.84점)처럼, 마찬가지로 첨예한 관심사는 아닌 국가기관 신뢰도와 비교해보자. 두 복지제도 신뢰가 1점 가까이 높다. 심지어는 청년 세대에 인기 없기로 악명 높은 국민연금 신뢰도도 5.43점으로 비교적 탄탄했다. 역대 국가기관 신뢰도 최고점은 2009년 대법원이 기록한 5.35점인데(청와대 신뢰도는 대통령 인기와 연동되므로 여기서는 빼고 봤다), 국민연금이 그보다 높다. 한국에서는 복지제도 신뢰가 바닥이라는 세간의 통념과 어긋나는 결과다. 복지제도 신뢰는 국가기관 신뢰보다 일관되게 높았으며, 이념 성향에 따른 차이도 국가기관보다 적었다. 즉, 복지제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이 낮지 않았다. 이런 결과가 코로나19 방역전 와중이라 나온 특수한 것인지, 방역전 이후에도 지속될 흐름인지는 앞으로 몇 년간 조사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사회복지제도 신뢰를 세대별로 쪼개보면 주목할 점이 있다. 모든 사회복지제도에서, 30대가 일관되게 가장 낮은 신뢰도를 보였다. 건강보험은 6.51점(전체) 대비 5.75점(30대), 고용보험은 5.81점(전체) 대비 4.69점(30대), 기초노령연금은 5.80점(전체) 대비 4.52점(30대), 국민연금은 5.43점(전체) 대비 4.30점(30대)이었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첫째, 30대는 생애주기상 보험료를 많이 내는 반면(20대는 경제활동이 적어 30대만큼 많이 내지는 않는다) 보험 혜택과는 거리가 먼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가설이 옳다면 이들이 나이가 들수록 복지제도 신뢰는 올라갈 것이다. 둘째, 이 세대 특유의 문화가 각자도생과 자기책임의 윤리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나이가 들더라도 복지제도 신뢰가 지금의 선배 세대만큼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역시 미래의 조사 추이를 더 살펴야 답을 얻을 수 있다.

조사에 새로 등장한 공적제도 신뢰가 기존 공적제도보다 일관되게 높아서 첫눈에 더 두드러지지만, 2020년 조사에서는 기존 공적제도 신뢰도 대부분 지난해에 비해 올랐다. 이 역시 주목할 만한 변화다. 〈그림 1〉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것은 신뢰도가 지난해보다 상승한 공적제도, 푸른색은 하락한 공적제도다. 붉은색이 9개이고 푸른색은 3개다. 문재인 대통령, 국세청, 감사원, 청와대, 민주당, 경찰, 국가정보원, 국회, 국민의힘은 신뢰도가 올랐다(〈그림 2〉). 대법원, 검찰, 정의당은 떨어졌다(〈그림 3〉). 큰 틀에서 보면, 2020년은 공적제도 신뢰의 대세 상승기였다.

이 대세 상승은 코로나19 방역전이 만들어낸 효과일 가능성이 높다. 〈시사IN〉은 올해 5~6월 KBS와 공동기획으로 ‘코로나19가 만든 한국인의 세계’ 3부작을 연재했다. 이 기획조사에서 공적제도 신뢰 급상승이 먼저 확인됐다. 당시 조사팀은 두 가지 경로를 제시했다. 첫째, 시민들이 코로나19 방역전을 거치며 여러 공적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효능감’을 느껴서 공적제도 신뢰가 오르는 경로다. 둘째, 체제에 위기가 닥쳐올 때는 현재 사회 시스템이 유능하고 정당하다고 강력하게 믿는 심리적 편향이 있다. 위기 상황에서는 기댈 곳이 현재의 시스템밖에 없기 때문에, 시스템을 비판하려는 마음은 억눌리고 정당화하려는 마음은 강해진다. 이런 걸 ‘시스템 정당화’라고 부른다. 이걸로도 공적제도 신뢰는 오른다. 두 경로 모두가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시사IN〉 제663호, 제664호, 제666호).

