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18년 10월7일 경기도 고양시 송유관공사 저유소에서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이른바 ‘저유소 풍등 사건’으로 기억되는, 2년 전 벌어진 경기도 고양시 저유소 화재는 뜻하지 않게 경찰 안팎의 여러 장면을 비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경찰 수사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외국인 노동자를 피의자로 지목하는 과정에서 자백을 강요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경찰은 이 사건을 언론에 제보한 변호사를 지난 9월 기소 의견으로 송치해 ‘보복 수사’ 논란을 일으켰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제어되지 않을 경찰력에 대한 우려까지 낳았다. 경찰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은 ‘인권침해 수사와 보복 수사’ 논란을 면밀히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검경 수사권 이슈와도 맞닿아 묘한 긴장감을 낳는 말이다. 다양한 의미를 지닌 이 사건을 쫓아가보았다.

2018년 10월8일, 전날 벌어진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의 피의자가 긴급체포됐다는 기사가 떴다. 화재 원인이 근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스리랑카 노동자 디무드 씨가 날린 풍등 때문이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경찰은 중실화 혐의로 그를 조사 중이고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뉴스를 보던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가 서둘러 공익활동 변호사 120여 명이 모인 SNS 방에 메시지를 띄웠다.

휘발유 탱크 옆 잔디에 떨어진 풍등 하나로만 17시간 동안 지속된 화재와 110억원이 넘는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해서다. 변호인의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이 모든 책임을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실화 혐의 적용도 문제라 여겼다. 형법상 중실화(제171조)와 실화(제170조)는 글자 하나 차이지만 무게가 다르다. 중실화는 중대한 과실로 화재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3년 이하 금고형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한다. 실화는 1500만원 이하 벌금형이 적용된다.

최정규 변호사를 비롯한 공익활동 변호사 6명이 모였다. 긴급체포 다음 날인 10월9일 경기 고양경찰서는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에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반려됐다. 검찰은 경찰의 인과관계 소명이 부족하다며 보완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0일10일 경찰은 구속영장을 재신청했지만, 검찰은 또다시 반려했다. 당시 경찰의 영장 신청이 무리하다는 비판은 디무드 씨 변호인단뿐만이 아니라, 보수정당 소속인 당시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으로부터도 나왔다. 하 의원은 “외국인 노동자가 제갈량처럼 동남풍을 불게 만든 것도 아니고, 잔디밭에 떨어진 게 불붙어서 안으로 튀게 조작한 것도 아니지 않나요? 바람을 구속하거나 잔디밭에 떨어진 불씨 때문에 폭발할 정도의 시설을 만든 사람들이 구속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겼다.

결국 디무드 씨를 불구속 상태로 수사한 경찰은 2018년 12월 중실화 혐의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2019년 6월 검찰은 ‘중실화 혐의’가 아닌 ‘실화 혐의’로 이 사건을 기소해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현재 디무드 변호인단은 무죄를 주장한다. 안전관리 책임자인 대한송유관공사 관계자 등은 송유관안전관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각각 200만~3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디무드 씨 변호인단은 인권위에 경찰 수사로 그가 인권침해 등을 당했다고 진정했다. 특히 변호인이 문제 삼는 건 3·4차 조사다. 변호인단에 따르면, 경찰 ㄱ씨는 피의자 조사 과정에서 “자꾸 거짓말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면서 선처를 바라는 것이 어떤가요?” “왜 거짓말을 하나요?” “거짓말이라니까요?”라고 수차례 말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헌법상 보장된 진술거부권을 침해했다는 주장이다.

최정규 변호사는 2019년 3월 경찰의 피의자 신문 녹화 자료에 대해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 검찰은 이를 받아들였다. 영상으로 확인하니, 10시간12분 동안 이어진 4차 조사에서 경찰은 디무드 씨를 추궁하며 123회에 걸쳐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국가인권위 공익신고와 더불어 임재성 KBS 기자에게 공익 제보 개념으로 해당 영상을 전달했다. 2019년 5월17일 “윽박지르고 유도신문…경찰, 외국인 노동자 ‘강압수사’”라는 제목으로 〈KBS 뉴스9〉에 보도됐다. 5월20일 국가인권위도 “경찰 ㄱ씨가 디무드의 진술거부권을 침해하였다고 봄이 타당한바 주의 조치하고, 향후 자백을 통해 범죄사실을 입증하려는 잘못된 업무 관행이 개선될 수 있도록 관련 직무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하는 것이 적절하다”라고 결정했다.

ⓒKBS뉴스 갈무리2018년 10월 피의자인 외국인 노동자에게 경찰이 신문하는 모습.

검경 수사권 조정 맞물리며 주목

경찰 ㄱ씨는 KBS와 해당 기자에게 1억2000만원 규모의 민사소송을 걸었다. 명예훼손으로 서울남부지검에 고소장도 제출했다. 언론중재위에도 갔다. ㄱ씨는 해당 보도가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윽박지른다’ 이런 부분은 백번 양보해서 평가니까 이해한다. 그런데 KBS는 1~2초 때 한 발언 다음에 9~10초 때 한 발언을 4~5초 때에 끼워 넣었다. 인권위 결정도 인정 안 한다. 당시 진술거부권이 있으니깐 디무드에게 말(진술) 안 해도 된다고 수도 없이 말했다. 결정 내용을 다투려면 행정소송을 해야 한다는데, 다른 고소 건으로 바빠서 못했다.”

언론중재위 조정은 결렬되었다. 서울남부지검에서는 지난 5월 KBS 측의 손을 들어줬다. ‘경찰의 강압수사는 국민 인권과 직결되고, 이를 언론에 보도하는 것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라는 취지로 임 기자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민사소송은 현재 1심이 진행 중이다).

그러자 지난 9월 초, 경찰 ㄱ씨는 KBS 임 기자와 성명불상자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ㄱ씨는 “검찰의 불기소 결정도 받아들일 수 없어 재정신청을 했다. 나뿐 아니라 통역인 정보까지 담긴 자료가 대외로 나갔다. 당시만 해도 영상을 준 이가 변호사인 줄 몰라서, 개인정보보호법으로만 고소했다. (변호사라는 걸 알았으니) 업무상 비밀누설죄로 최정규 변호사를 추가 고소할 거다”라고 말했다.

8개월 동안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지난 9월2일, 최정규 변호사를 특정해 기소 의견으로 서울남부지검에 사건을 송치했다. 반면 KBS 임 기자는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은 다시금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변호사 단체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변호사협회는 9월9일 성명에서 “수사 절차상의 문제점을 정당하게 지적한 변호인에게 보복성 수사를 하는 경찰이, 국민들에게는 어떠한 권한을 남용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9월10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또한 “이번 판단은 경찰의 인권침해를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알릴 경우 처벌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보복성 수사 의도가 있었다면 이는 경찰의 명백한 수사권 남용에 해당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서울남부지검은 9월11일 “이번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사건과 관련 변호인이 제기하는 경찰의 강압수사 및 인권침해 주장도 조사 과정을 녹화한 동영상 등을 확인해 종합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대한변협과 민변이 제기하는 변호인에 대한 경찰의 보복성 수사 주장도 면밀히 살펴볼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검경 수사권 조정 국면까지 맞물려 돌아가며, 이 사건은 다양한 차원에서 계속 이목을 끌고 있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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