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환자분, 이 약은 단종되었어요.” “아니, 병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환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요?” “(차마 ‘돈이 안 돼서’라고 말할 수가 없어) 다른 계열의 약으로 처방해드릴게요.” “그 회사에서 뭐 받아먹는 거 아니에요? 됐어요.”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난해 7월에는 폐경기 호르몬 보충제인 크리안이 판매 부진을 이유로 공급이 중단됐다. 먹는 호르몬제에 비해 부작용이 적은, 바르는 호르몬제인 에스트레바겔과 에스젠 크림은 2015년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다. 폐경 후 호르몬 보충요법이나 영아의 음순 유착 등 산부인과 영역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약들인데도 선택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제약회사는 약가가 너무 싸서 손해라고 주장한다. 의약품은 시장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싸고 좋은 약이라고 수요가 늘어나서 많이 팔리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유병률이 높은, 즉 환자가 많은 질환이나 특허를 유지해서 비싼 약가를 받을 수 있는 신약에 제약회사의 이윤과 관심이 집중된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건의료가 굴러갈 수는 없는 법. 정부는 국가필수의약품 제도를 운영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977년부터 제작 배포해온 필수의약품 리스트를 참고해, 이 정도는 있어야 국가 보건 시스템이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품목을 설정하고 이 항목들에 대해서는 수급 상태를 모니터링한다. 2020년 6월 기준 441품목이 지정되어 있다. 원가가 너무 낮은 약품은 최소한의 원가를 보전해주고 생산 공급을 지원하는 퇴장방지의약품 제도도 운영한다. 수요가 너무 적은 희귀질환에 사용되는 약은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에서 직접 수입해 환자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보면 완벽하게 굴러갈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필수의약품 리스트에 올라 있다 해도 공급을 ‘모니터링’만 할 뿐이고, 제약회사가 철수를 통보하면 그만이다. 식약처는 약품들이 하나둘 철수해도 대체제가 있으니 문제없다고 본다. 정작 현장에서는? 에스젠 크림이 퇴장한 후, 음순 유착으로 병원에 오는 환아에게 비슷한 성분인 오베스틴 질정제를 전자레인지에 녹여 흐물흐물해지면 그걸 식혀서 바르게 하거나 물에 개어 바르라고 한다. 지정된 용법 이외의 사용 과정에서 오염이나 오용이 발생하면 그 책임은 의사의 부담으로 남는다. 환자와의 신뢰 관계가 깨지는 것은 물론이다.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대체 크림을 구매할 수 있도록 검색을 도와주기도 한다. 대체 크림이 희귀의약품센터에 들어왔지만, 환자가 직접 신청서를 작성하고 진단서를 받아 희귀·필수의약품센터에 보내고 택배를 받는 절차도 어렵다.

필수의약품 공백은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

아예 관심을 못 받는 약도 있다. WHO의 필수의약품에는 있으나 한국의 국가필수의약품 목록에는 빠져 있는 생식건강 분야의 약도 있다. 유산유도약은 낙태죄 법이 공백 상태라 도입조차 안 되고 있고, 피임은 전부 비급여다. 피임링, 피임패치 등은 한국에 들어와서 얼마 못 가 모두 퇴출되었다. 출산장려 정책을 펼치는 정부에서 환영하지도 않았고, 비급여라 약가가 비쌌으며, 설명과 상담에 대한 수가를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급여의 영역에 들어와야 지속적인 처방, 안정적인 수요예측과 공급이 가능해진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더 진일보한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스웨덴·브라질·쿠바·타이·중국 등에서는 국가가 공공 제약회사를 두어 필수의약품들을 공급하고 있다. 등한시된 질병과 그 질병을 앓는 환자, 그리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약품이 이윤 때문에 소외되지 않도록 정부가 관리하는 것이 낭만적 환상이어야 할까.

기자명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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