공적제도 신뢰 상승의 효과는 이번 조사에서도 다소 약화되기는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큰 폭으로 상승한 공적제도는 문재인 대통령이다. 지난해 4.80점에서 올해 5.33점으로 올랐다. 같은 시점에 한국갤럽의 국정수행 지지도를 보면 지난해(43%)와 올해(45%)가 큰 차이는 없지만, 신뢰도 차이는 뚜렷하게 난다. ‘효능감’ 경로가 질병관리청과 건강보험의 높은 신뢰도를 어느 정도 설명한다면, ‘시스템 정당화’ 경로는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제자리인데 신뢰도는 상승한 현상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연합뉴스2월28일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에서 의료진이 근무 교대를 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대법원·검찰·정의당은 신뢰도 하락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들어 네 차례 조사에서 6.67점(2017년), 5.86점(2018년), 4.80점(2019년), 5.33점(2020년)을 받았다. 전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4년 차까지 각각 6.59점(2013년), 5.27점(2014년), 5.39점(2015년), 3.91점(2016년)을 받았다. 3.91점이 나온 2016년 조사는 8월28~29일 시행되었는데, 이 시기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의혹은 제기된 상태였지만,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제대로 불붙기 전이었다.

대법원과 검찰과 정의당은 신뢰도가 떨어진 예외 세 곳이다. 신뢰도 조사 초기인 2009년만 해도 대법원은 국가기관 중 단연 높은 신뢰도를 자랑했다. 이 해 대법원 신뢰도는 5.35점이었고, 이것은 11년 후인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국가기관 신뢰도 최고점이다(청와대 제외). 그러던 것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법원이 정권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한다는 의혹이 거세졌다. 박근혜 정부 들어 대법원은 내리 4점대를 기록하다가,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파동이 불거진 2018년에는 3.42점으로 추락했다. 2019년 조사에서는 4.35점으로 올랐으나, 올해 다시 4.01점으로 떨어졌다. 사법농단 여파가 남아서일까? 그보다는, 대법원에 대한 신뢰가 이념 성향에 따라 크게 갈렸기 때문이다. 진보 성향 응답자의 대법원 신뢰는 4.55점, 중도는 3.93점, 보수는 3.56점이었다. 문재인 정부 지지층일수록 대법원을 믿고, 야권 지지층일수록 불신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진보와 보수가 국가기관을 신뢰하는 정도는 정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진보 성향 응답자가 국가기관을 신뢰하는 정도가 더 강하다. 국가기관 중에서도 이념 성향에 따른 신뢰 편차가 큰 기관이 있고 편차가 작은 기관이 있다. 국세청과 감사원은 편차가 작다. 정치적 쟁점이 되는 일이 거의 없는 곳이다. 청와대, 국회, 대법원, 경찰은 편차가 크다. 특히 대법원 신뢰도가 정권에 따라 이념 편차가 크게 나기 시작했다. 좋은 징후는 아니다.

ⓒ연합뉴스이번 조사에서 진보 성향 응답자가 대법원(위)을 더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조사 대상 국가기관 9곳 중 편차가 역전되는 기관, 그러니까 보수층의 신뢰가 진보층의 신뢰보다 더 높은 기관이 딱 하나 있다. 검찰이다. 검찰에 대한 신뢰도는 보수가 3.74점 진보가 3.17점이다. 매우 이례적인 결과다. 국가정보원처럼 전통적으로 보수가 신뢰하고 진보가 불신해온 기관조차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진보의 신뢰가 더 높게 나온다. 국가정보원 보수 신뢰도는 3.79점, 진보 신뢰도는 4.57점이다. 문재인 정부와 검찰의 관계가 사실상 여당과 제1야당의 관계처럼 흘러온 현실정치의 궤적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검찰은 지난해 대비 신뢰도가 떨어진 폭이 가장 큰 공적제도다. 지난해 신뢰도는 4.15점이었고, 올해는 3.53점이다. 이 추락은 진보 성향 응답자가 주도했다. 보수는 지난해 4.13점에서 올해 3.74점으로 후퇴했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보수 성향 응답자들도 정권과 각을 세우는 검찰을 무조건 응원하는 건 아니었다. 반면 진보 성향 응답자들의 응징은 확실했다. 진보는 지난해 4.19점에서 올해 3.17점으로 대폭 내려앉았다.

ⓒ연합뉴스윤석열 검찰총장이 2월20일 광주 고등·지방검찰청을 방문했다.

신뢰도가 하락한 세 번째 공적제도는 정의당이다. 조직의 성격과 노선은 전혀 다르지만, 정의당 신뢰도 하락의 원인만 보면 묘하게 검찰과 비슷하다. 진보가 지난해 5.15점에서 올해 4.11점으로 후퇴한 게 결정적이었다. 보수는 지난해 2.65점에서 올해 2.87점으로 오히려 미세하게 올랐다.  

마지막으로, 올해 조사에서 드러난 의미심장한 징후 하나를 짚어보자. 〈시사IN〉은 개인의 정치성향과 세계관을 측정하는 문항을 꾸준히 던져왔다. 2016년부터 5년째 묻는 문항 중에 이런 게 있다. “선생님께서는 다음 중 어느 의견에 더 동의하십니까? 1)정부가 국민의 복지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2)개인이 자신의 생계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빈곤의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복지를 중시하는지 개인의 노력을 중시하는지를 묻는다. 더 나아가, 연대와 사회적 책임과 상호의존의 세계관과, 자립과 자기책임 윤리와 각자도생의 세계관, 둘 중 어느 쪽이 시대정신에 더 가까울지를 묻는다. 5년 치 응답 추이가 〈그림 4〉다.

20~30대 청년 그룹의 심상치 않은 변화

‘정부 책임’ 응답은 2016년 65.2%로 시작해서 한 해도 예외 없이 매년 하락해, 올해는 47.6%로 떨어졌다. ‘개인 책임’ 응답은 2016년 31.5%로 시작해서 한 해도 예외 없이 매년 상승해, 올해는 50.8%까지 올랐다. 두 응답의 비중은 올해 처음으로 역전됐다. 현안성 질문이 아니라 정치 성향과 세계관을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들의 태도가 상대적으로 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이 데이터는 그런 면에서도 예외다. 매년 일관된 추이로, 현안과 무관하게, 비교적 빠른 속도로 변했다. 연대와 사회적 책임과 상호의존의 세계관이, 자립과 자기책임 윤리와 각자도생의 세계관으로 대체되는 것일까?

세부 데이터를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대 변수다. 세대별 응답 비율의 구조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첫해 조사인 2017년과 2020년 결과를 비교한 결과가 〈그림 5〉다. 이 해 ‘정부 책임’ 응답은 20대 74%, 30대 75%, 40대 62%, 50대 45%, 60세 이상 45%였다. 알기 쉽다. 2017년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르는 규칙은 ‘나이가 적으냐 많으냐’였다. 그래프는 오른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스키 슬로프 모양이다. 이 그래프에서 40대는 경계선에 걸쳐 있는 세대다.

2020년에는 말 그대로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정부 책임’ 응답은 20대 47%, 30대 48%, 40대 56%, 50대 48%, 60세 이상 42%다. 2020년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르는 규칙은 ‘40대냐 아니냐’다. 그래프는 40대를 정점으로 하는 좌우대칭형 산봉우리 모양이다. 이제 그래프에서 40대는 경계선이 아니라 봉우리가 된다.

20대와 30대가 극적으로 이탈해서 일어난 일이다. 불과 3년 만에, 이 두 세대에서 ‘정부 책임’ 응답의 낙폭은 무려 27%포인트였다(3년 동안 나이가 들어서 세대 구성이 바뀌므로, 동일한 응답자의 변심 효과와 세대의 신규 유입 효과가 둘 다 영향을 끼친다). 문재인 정부 임기 동안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변화를 주도한 그룹은 20~30대 청년이다. 이 세대는 문재인 정부 임기 내내 파열음을 일으킨 공정 담론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2018년 3월에 〈시사IN〉은 이런 징후에 ‘공정의 역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시사IN〉 제546호).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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